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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과 국가보안법 제정의 이유..
게시물ID : sisa_109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새마을운동
추천 : 23/8
조회수 : 704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1/07/26 13:43:47
< 위키백과 > ## 대한민국내에 남로당과 관련된 사건 ## 2·7 파업과 남로당 이 부분의 본문은 2·7 사건입니다. 1948년에 들어와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2·7파업이다. 1948년 2월 7일 아침,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은 통신과 운송설비의 가동을 중지시키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제주 4·3 항쟁과 남로당 이 부분의 본문은 제주 4·3 항쟁입니다. 제주 4·3 항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1948년 남로당원 김달삼이 신탁통치 반대, 단독정부 수립운동 반대, 통일정부 결성, 친일파 척결 등을 내세우며 제주도 내의 좌익세력을 결집하여,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봉기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 사건에 제주 도당이 깊게 연관되어 있을 것은 분명하나, 남로당 당중앙과의 연계는 아직 미상이다. 이 사건에 대한 진압을 명받은 국군 14연대는 내부의 남로당계열 군인들이 진압명령을 거부하였고, 후에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을 주동하였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과 남로당 이 부분의 본문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입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은 1948년 당시 대한민국 국군 14연대의 인사계 상사였던 지창수가 14연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여수시와 순천시 일대를 장악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으로 들어간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주동자 지창수가 남로당원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수는 수도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지창수가 부대원들에게 조선인민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후에 남로당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등의 상황증거는 지창수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을 남로당 당중앙이 후에 어쩔 수 없이 승인했음을 보여준다.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는데, 이 탄압을 받고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박정희는 후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있으면서 체포된 뒤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전부 폭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또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여순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후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남로당의 남한 내 지상활동은 거의 소멸했다. 남로당이 남한내에 주도한 여러 파업과 폭동, 반란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제정, 남한 내 모든 공산주의세력을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공권력을 이용해 탄압하였다. ## 남노당이 원하고 원하던 우리의 민족 자주통일 한국전쟁.. ##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해 단 3일만에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갑자기 서울에서 진격을 멈춘다. 세계 어느 나라 전쟁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추는 예는 없었다고 할 만큼, 전쟁초기에 상대방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군 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것이라고 한다. 1. 문제의 3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 동안 한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미군이 긴급 투입되었다. 때문에 김일성은 서울에서 머문 이 3일을 전쟁을 실패요인으로 지적했다. 2. 북한군, 도하하려면 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은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국군이 인도교를 폭파한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경부철교나 나루터를 이용해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때문에 비록 다리가 폭파되고 특별한 도하장비가 없었어도 북한군이 강을 건널 의지만 있었다면 28일 서울 점령 직후에도 충분히 가능했다. 3. 서울 제한점령론? 북한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내 남로당이 봉기를 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서울 제한점령론. 이에 따라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간 기다리지만, 봉기가 일어나지 않고 더욱이 미군이 예상보다 빨리 개입하게 되자 작전을 바꿔 남하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한때 학계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4. 북한군의 원래 계획 다리 폭파로 강을 건널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김일성과 스탈린이 서울만 제한점령 하려 했던 것도 아니라면 과연 북한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직전에 만들어진 북한의 남침작전지도에 북한군의 원래 의도가 들어있었다. 5. 춘천전투 북한군 작전의 핵심은 1단계 작전에 있다. 북한군 주공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여 한국군을 강 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조공부대가 수원으로 내려와 강 이남으로 내려온 한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내려와야했던 북한군에게 문제가 생겼다.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6. 말고개 전투 춘천에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홍천으로 진격해 가던 북한군의 12사단 중 2개 연대를 춘천으로 급히 보낼 정도로 북한군의 상황은 급박했다. 하지만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겼더라도 북한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던 국군의 6사단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7. 춘천전투, 그 이후 춘천-홍천 지역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곧바로 북한군과 소련고문단은 북한군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한다. 춘천, 홍천 점령의 총책이라고 할 수 있는 2군단장을 교체하고 2사단장도 해임한다. 이외에도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바꾼다. 그리고 북한의 남한점령계획은 무너졌다. ===================================================================================================== ## 글쓴이 사설 ## 대한민국 보수들에게 민주, 진보 , 노동 등등 개혁 세력들이 왜 탄압과 멸시를 받을수 밖에 없는지 알수있는 역사적 근거이며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의 어른들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주 큰 이유이다. 이 땅에 평화를 다시 되찾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을 위해 희생 하셨던 청년 시절의 위대한 용사들.. 이들을 수구 세력이라 욕하는 것은 이 땅에 나의 존재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反국가적 反일륜적인 한민족의 수치스런 사건들 보다 친일 척결을 우선시 하는 오유 시사게의 세력들에게 反반일륜적 범죄자 전ㅇㅇ 과 우리와 휴전중인 북한의 3대 정권은 그들의 중요 관심사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것은 님로당의 정신에서 찾을수 있다. '신탁통치 반대, 단독정부 수립운동 반대, 통일정부 결성, 친일파 척결' 등을 내세우며 봉기를 했던 남로당 출신이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의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체포된 뒤 군법회의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전부 폭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친일을 맹세했던 남로당 출신 박정희.. 그의 배신으로 다시 남로당의 친일 척결자 대상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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