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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전투 이후 일본군의 후퇴는 명량때문이었나?(펌글)
게시물ID : history_183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10
조회수 : 226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10/11 01:31:45
1. 양측의 규모
조선 수군 13척의 명단 중 확인 가능한 건 다음과 같습니다.
통제사 좌선 - 이순신
경상우도
미조항첨사 김응함 영등포만호 조계종  안골포만호 우수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전라좌도
조방장 배흥립 회령포만호 민정붕 발포만호 소계남 녹도만호 송여종

전라우도
전라우수사 김억추

여기서 김경진님은 전라우도에 가리포첨사 이응표와 해남현감 류형을 추정해서 덧붙이시더군요. 이응표의 경우 명량해전 후에 뜬금 없이 경상우수사에 제수되는데 (선조가 원균을 구하지 못 했는데 뭔 공이냐며 잘라버립니다 -_-) 이것 때문인 듯 하고 류형은 칠천량 이후 이순신을 모셨다고 하는 기록 때문인 듯 합니다. 일단 제 능력으로는 이 이상 찾기는 힘드네요. 류형 같은 경우는 명량해전 이후에도 그 해남에서 벌어진 일인데 정작 다른 장수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고 아예 일기에 류형이 언급이 안 되다시피해서 그냥 추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통제사 상선에서 강진현감 이극신이 탔고, 순천감목관 김탁이 전사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순천 부사 우치적도 상선에 탔을 거라고 추측되며, 현감, 부사가 상선에 탔는데 정작 만호부터 대장까지 판옥선을 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칠천량 이후 자기 배를 보존한 장수는 판옥선을 따로 이끌고 나머지 판옥선이 없는 지휘관들은 상선에 일개 사수로 탄 듯 합니다. 
휴 -_-; 딱 13척 참전한 것도 이렇게 참전 장수들 찾기 어려운데 칠천량에 참전한 130척이 넘는 장수들을 찾아내고 있는 소설 임진왜란 공저자 분들은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간양록에는 일본의 각 나라와 다이묘들을 설명하면서 주석을 붙이는데 이 중 배로 무안에 간 자들(舟至務安)이라는 주석을 통해 당시 수군 소속이었던 다이묘들, 즉 명량 해전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되었을 다이묘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구루지마 미치후사(이순신에게 죽은 자로 나옴)가 있고 육군 출신이었던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카가와 히데나리도 포함돼 있죠. 여기에 군감으로 참전한 모리 다카마사, 후쿠하라 나오다카가 있습니다. 재밌는 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 명단에 없네요. 추가로 이케다 히데우시(히데오?)도 간양록에 배로 진도에 갔다가 배 위에서 죽었다고 돼 있습니다. 이게 병사라고 하는데, 그 병력도 해전에 참가했다고 봐야 될지는 모르겠네요.
+) 김경진님이 임진왜란에서 와키자카가 패할 것 같자 아예 퇴각하라고 하는데 그게 여기서 비롯된 듯 합니다. 

여기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간 다쓰나가, 하타 노부토키가 포함됩니다. 당시 일본의 수군이 모두 나온 것이고, 거기에 육군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나카가와 히데나리의 병력까지 충원되었죠. 
+) 이들이 직접 참전했는지 병력만 지원했는지는 설이 엇갈리는 모양입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병력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 초본에는 이 중 130여척, 이충무공전서본에는 333척,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200여척, 난중잡록에는 수백척, 기타 연려실기술이나 이항복의 백사집에는 500~600척이라고 적고 있죠.

행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난중일기에 맨 처음 적혀 있던 게 200척 중 130여척이라고 하는데, 200여척이든 500~600여척이든 많은 수긴 하나 편차가 너무 심하죠. 거기다 강항은 잡혀서 무안으로 갔을 때 600~700여척의 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량해전 이후에도 이 정도의 배가 남아 있었다면 역시 적 선봉을 조금 꺾었을 뿐이라는 선조와 일본측 시각이 맞는 것일까요? 
+) 말이 같은 걸 보면 역시 둘은 같은 편이었나 봐요. 

