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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당과의 7년 전쟁, 나당전쟁.
게시물ID : history_1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루Ω
추천 : 3
조회수 : 1049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1/04/08 17:36:15
출처는 엔젤하이로 위키.


670~676년에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삼국통일은 이 시기에 사실상 이루어졌다.

신라는 처음에는 백제를 위주로 대립하는 관계였으나, 고구려가 신라의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오히려 백제와 손을 잡아 여제동맹을 결성하면서 신라는 원교근공의 전략 하에 바다 건너 당나라에 도움을 구했다[1]. 결국 이 같은 노력은 결실을 맺어 660년 누대의 원수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2].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라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당군 총사령관 소정방이 약속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기 위해 김유신이 보낸 신라의 전령을 참하라고 명했는데 김유신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당군 진영으로 달려가 항의해 무마시키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결국 668년 고구려까지 쓰러지자, 당은 내친 김에 한반도에 발을 뻗으려는 마각을 드러낸다.

사실, 당나라는 처음부터 신라에 영토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누대의 원수인 고구려를 무너뜨린뒤 차제에 신라까지 정복해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다.

당은 우선 백제 전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 도독부 로 명하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는 등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였다. 이듬해인 664년엔 이미 멸망한 백제의 태자 부여융[3]과 취리산에서 화맹을 맺게 하는 등 당의 횡포는 끝이 없었다.

669년 당나라에서 활을 잘 만든다고 알려진 신라의 장인 구진천을 요구해서 데리고 갔다. 하지만 구진천은 조국 신라를 위해 끝까지 비법을 숨겼다.[4]

670년 당나라는 사죄사로 온 김흠순과 김양도 둘 중, 김흠순은 돌려보내고 김양도는 감옥에 가뒀는데 김양도는 곧 죽고 말았다. 물론 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같은 해, 문무왕은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는데 우선 웅진도독부를 위시한 옛 백제 전토를 수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당나라에 대드는 것을 의미했다.

예상대로 당에선 군사를 보냈는데 671년 6월 석성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7월 26일, 대당총관 설인귀가 이 소식을 듣고 문무왕에게 책망하는 글을 보냈다.[5] 이에 신라에서는 강수가 '답설인귀서'를 써보내면서 명분을 세웠다.

9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4만을 이끌고 평양에 당도해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기 시작했다.

10월에 당나라 선박 70여척을 쳐부수고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1백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672년 7월 고간과 이근행이 각기 1만과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백수성 근처에 주둔했다. 이에 백수성에 주둔했던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도우러 온 신라군이 당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신라는 대아찬 효선을 포함해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초전에서 신라군 장창당이 당 기병을 격퇴하자 다른 부대들이 공에 눈이 멀어 무질서하게 추격하다 역습을 당해 궤멸당한 것이다. 이를 석문 전투라고 한다.[6]

야전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안 신라의 문무왕은 이 후로 수성전에 치중하며 한편으로는 사죄하는 서신 등을 보내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673년 7월 1일, 문무왕은 물론이거니와 신라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당과의 싸움에서 열세인데다 정신적 지주까지 상실하자 급격히 이탈하는 사람이 늘었다.[7]

8월과 9월에 꾸준히 성들을 증축하고 보강해 수성전에 만전을 기했다. 한편으로는 대아찬 철천에게 명해 전함 1백척을 주어 서해를 지키게 했다. 이 즈음 다시 당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아홉차례를 싸웠고 신라가 모두 승리해 2천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674년,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했고 이에 당 고종이 격노해 조서를 내려 신라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왕제(王第)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했으며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675년 2월, 유인궤가 신라의 칠중성을 깨뜨리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분이 안 풀린 당 고종은 이근행에게 다시 신라를 공격하게 했고 이에 문무왕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고 사죄했는데 그제서야 약간 분이 풀린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주고 군사를 물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문무왕은 백제 전토를 수복하고 옛 고구려의 평양까지 공격했다. 가히 화전양면 전술의 대가라고 할수 있다.

9월에 설인귀가 당에 와있던 신라 유학생 김풍훈[8]을 향도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확보하고 전함 40여척,군마 1천필을 탈취했다.

같은 달, 이근행이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왔는데 신라군이 이에 맞서 싸워 격파했고 군마 3만 380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는데 성공했다.[9] 물론 왕은 동시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로도 아달성, 석현성, 적목성 등지에서 당군과 격전을 벌였고 성을 뺏기고 뺏는 치열한 접전이 오갔다[10].

