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엔하위키 펌)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음해 반박
게시물ID : history_182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광동요리
추천 : 1
조회수 : 121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02 19:51:28

3.2.3. 일부의 '좌편향' 주장 

이들 일부에서는 '좌익계열 친일파는 빠졌다!'라면서 형평성,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여운형,허헌,안재홍]],김약수,홍명희,한용운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 중 안재홍은 '순정우파'라 자부하면서 다녔던 진퉁 보수 우파이다. [12]

이들이 제기하는 부분에 대해 해명하자면, 여운형의 경우 일제 말기 총독부 어용기관지 경성일보에 학도병을 권유하는 기고문이 3일 연달아서 장문의 기사로 그의 명의로 연재되었다는것이 의혹이 제기되어 일부에게 의혹을 샀으나, 편찬위원회는 '1942년~1945년 동안 일제 패망을 대비하고 건국동맹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해 주도해나아갔으며, 상황 앞뒤 판단으로 미루어 볼때 그 증거가 부족하고 자료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반발하여 기각했다. 여운형의 친일 논란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참고. 한가지 덧붙여 지적할점이 있다면 해방정국 경성일보 기자 출신인 사람이 자신의 출신인 부산 지역신문 일간지에다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있었고, 여운형의 학도병 권유 기고문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과정등 직접 증언한 신문기사가 있다.# 그리고 여운형은 조동호와 함께 일제말기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일제패망에 대비했다는점등이 있기때문에 친일논란은 크게 입씨름하지않아도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허헌 경우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3대 인권변호사(김병로이인과 더불어 대표적인 변호사였다.)로 유명했는데, 1940년대초 일제 어용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는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허헌은 1943년 단파밀청방송 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해방맞을때까지 옥고를 치루고 고문당했던점등 감안하면 그가 전향해서 총독부에 협력했다는것은 앞뒤가 맞지않다.[13]

이극로에 대해 친일의혹 제기하는것은 허헌과 마찬가지로 어용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는것 #인데, 이극로는 한글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그것도 그냥 연루된 정도가 아니다. 이극로는 최현배,이윤재와 더불어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된거다!) 해방을 맞을때까지 감옥에서 고문당하면서 지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 최현배와 더불어 가장 높은 형량을 받았다(징역 6년형 선고. 최현배는 징역 4년형 선고, 같은 핵심인사인 이윤재는 고문에 못이겨 옥사.). 수감 도중에 8.15광복을 맞아 최현배와 함께 석방된 이런 인물이 '친일파'라는것은 앞뒤 자체가 맞지않다. 더구나 이극로는 1945년 8월 17일이 돼서야 출소했다.당시 이극로의 출옥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있다. 상당히 처참한 모습으로 출옥했다고... 참고로, 이극로는 해방이후 행적을 보면 좌익이 아니다[14]

이밖에도 안재홍[15],홍명희,한용운,김약수등 이런분들 역시 마찬가지로 무슨 어용신문(경성일보나 매일신보)지에 내선일체 찬양기사 명의로 기고되거나 어용단체에 명의가 있다는것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일제로부터 어떠한 협력한 대가나 작위를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일제말기 국내에서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들의 지조를 지키셨던 분들이었다.

더구나, 친일인명사전을 대차게 깠던 조선일보조차도 자신들을 '민족지'라고 강조하기 위해 안재홍과 홍명희한용운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자폭이나 다름없기 때문. 여기에 이현희[16] 등 보수성향이 아주 짙은 사람들은 박정희를 띄울 때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 비밀요원으로 활동하여 '비밀광복군 활동 했다.'는 이른바 '비밀 광복군 활동설' 떡밥등 쓴 책들이 엄청 많다.#[17] 그런데, 이러한 박정희 비밀광복군說은 박정희가 살아생전 자신이 광복군이라 는 것을 전면 부정했고#,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조갑제氏와 친일연구전문가인 정운현氏[18] 도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부정했다. 조갑제와 정운현에 의하면 '이러한 떡밥은 박정희 미화론자들이 짜맞추기식으로 조작한것'이라고 말했다.[19]


실제로 친일인명사전 내용을 면밀히 보면 김한경, 안준, 강영석[20], 주련, 인정식[21], 차재정, 박영희[22], 신태악[23]등등 공산주의 최고참격 운동가들은 물론이고, 북한에서 애국열사릉에 묻힐 정도의 예우를 받은 고위급 인물들[24]을 비롯해 다수의 좌익계열 친일인사나 재북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고자라니로 더 유명한 친북계열 연극 배우인 심영,문예봉,황철[25]등 북한에서 유명한 공훈배우들 가운데 친일협력 경력이 있는자들은 많이 등재되어 있다. 즉, 수록자들 명단을 자세히보면 친북 계열 친일파들도 다수 수록되어있다.

'형평성' 드립이라든지 '공정성' 등을 거론하기 이전에, 위의 열거된 분들을 친일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분들이 친일을 해서 얻은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는 옹호론 애초에 좌파 계열 친일파는 생계형 친일파나 출세형 친일파보다 신념형 친일파가 많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필요없다는 반박에 부딪히고 있다.

3.3. 여(與),야(野) 정치권에서 악용의혹 제기와 논박 

친일인명사전의 제작은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하고 해명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제작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이 정치공방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그 순수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친일인명사전 제작과정을 보면 일제강점기 공문서,신문,잡지 등 3천여종의 문헌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250만 건의 인물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부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2만5천 건의 친일혐의자 모집단을 추출하고, 20여 분야의 전문분과회의와 상임위원회 심의를 거친 결과 4430명을 선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정된 인물들은 각 분야별 학계에서 권위높은 전문가들하고 상의하고 재차 검토 및 자문을 거쳐 전체회의에서 확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의 스승격이 되는 백철[26][27] 그밖에도 진보성향 백낙청의 부친(백붕제)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있다. 이런 사례는 이 외에도 상당히 많다.

이런데도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뿐만 아닌 대한민국 노무현 정권에서 만든 친일진상규명위조차도 '좌편향'드립에 '정치적 음모론이 있다'고 쳐갈기고 있다.#

대한민국 노무현 정권에서 직접 나선 친일진상규명위에는 노무현 대통령, 국회의원,대법원등 여러 주요관공서 기관에서 높으신분들이 직접 추천해서 편찬위원들 임명했다. [28]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준식 연세대학교 교수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외손자이다. ]

4. 평가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