겨우 무안까지 가려고 이 많은 배들을 모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 격파 후 바로 한양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바로 충청도와 경기도를 공략 중인 이들에게 보급하는 목적으로 집결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 중 적 전투선의 규모는 역시 난중일기에 기록된 130+a 입니다. 다른 기록에 있는 것들은 수송선도 전선이라고 포함한 거겠죠. 

 

저번 편 마지막부터 인용하고 있는 사진의 출처는 이글루스 hyjoon님의 블로그입니다. 명량 해전의 위치 등 자세한 것을 보고 싶으시면 다양한 설들을 담고 있으니 괜찮을 듯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보죠.

2. 결전
  - 이순신의 몸은 고문과 슬픔으로 인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배 타기도 힘든 몸이었고 서 있다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죠.
- 그는 수군을 추스리면서 적 점령지 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언제 전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죠.
- 조정은 통제사로 다시 앉히면서 품계를 여전히 정 3품 절충장군으로 해서 명령체계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 배설은 교서에 숙배하지도 않고 반항하고 도망가면서 오히려 분위기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 그 부하 장수들도 도망가고 겁을 내서 단 몇 척이 쳐들어와도 이순신이 직접 막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 경기 수군, 충청 수군은 물론 근처의 임치첨사의 병력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병력은 단 13척이었습니다.
- 전라도의 육지 대부분은 함락되었고, 피난민들이 이순신을 따라다닐 정도로 이겨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 위에서 저 중 절반 이상이 수송선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과연 그 때 그 사람들에게 "전선은 겨우 백 척 쪼끔 넘네"라고 생각하라고 하는 건 무리입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머리에는 삼백척 이상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실록에 인용된 약간을 빼면 장계는 소실되었고, 현장에 있던 난중일기를 통해 그 자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선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들어온다고 했다."
+) 명량을 거쳐라는 말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이렇게 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무리가 부족한 것을 스스로 헤아려 문득 회피할 계책만 강구하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으로 나가 있었다."
+) 원래 작전이 어찌했든 아군은 적을 상대할 생각을 차마 못 했습니다. 특히 김억추는 2마장, 800m 바깥으로 나가 있었죠. 애초에 이것이 상선이 가장 전투력이 강하기에 선봉에 섰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 전후의 기록에서는 그런 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급히] 노를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포, 현자포 등의 총통을 어지럽게 쏘아 대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휘몰아치고, 군관들이 삼대처럼 총총 배 이에 늘어서서 화살을 마구 쏘아서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났다 하는 것이었다. 둘러싼 것이 여러 겹이어서 형세를 측정할 수가 없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대경 실색하는 것이었다."
+) 애초에 이게 작전이었다면 "급히"라는 말이 나올 수 없었겠죠. 적은 이 한 척을 상대하지 못해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의 수는 많았고, 상선의 병력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으나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테니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 적에게 사격하라고 했다."
+) 결국 상선이 선봉으로, 유일하게 싸우고 계속 적을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 하나, 이순신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죠. 혼자서 130척을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전 칠천량 편이 생각나실 겁니다. 칠천량에서 김완은 단독으로 적을 막아내다가 끝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번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혼자 있던 장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이었습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리라고 군령을 내리고자 하나 여러 적들이 물러나는 틈을 타고 대어들 것이므로 진퇴유곡이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고 명령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나의 배에 접근했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도 다가왔다."
+) 잠시 배를 물리기도 힘들 정도로 적이 계속 다가오는 상황, 하지만 상선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군을 부르는 초요기를 세우자 김응함과 안위가 다가옵니다. 먼저 온 것은 안위였죠. 이 때 김억추의 배는 멀리 떨어져서 "가물가물"했다고 합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느 곳에서 살 것이냐?]라고 했더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어찌 죄를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했다. 두 배가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령을 내리니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므로 안위 및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중략) 거의 힘이 다 하게 되었다."
+) 부끄러움, 혹은 무서움이었겠죠. 하지만 이것은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안위의 배가 단 두 척을 상대하다가 힘이 다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통제사 상선과 안위의 배가 병력 차이가 얼마나 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판옥선은 단독으로 맞붙는데는 이 정도가 한계였던 듯 합니다. 이 때 격군들 7~8명이 바다에 뛰어들 정도로 안위는 수세에 몰린 것 같습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들어가 빗발치듯이 마구 쏘아 댔더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다 섬멸되었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하나도 몸을 움직이지 못 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중략) 적장 마다시라고 했다.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라고 말하는 고로, 즉각 명령하여 토막을 내어 자르게 하니 적의 기사게 크게 꺾였다."
+) 한 숨 돌린 상선은 곧바로 돌격해서 안위를 구하고, 적 세 척을 섬멸합니다. 여기에 송여종과 정응두가 마침내 합세했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저 세 척, 혹은 그 직후에 적장의 배가 격침되었고, 적장 마다시가 바다에 떨어졌다는 거죠. 저 마다시가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맞다면 안위와 김응함이 투입되기 전에 이미 휘하 함대가 소수만 남았을 정도로 전멸했다는 것입니다. 상선이 혼자 싸우고 있는 동안에요. 
때문에 이순신은 이례적으로 적장의 목을 베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막내어 돛대에 걸죠. 