매초성 전투는 9월 29일 치뤄졌으나 그 해 당군은 칠중, 적목, 석현성을 공격했고 이후로도 크고 작은 전투가 18차례나 벌어진 것을 감안할 때, 당군의 전투력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군이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후 당군의 공격 지점들을 보면 중국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원도 쪽으로 빙 돌아가는 루트였다. 따라서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에게 직접적 타격이 있었다기보다는 천성 전투에서 당군의 보급선단이 궤멸된 후, 매소성에서 당군의 전진을 막고 그 결과 보급이 끊긴 당군이 퇴각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당군이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자를 버리고 갔고, 그것을 신라군이 노획했기 때문에 전리품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676년 11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신라의 서해로 쳐들어왔는데 사찬 시득이 소부리주의 기벌포에서 맞서 싸웠다. 처음에는 패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승리했고 4천여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고 7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 원정때보다 더욱 길어진 보급선, 이를 보완하려던 당나라 수군의 연이은 패전, 신라군과 옛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 토번의 준동[11], 그리고 신라와 당은 과거 고구려에 대한 것처럼 서로를 그렇게 의식하여 위협으로 생각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지속할 당위성이 오래잖아 사그라든 것도 있다.

이후 당고종이 병상에 누워있다가 사망하면서 당이 내부적으로 국정이 혼란해진데다, 연이어 발해가 무서운 속도로 만주를 장악해가자 이제 당은 오히려 신라의 대동강 이남 지배권을 인정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당 - 신라와 발해 간 전쟁이 벌어졌으나 영주 말갈족을 끌어들인 발해는 요동을 제외한 옛 고구려 고토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발해 역시 3대 문왕 때 또한 당과 국교를 맺으면서 비로소 한반도와 당 간의 긴장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후 신라는 당이 제후국 가운데 1순위 서열로 대접할 만큼 상호간에 친밀해졌으며, 신라방과 같은 당 내에서의 거점도 여럿 형성되는 등 관계는 급반전했다.


[1] 진덕여왕이 당나라에 보낸 태평송이라든가 당나라의 연호, 복식 등을 도입한 것을 보면 당시의 절박한 심경이 상당히 드러난다.
[2] 20년전 백제군에 의해 참살당한 딸과 사위의 일을 아직도 잊지 않은 태종 무열왕 은 의자왕에게 친히 자기에게 술을 따르게 함으로서 원수를 갚았다.
[3] 당에 끌려갔다가 웅진도독이 되어 다시 옛 백제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4] 처음에는 신라의 자재를 쓰면 잘 될 것이라며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는 나무가 바다를 건너는 도중 습기를 너무 많이 먹어 성능이 형편없게 나왔다고 끝까지 버텼다.
[5] 지금으로 치면 외교적으로는 주한대사, 군사적으로는 연합군 사령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그런 되지도 않는 글을 보낸 꼴이다.
[6]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이 전투에서 옥쇄하려다 부관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세속오계를 어겼다며 원술과 의절을 선언했다.
[7]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나라에 붙으려 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그의 처자들은 천민으로 만들었다.
[8] 문무왕 즉위초에 처형한 대당장군 김진주의 아들이다.
[9] 당시 신라군은 3만이었고 당군 20만이라는 숫자는 요즘 신빙성이 의심을 받고 있으나 군마 3만 380필이라는 기록을 볼때 당군 숫자가 엄청난 대군이었음은 분명하다.
[10] 다만 매소성 전투의 진행에 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른 전투와는 달리 당군의 수급을 취한 기록이 없고 전리품만 기록되어 있어서 직접적인 교전을 통해 당-말갈군의 주력을 궤멸시킨 전투는 아니라고 보는 것.
[11] 티베트 의 불세출의 명장 가르친링이 등장해 당나라 장수들을 갖고 놀기 시작한게 이 때쯤이었다. 하지만 나당전쟁 기간중 당과 토번의 충돌은 670년 대비천 전투 한번 뿐이었고 다시 당과 토번이 격돌한 것은 나당전쟁 종전 2년 후인 678년부터이다. 즉 신라의 승리에 토번이 끼친 영향은 그렇게까지 특기할 성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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