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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反하다
게시물ID : readers_182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마곗돈둑들
추천 : 3
조회수 : 71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1/26 13:37:27
지난 100년 동안 
시민의 존엄과 직접행동은 
어떻게 짓밟히고 되살아났는가? 

지금처럼 사는 데는 관심 없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바를 
묵묵히 실천하며 살 때 우리는 
이미 존엄한 존재이다. 

“주권이 지금 만들어진 현재를 살게 한다면, 
존엄은 현재에 틈을 만들어 
새로운 미래를 살게 한다. 
민중과 시민의 직접행동은 
머나먼 미래의 이상 사회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존엄하게 살자는 몸부림이다. 
정치의 가치인 존엄은 
자본과 권력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 
나와 우리가 노력할 몫이다” 

왜 그들의 법대로만 싸워야 하는가? 

자본과 권력은 늘 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자신의 갈 길을 간다. 그리하여 한미 FTA를 강행하고, 명동과 용산의 세입자를 폭력으로 강제철거하고, 4대강을 파헤치고, 핵 발전소와 핵 폐기장을 짓고, 제주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 이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면 물대포를 쏘고, 컨테이너 박스와 경찰버스로 산성을 쌓고 토끼몰이 하듯이 시민들을 몰아 구타하고 잡아간다. 그리고 심지어는 손해 배상 청구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늘 이야기한다. 법을 지키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를 하라고. 
우리는 늘 그렇게 배워 왔다. 부당한 권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중과 시민을 억압하는데도, 민중과 시민은 언제나 (권력이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서) 정당한 방식으로 그에 맞서야 한다고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적도 없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교과서에 실리고 사회의 상식이 되어, 한둘이 모여 회의하면 빨갱이요, 반대의 소리를 높여 행진하고 깃발을 들면 폭력이라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쓴 하승우는 반문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이성을 차리고 이해관계를 따지자고 얘기하는 것은 그 분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폭력이다. 그 속에는 공감하지 않고 타자의 꿈을 배제하려는 폭력의 싹이 똬리를 틀고 있다.”(135쪽) 
“사실 법이 정한 수단으로 말할 수 없는 이에게 법대로 하라는 얘기는 폭력이다. 정당한 주장인데 수단이 잘못되었다면, 그 수단을 잘못이라 규정하는 사회를 의심해야 한다. 왜 누군가 인정한 방식으로만 말해야 하는가?”(140쪽)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역사는 반복된다고 우리를 세뇌시켜 왔다. 그런데 정말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민중과 시민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역사를 단 한 줄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태정태세문단세로 이어지는 왕조의 역사만 배웠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민중과 시민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써 오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 근본적인 궁금함이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우리 역사에는 놀랍게도, 누구나 주권자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속지 않고 자신의 존엄함을 지켰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멀리 외국의 혁명을 동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엄청난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것이었다.”(13쪽) 

우리 역사 속에서 되살린 민중의 존엄과 직접행동, 그 희망의 몸부림 

많은 사람이 3·1 운동을 그저 아름다운 비폭력 시위, 일제의 총칼 앞에 목숨을 던진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이미지, 그리고 저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으로만 기억한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러기에 부당하고 못된 권력에 맞섰던 그 다양하고 치열한 방식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고, (권력이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정당당한 방식으로만 싸워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한다고 배워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런 조건에서라면 누가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까? 

민족 대표 33인과 유관순 누나로만 기억했던 3·1 운동에는 수많은 민중의 목소리와 행동이 있었다. ‘대한독립 만세!’라는 구호 속에는 “내 땅을 돌려 달라!” “내 땅에 내가 원하는 것을 심겠다!” “내 삶에, 우리 마을에 간섭하지 마라!” “더 이상 일제 경찰과 헌병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그를 얻어 내기 위한 행동 역시 있었다. 관원이 탄 수레를 끌던 한 수레꾼은 “어찌하여 너만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나는 비록 미천한 수레꾼이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차라리 개, 돼지를 태울지언정 너와 같은 무리는 태울 수 없다.”며 그 관원을 꾸짖을 정도였다고 한다. 
3.1 운동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꾸리고 땅을 나누며, 일제에 빌붙는 공무원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항일 운동가, 노동 운동가가 되라고 가르치는 학교를 세운 남해의 작은 ‘빨갱이섬’ 소안도 주민이 펼친 항쟁의 역사도 있으며, 부조리한 소작료를 거부하? 불납 동맹을 결성하고 간부들이 구속되자 목포 경찰서와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청으로 몰려가 아사 동맹을 하며 맞서 싸운 암태도 소작 쟁의도 있었다. 