"여러 척의 배들은 적이 범하지 못할 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가지런히 나아가 각각 지자포, 현자포를 놓으니 그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키고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선 31척이 부서지자 적선들은 피하여 퇴각하고 다시 접근하지 못 했다."
+) 이렇게 난중일기 상에서 명량해전은 끝납니다.

3. 다른 기록들에서의 명량 해전
1) 난중잡록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여기서는 내도수,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적장으로 보고 있으며 피난민 백여 척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재밌는 건 이순신이 일부러 적을 끌어들였다는 쪽으로 말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탈출한 건 겨우 10여 척 뿐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2) 실록
명에 보내는 조선군의 전과에 포함돼 있는데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31척 격침을 20, 11척으로 나누고 있는데, 역시 이순신이 혼자 싸웠다고 하는 것은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억추, 배흥립, 안위 등과 군세를 정돈한 후 (중간 과정을 건너 뛰고) 힘껏 싸워 20척을 깨뜨리고 정응두, 송여종이 합세해서 11척을 깨뜨렸다고 할 뿐이죠. 

한편으로 전풍상이라는 병사가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왜장 산도의 포로가 되었다가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인 진역군리에 갔다가 돌아왔고, 산도가 하동에서 순천, 흥양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에서 통제사와 교전 후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도도 다카토라의 관직이 사도노카미였으니 이게 산도가 아닐까 생각되고, 산도의 고을이라는 진역군리에서 진을 뺄 경우 역군리가 되는데 이게 당시 다카토라의 영지였던 이요 쿠니와 얼추 비슷합니다. (이요쿠니 이욕쿠니 역쿤리 역군리 흐음...) 다만 이게 일본의 국도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이라고 해서 의문이지만요. 이요 쿠니는 시코쿠의 서쪽에 있거든요. 일개 병졸이니 큐슈의 나고야성 등을 일본의 수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충무공전서의 경우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닻을 내려서 물살을 견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비록과 수정실록의 경우 전장을 벽파정 아래로 잡고 있구요. 연려실기술의 경우 31척을 격파한 후 그 기세를 타고 전진하니 적이 도망갔다고 하고 있죠. 저녁 6시경까지 싸우다가 바람이 잘 불어 해협을 빠져나가 도망갔다고 하죠.

4) 일본 기록 
고산공실록에는 5시에 전투를 시작해서 적을 습격하려고 하니 우수영 쪽이 아닌 진도 쪽 벽파진에 정박하고 있었고, 물살 때문에 대형선을 피하고 중형선 세키부네를 돌입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선군은 계속 버티고 있었고, 일본군은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했고, 그밖에도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세키부네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는데 조선 수군이 낫을 걸고 활과 조총을 쏘아 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고 하죠. 이 때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두 장수가 겨우 구했다고 하고 도도 다카토라 역시 손에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4. 장소는 어디인가?
1) 우수영 앞바다?
명량해전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논란 중입니다. 자세한 얘기 및 추정은 hyjoon님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구요.

