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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한진중공업 3차 희망버스 타기를 주저하는 이유!?
게시물ID : sisa_1096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untkim
추천 : 2/6
조회수 : 69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7/24 10:55:02

"저 사람은 철공소 사람이 아닌데요" 1970년대 중반, 내가 제세산업 합정동 공장에서 용접공 일을 할 때였다. 그때 우리 회사는 선반기계 하나 가지고 막 시작한 신흥 회사였다. 하루는사장님이 어떤 분을 데려오셨다. 이름은 김권이고 오늘부터 우리 공장에서 일할 사람이라고 했다.[중략] 처음에 우린 권이형이 한 열흘 정도 버티다가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권이형은 힘들어 하긴 했지만 잘 버티면서 해를 넘겼고 우리와 하나가 되어갔다. 물론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한여름 안양에서 일할 때는 더욱 고생이 심했다. 지금은 장비들이 좋아서 크레인으로 철골을 올리지만 그때는 여러명이 작대기로 철골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우린 이골이 났지만 신참인 권이형은 등이 모두 까졌다. 허리도 아플 텐데 권이형은 아프다는 내색도 하지않았다.[중략] 권이형은 일본어도 잘 했다. 우리 사장님이 경기고등학교에 서울대까지 나왔지만 일본어는 못해 일본에서 기계 부품을 사오면 권이형이 사용설명서를 읽었다. 읽고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권이형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양반 도깨비인가? 어떻게 일본어도 하고 영어도 하는 사람이 철공소 일을 해?'[중략] 그러던 어느날 권이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울 공장에 온 지 1년도 훨씬 넘은 때였다.[중략] 세월이 흐른 1995년 어느날, 나는 텔레비전에서 귄이형을 보았다. 하지만 얼굴은 똑같은데 이름이 전혀 달랐다. 텔레비전에 나온 권이형의 이름은 '손학규'였으니 말이다. 권이형을 못 본 지도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헷갈리기도 했다.[중략] 2003년 2월, 권이형이 경기도지사로 있을 때 김포시를 방문한 길에 우리 공장에 온 적이 있었다. 권이형은 옛날 생각이 나는지 용접을 했다. 권이형의 솜씨가 전혀 녹슬지 않아서 놀랐다.[끝] -배옥렬(철공소 동료, 삼정중앙기공 대표)님의 글 중에서 발췌- 『요즘 한진중공업 사태로 온통 세상이 시끄럽다. 정치권에서는 희망버스를 타야 하는니 말아야 하는니 말들이 무성하다. 한진중공업이 배 만드는 조선 회사 아닌가? 노동자의 상당수가 용접공일 테고. 그래서 진짜 용접공 노동자 출신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일화를 적어봤다. 노동이 뭔지 노사가 뭔지 알고들 떠드는지..대통령을 압박해서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지 오로지 보이는 것에만 열중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특히 야당의 대표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해 주길 기대한다.』 http://www.hq.or.kr/tb/board.php?idx=93354 대학을 졸업한 후 손학규는 저임금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의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던 손학규는 박형규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 빈민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 유신 체계가 막을 내릴 때까지 기독교 사회 운동에 몸을 담았다. 그 시간 동안 공안 당국에 수배되어 1년 간 감방에 갇히기도 하고 2년여의 수배자 생활도 해야 했다. 손학규가 수배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손학규의 학교 선배 중에 고마운 선배가 하나 있었다. 그는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손학규를 자신의 철공소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우리 사장,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철공소의 동료들은 머리를 갸우뚱 했다. 얼굴도 곱상한데다가 손까지 여자 손이고 나이도 자신들보다 많아 서른 살 가까이 된 사람을 새로 철공소에서 쓰다니. 철공소의 용접공들과 손학규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용접공들은 늙은'신참병'이 어디서 굴러왔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열흘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신참병'은 비록 힘들어하긴 했지만 용케 버티면서 용접 실력마저 나날이 늘어가는 것이었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여가 시간 때의 모습이었다. 용접공들은 모두 일이 끝나면 화투놀이를 하며 보내는데, '신참병'은 늘 책만 읽는 것이다. 그것도 글씨가 깨알만한 책을 하루 밤에 다 읽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손학규와 용접공들의 사이가 서먹서먹하지는 않았다. 손학규는 나이 어린 용접공들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었다. "미래를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해." 손학규는 용접공들을 위해 영어 사전이나 참고서를 사다주기도 했다. 손학규가 진실하고 겸손하게 행동했기에 용접공들은 모두 그를 따르고 좋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손학규가 철공소에서 사라졌을 때 철공소 사람들은 모두 의아스러워했다. 그들은 손학규가 경찰에 잡혀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철공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손학규가 정치에 입문한 후의 일이다. ...................................................................................... 한진중공업 사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사입니다... 참고로 한번 읽어 보세요. < 한진重 사태의 불편한 진실 > 노사합의 가닥 잡힐 때 고공투쟁 시작 ‘제3자의 투쟁’에 곤혹스러운 시선 구조조정 대상 400명 중 300여명 이미 퇴직, 명퇴자 최대 2억 받아… “대부분 재취업” 작년 174억 현금 배당? “돈 없어 주식 배당”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65100001&ctcd=C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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