그리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2003년과 2004년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펼쳐진 핵 폐기장 반대 운동에서도 그런 존엄한 기운을 찾을 수 있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보수적이고 농민들은 수동적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거스르는 저항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정부가 한 치도 돕지 않는 가운데 주민 스스로 준비하고 진행한 주민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사건은 단순한 투표와 선거가 아니었다. 정부 없이도 주민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민란을 넘어서, 혁명이었다.”(17쪽) 

“중앙 언론이 장악한 미디어를 벗어나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지금도 곳곳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팔당의 두물머리를 지키는 농민들, 강정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송전탑을 반대하며 싸워 온 밀양의 주민들…… 이기지 못할 거라는 그 싸움을 몇 년째 우직하게 일상으로 만들어 온 수많은 사람이 있다. 자기 밥벌이에 바빠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을 거라는 인식을 비웃듯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향한 시민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시민들이 새로운 사건을, 희망찬 승리를 만들어 낸다.”(17쪽) 

이처럼 이 책에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주권의 이름으로 권력과 자본이 앗아 간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싸운 이들이다. 물론 그들이 만든 사건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실수와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행동이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될 때, 혼란스럽지만 존엄한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321쪽)고 하승우는 이야기한다. 

이제 평화와 탈핵, 공유와 협동조합을 꿈꾸는 삶의 정치로! 

하승우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중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거 혁명’ ‘선거 승리’란 말은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다리 없는 경주마’처럼 모순된 말이라고. 다수의 논리에 의해 오히려 폭력이 행해질 수 있기에, 조금 더 다양해지고 세심해져야 한다고. 몫 없는 사람들의 몫,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인권의 정치’에서 그 몫과 목소리의 범위를 더 넓히라고 요구하는 ‘생태의 정치’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삶의 정치, 일상의 혁명이 필요하다. 
재벌의 독점과 소유에서 협동조합의 공유로, 창조적 노동으로, 그리고 무한경쟁의 교육에서 지역 사회와 어우러지는 큰 배움이 있는 교육으로 바꾸는 운동을 자신이 선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인다. 

“사회를 아무리 바꿔 놓아도 핵 한방이면 그 모든 게 헛된 꿈으로 사라질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미래 세대의 결정과 행복이 존중되려면 우리는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해야 한다. 거짓된 권위에 도전하고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과, 거짓된 과학기술을 포기하고 생태적인 삶을 실현하려는 녹색당은 낡은 세계를 갈아엎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사실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경제와 교육, 과학기술, 폭력의 문화가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다. 이에 비해, 직접행동은 다양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시를 읊고 춤을 추고 노래하며 다른 세상을 예감하고 즐긴다. 시의 언어로, 삶의 노래로 표현되는 평화로운 삶이 밀고 나가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175쪽) 

주저할 것 없이 그저 한 걸음 내딛으면 된다. 하승우는 얼마 전 어머니로부터 받은 메일 한 통을 소개하고 있다.

“3월 6일인가 녹색당에 가입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내가 나의 의사를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핵 발전을 늘리는 것을 거부한다. 우선 조금 편리하고 편하게 살자고 후손들에게 큰 해악을 물려주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남에게 도움을 준 일이 없지만, 그리고 그것이 항상 가슴속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이 일만큼은 도외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가진 힘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상상조차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고 본다. 나의 3세들이 잘 자랄 수
있게, 파이팅.”(287쪽)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우리는 존엄한 존재가 된다.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치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너희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도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방법이고 그러면서 우리는 존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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