대표적으로 전장으로 추측되는 곳은 현재의 진도대교 바로 뒤부분입니다. 혹은 거기서 약간 뒤로 물러선 곳이죠. 진도 대교 바로 뒤로 툭 튀어나온 부분 있죠? 그 해역 부분까지가 현재의 추정입니다. 다만 이게 애매한 것이 난중일기에서 어색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거기다 명량 부근의 유속은 9에서 11노트 수준으로 여기서 전투가 정말 가능했을지, 즉 조선 수군이 여기서 버틸 수 있었을지도 의문인 거죠.
시작부분에서 이미 "명량을 넘어서"라고 돼 있으며, 흔히 말하는 명량의 좁은 길목은 "적이 아군을 포위했다"고 하기에는 어색합니다. 이것 때문에 임진왜란 해전사에서는 새로 우수영 앞바다가 전장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적이 "해협을 넘어서 아군을 포위한" 게 들어맞으니까요. 덤으로 우수영 포구에는 적을 막기 위한 포구가 설치돼 있으니 이게 실제 쓰였든 아니든 이것을 통해 철쇄설이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구요. 명량이라면 몰라도 우수영 앞바다라면 적이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도 있구요.

문제는 당시 기록들에서 조선 수군이 아예 명량 넘어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었다느니, 벽파진에서 적을 깼다느니 하는 기록들이 나오고, 이충무공전서 등에는 아예 명량에서 닻을 내리고 있었다느니 하는 기록들이 있다는 거죠. 우수영 앞바다일 경우 적이 코 앞까지 다가 온 상황에서 급히 출격해서 요격했다고 하니 이것은 전날에 이미 전투를 각오하고 회의를 했다는 것과 배치되기도 합니다. 즉 난중일기의 "명량을 넘어서"를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한 이렇게 될 경우 난중일기의 다른 부분과는 또 어색해집니다. 우수영이 바로 뒤에 있는데 아군이 물러설 수 있었을지, 특히 먼 바다로 물러선 데다가 김억추는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멀리 도망갈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결정적으로 우수영 앞바다에서 단독으로 싸웠다면, 일본 수군은 "명량의 유속이고 뭐고" 130척이 상선 한 척을 완벽하게 포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지형이고 뭐고" 유리한 점 하나 없이 그냥 적에게 맞서 싸웠다는 거구요. 만약 적이 이순신의 상선 포위하면서 후퇴한 아군에 한두척만 보내도 칠천량이랑 같은 꼴이 날 수도 있죠. 에... 빠심에서는 이게 맞지 않나 생각하긴 하지만요.

이런 점에서 우수영 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봅니다.

2) 전장은 어디까지일까?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백사집 등에는 공통적으로 해류가 바뀌자 아군이 진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수영 앞바다 설이 맞다면 이 경우 진격은 명량 근처까지로 제한되겠죠. 하지만 전장이 현 진도대교 근처나 후방 어느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진격은 명량을 넘어서 벽파진 부근까지 갔다고 봐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사료에서 나오는 벽파진에서 진을 쳤다느니 벽파진에서 적을 깨뜨렸다느니 하는 게 들어맞죠. 
특히 봐 둬야 할 것이 도도 다카토라와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위험에 빠졌다는 부분입니다. 총대장이 후방에 위치해야 된다는 것은 상식이죠. 또한 군감은 아무리 전장을 감독한다 하더라도 히데요시급으로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물에 빠지고 배를 갈아타야 됐다는 것은 조선군이 진군한 결과여야 가능합니다. 실제 낫을 걸어 배를 끌고 공격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일본이 공격 중이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죠. 

즉 처음 전장이 어디였든 조선 수군은 명량을 넘어 최소 벽파진 수준까지 전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5. 전과 - 31척? 
거의 한나절에 걸친 전투였는데 전과는 단 31척이죠.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모두 어마어마한 전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하고 있던 난중일기를 의심해야 되는 상황이죠. -_-;

간양은 적장 내도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여기서 전사했다고 하고 있으며, 간 다쓰나가, 하타 노부도키도 전사했다고 합니다. 이 간 다쓰나가의 병력 중에 간 마타시로가 있는데 이게 적장 마다시가 아닐까 하는 설도 있죠. 고산공실록에는 군감이 세키부네에서 경비선으로 갈아탔고, 위험에 빠져 도도군이 구해줬다는 말이 있죠. 간양록의 경우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선수(수군)과 가로(가신)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아가 도도 다카토라조차도 부상당했죠. 애초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간 다쓰나가가 전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 함대 자체가 완전히 궤멸됐다는 걸 뜻합니다. 

도도 다카토라와 모리 다카마사의 병력이 130여척에 포함돼 있고, 이들이 전투선의 전부일 경우 전투 후반 이순신의 공격은 적의 수송선에 대해서도 가해졌을 것입니다. 아마 이 때문에 퇴각한 거겠죠. 반대로 이 130여척이 선봉 부대이고 다카도라의 본진이 따로 있을 경우 참전한 일본 수군은 130여척 이상이며, 200척이 넘을 수도 있죠. 후반의 공격은 이들에 대한 공격이었을 겁니다.

어떤 쪽으로 보나 조선 수군의 공격이 교전한 상대가 이 130여척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난중일기 및 장계에 나온 31척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제까지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임진왜란 해전사 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이순신은 장계에 확실하게 깨뜨리고 아예 불태운 것만 보고하고 있죠. 옥포해전의 경우 다른 기록 및 일본에서도 피해를 50척 수준이라고 하고 있지만 장계에서는 겨우 26척입니다. 
한산도 대첩의 장계에서 보면 장수 하나가 한 척씩 맡아서 아예 묵사발을 내서 가라앉히던가 나포하는 경우만 전공으로 치고, 나머지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이 죽었다"는 식으로 적고 있죠. 명량해전도 마찬가집니다. 20척을 깨뜨렸는데 사살이 매우 많았다느니 하고 이러면서 수급을 "8급이나 베었다"는 것은 전형적인 이순신의 방식입니다. 

즉 이 31척은 확실하게 깨뜨리고 침몰시킨 수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이전 편에서 적었듯 당시 목선을 가라앉히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겨우 13척밖에 없는데다 단독으로 적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한 척 한 척 침몰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죠. 전투원 없이 바다에 떠다니거나 격군과 소수의 병력만 남은 채로 도주하거나 해류에 밀려난 것들은 모두 제외했다는 겁니다. 이후의 추격 과정에서도 눈 앞에 여전히 적선이 수백 척이 있는데 한 척씩 한 척씩 정성들여서 잡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였죠. 더욱이 전투 후 조선 수군은 무안 쪽으로 후퇴합니다. 전장에 남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줬든 아예 반파에서 전투불능에 이르렀듯 확실히 잡지 않으면 계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순신의 방식이었죠.
어쩌면 장계에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것은 많다는 것을 뜻하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셀 수가 없어서 숫자를 안 적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_-; 명량의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나하나 세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김경진님은 전과를 일부러 축소하고 난중일기에서도 일부러 이렇게 그렇게 적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하시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나온 난중일기에서는 아군이 모두 모여서 진격할 때 31척을 깼다고 해서 130여척을 정리한 후의 전과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록에 인용된 장계나 초고 난중일기에서는 "아군을 포위한"과 정응두, 송여종이 온 후의 전과라고 해서 130여척과 싸우는 상황에서 나온 전과로 보입니다.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죠.

6. 여러 가지 속설들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역시 철쇄설이죠.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도 나오고 명량에서도 나오고 거의 진짜 있었던 일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나오는 것은 택리지와 김억추의 기록인 현무공일기 뿐으로 택리지의 경우 "임진년"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명량으로 가다가 일어난 거라고 하고 있습니다. 현무공일기의 경우 김억추가 그 엄청난 용력으로 철쇄를 걸었다고 하죠.
어느 쪽이든 확실한 근거가 없고, 전설 수준입니다. 당시 상황만 생각해도 이순신이 회령포에 도착해서 명량해전이 벌어진 건 겨우 한 달로 이 기간 동안 철쇄를 걸 시간은 없다시피합니다. 그 전에 건 거라면 이순신은 그 엄청난 예지력으로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동안 전라도의 끝 울돌목에 철쇄를 걸었다는 게 되겠죠. 그 거센 물살을 이기고 철쇄를 설치하는 인력과 시간, 실제 전쟁 중에 철쇄를 움직이는 인력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죠.
당시 포구에는 철쇄나 돌에 구멍을 뚫어 밧줄을 넣어서 바다에 가라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비교적 좁은 군사 목적의 포구니까 건 것이죠. 그것도 여유 있을 때 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과 명량이라는 해협을 비교하기는 힘들죠. 아마 여기서 나온 전설이 아닐까 합니다. 
비슷하게 나온 것이 바로 강강수월래 설이죠. -_-; 역시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왔죠. 글쎄요. 명량해전은 낮에 벌어졌습니다. 적의 병력이 많다고 오해하기도 힘든 상황이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바다가 아닌 이상 병력도 남아도는데 가서 치는 게 낫죠. 실제 명량해전 전후로 광주, 나주 등은 물론 우수영도 함락당합니다. 
난중잡록에서부터 피난선 백 척이 뒤에서 허장성세를 했다고 하지만 난중일기에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는 의문입니다. 적은 이미 아군의 병력을 알고 있었죠. 

이 모든 것들은 명량 해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전투였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겠죠. 거기다 행주대첩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이렇게 군인과 백성들이 함께 싸우기에 이겼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정말 자주 쓰이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순신 장군과 그것을 돕는 백성들, 이런 점에서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7. 정리
이후 조선 수군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서해로 진입해서 북상하고, 일본군은 무안에 이릅니다. 일본에서는 명량해전의 의의를 축소하는데 보통 선봉만을 꺾었을 뿐이고 이후 일본군의 철수는 애초에 한양이 목표가 아니었고 겨울이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하죠.
정말 선봉만 꺾인 수준이라면 충청도로 올라간 조선 수군과 다시 전투를 벌일 만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한 달도 안 돼서 철수하죠. 일본군의 점령지에는 분명 나주 등 전라도 서남해가 있었습니다만 이후 순천까지 극도로 축소됩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에서 더 이상 수군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계속 공격받는 동안에도 일본 수군 장수들의 이름은 없죠. 노량해전에서 볼 수 있듯 아예 육군의 다이묘들이 직접 수군으로 바꿔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이상 이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또한 후퇴가 애초에 계획된 것이었고 서해로 진입하는 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600~700척의 대함대가 무안으로 간 이유도 찾기 어렵습니다. 영산강을 통한 보급을 원했다고 하기에는 일본군은 영산강도 포기한 채 후퇴하죠. 그렇다면 이 600척은 명량 해전을 구경하고 서해 바다를 관광하기 위해 온 걸까요? 오히려 수군이 패했는데도 굳이 서해를 넘은 것은 그만큼 일본군이 서해를 통한 보급에 그만큼 목을 멨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에 도전하기 겁 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컸다는 거구요. 결국 이 단 한 번의 전투, 단 한 척의 배, 단 한 명의 인간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고 정유재란의 판도를, 나아가서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얼마나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30여척의 적을 이겨 냈고" "이 과정에서 적의 수뇌부가 타격을 입을 수준이었으며"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흔히 영웅사관을 경계하면서 이순신을 과도하게 띄운다면서 "거기서 함께 싸운 장수들과 병사들, 격군들, 응원한 백성들은 뭐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함께 싸운 장수들은 칠천량에서 도망갔고, 명량해전을 할 때도 대장을 버리고 도망간 장수들입니다. 병사들 역시 같이 도망갔고 왜군이 무서워서 떨고 있엇죠. 백성들이라고 덜 했을까요.

명량 해전의 승리 요인 중에 해류와 지형을 이용한 것이 크다고 하지만, 이순신 단 한 사람의 영향보다 못 합니다. 이순신이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전투가 바로 명량 해전인 것이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마치면서 이순신은 그 소감을 아주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此實天幸 이것은 실로 천행이었다.

칠천량 해전 직후, 선조는 하늘이 시켰다고 했습니다. 명량 해전 직후, 이순신 역시 하늘이 도운 거라고 하고 있죠.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사람이 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요. 아무튼, 이걸 보면 이순신 자신도 이 승리를 믿지 못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 뭔가 제대로 썼을지 궁금하네요. 여기서 끊겠습니다. 명량해전 이후 정유재란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다음 편은 "호랑이 사냥"입니다. 1차 울산성 전투까지 나가보고는 싶은데... 될까 모르겠네요.
이상 명량 해전 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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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28975&page=2&sn1=on&divpage=5&sn=on&keyword=%EB%88%88%EC%8B%9C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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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군의 후퇴
15일, 선조는 새벽에 별전으로 갑니다. 이 때 대신들에게 밀지를 내린 모양인데 다 핑계를 대고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충 갈구다가 본론을 꺼냅니다. 중국군의 기밀을 알아낸 거죠. 일본군이 후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때 중국군은 용인과 죽산 부근까지 병력을 전개시켜 적이 왜 갑자기 후퇴하는지 알아내 보려 했다고 대신들은 추측했죠. 이에 선조는 적의 유인을 의심합니다. 16일에 다시 이것이 거짓 퇴각인지 의논하며 이 날 명군이 적을 수급 18급을 베었다는 보고를 듣죠. 한편 경리 사후 낭청이 와서 전과를 말하는데, 이게 9753명을 참하고 말 4천여 필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_-; 그럴 리가요.
18일 보고에는 금강까지 진출해서 또 적 46급을 베고 진천의 적은 이미 강을 건너 떠났다고 하죠. 20일에는 더 구체적인 보고가 들어오는데 명의 여러 장수들이 총 1백 55급의 수급을 얻었고 청주, 공주의 적들은 모두 흩어져 호남이나 조령을 통해 퇴각했다고 합니다. 
이 때의 보고로 "지금 이 왜적들은 사람을 만나면 즉시 죽이기 때문에 길가의 마을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어린아이도 남겨두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이 있죠.

이렇게 명군의 추격 작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고 적은 단 몇 일 사이에 충청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죠. 충청 병사 이시언도 이것을 보고하고, 조정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서 도망간 관리를 처벌하고 아군 병사들을 사열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정유재란의 최고 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후퇴의 원인은?
1) 후퇴 시점
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나뉘고 있습니다.
- 일단 저번 편을 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찬성하실 적은 한양으로 진격했는데 보급로가 막히니까 바로 철수! 장군님 만세!
- 일본인들 중 감히 명량 해전을 폄하하기 위해서 만든, 애초에 철수하려는 계획이었다. 즉 애초에 히데요시는 충청도나 경기도는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고, 겨울이 다가오니까 철수한 거다는 거죠. 직산이고 명량이고 별 영향은 못 끼쳤다는 것입니다.
- 선조가 좋아하고 역시 일본이나 중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직산 [대첩]으로 인해 철수! 황제폐하 만세!

정도가 있겠습니다. -_-a 

일본군의 작전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전주 회의와 정읍 회의입니다. 이 중 전주 회의는 전주 점령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쪽으로 후퇴한다는 내용이고 가토 기요마사 등은 경기도로 향한다는 거였죠. 후방으로 후퇴하는 병력은 전부 좌군 소속이었죠. 이 회의는 어디까지나 좌군은 전라도 점령, 우군은 북상한다는 정유재란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준 거나 다름 없습니다. 한편 여기서 수군은 다시 바다로 간다는 것도 결정되었죠.

정읍 회의는 9월 17일에 있었는데 날자가 적절하기에 이게 일본군 후퇴를 결정짓는 회의가 아닌 하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면면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라도에서 축성한다는 것,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적당한 곳을 찾아 축성하고 부산포에는 모리 요시나리를 보내 수비를 강화한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성 사이에 축성한다,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 중 북상하던 우군 소속으로 언급된 이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게 후퇴를 결정한 거라면 그 이전부터 보이는 후퇴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죠.

15일 새벽에 선조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한 것을 보면 명은 14일부터는 적의 후퇴를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후퇴의 이유였죠.

케이넨이 8월 27일자 일기에서 한양으로 가게 되니 즐겁다는 말을 합니다. 케이넨이 조선인들의 죽음도 슬퍼해 주고 전쟁을 싫어했지만 역시 아군이 이기는 상황에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던 듯 하죠. 혹사는 싫지만 일단 이겼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듯이요. -_-; 아무튼 이 때 우군의 진격에서 "한양이 목표가 아니다"는 확실한 건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가능하면 공략하라는 거고, 우군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케이넨이 설레발 친 게 아니면요.
직산 전투 직후인 9월 9일 군의가 열리는데 조선물어에서는 이 때 한양 공략을 의논했고 오타 가즈요시가 반대하고 후퇴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다른 장수들은 이 결단을 칭찬했다고 하죠.

2) 무엇을 위한 후퇴인가
+) 당시 일본력과 조선력은 하루 차이가 있고, 아래 부분은 모두 조선력에 맞추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후퇴가 무엇을 위한 후퇴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후퇴가 전면적인 후퇴라면 명량 해전의 의의는 대폭 축소되고 혐한들의 주장대로 명량 해전의 전술적 승리와는 상관 없이 이미 일본군은 후퇴하고 있었다는 게 되니까요.

문제는 이 다음 날인 10일에 경기도 안성, 죽산을 공격한 후 후퇴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대는 구로다-모리의 우군 주력이었습니다.
케이넨이 있던 오타 가즈요시, 가토 기요마사는 직산, 천안 부근에서 진천으로 전진했고, 이후 "본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본진에 도착했는데 케이넨은 팔일에 이곳을 통과한 적이 있다고 하죠. 이 본진을 직산으로 보기는 어렵고, 가토 기요마사 군이 청주에서 충주로 기동했다고 했으므로 이 본진은 청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케이넨이 있는 오타 가즈요시는 청주 -> 직산 -> 진천 -> 청주로 간 거죠.
이런 과정에서 케이넨은 "포구"가 가까워졌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서해의 어느 포구로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동로를 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죠. 

케이넨의 일기에 포구로 가서 좋다는 건 이제 집에 가는구나 수준입니다. 전라도에서도 그랬고 나중에 서생포로 향하니까 드디어 포구로 왔다고 좋아하죠.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포구로 간다는 건 완전 철군 명령이 떨어져서 경상도 포구로 간다고 해석하면 될 듯 한데... 정작 경상도 상주로 가서는 포구 얘기는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충청도 내에서 조금 움직였는데도 포구가 가까워졌다고 좋아한 걸로 보면요.

그의 일기에서 보면 언제는 이랬다 언제는 저랬다 하면서 그 본인이 확실한 작전을 아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의 퇴각은 위에 쓴대로 "바다든 강이든 충청도의 어느 포구로 간다"고 좋아했던 것이고, 어느 순간에 작전이 바뀌어서 내륙으로 갔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산이 일본군에 의해 공격당해 이순신의 아들 면이 전사하죠. 이것이 일부러 이순신의 가족을 노린 게 아니라면 아산 공격 역시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실록에는 중국군의 전과 보고와 충청병사의 보고가 같은 날에 있는데, 보통 조선군의 보고보다 명군의 보고에서 일본군이 더 후퇴한 것으로 나옵니다. 명군의 보고가 더 나중 일을 다뤘거나 전과를 과장한 거겠죠. 이것을 감안하고 보겠습니다. 충청도에서의 보고가 하루이틀에서 당일치기라고 생각해 볼 경우, 14일 수준까지 경기도 남부에서 활개치던 일본군은 갑작스레 직산으로 후퇴했고, 16~17일 수준까지는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했고, 17~18일선에서 갑작스레 천안과 직산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가토군은 15일 이전부터 충주로 갑작스러운 기동을 하죠.  
이들은 19~20일 선에서 청주, 공주, 충주를 모두 버리고 후퇴하고, 명군의 추격은 진천까지 추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충주로 간 것이 이후 드러나듯 충주 -> 조령 -> 문경 -> 상주로 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상주로 가려면 그렇게 돌아갈 필요 없이 임진왜란 때 구로다군이 그랬듯 청주에서 추풍령을 넘어 상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때 김수, 류성룡 등은 후퇴하는 것이라 여겼고 선조와 홍진은 적의 유인책으로 여겼습니다. 명군 역시 말이야 기세등등했지만 이것을 걱정해서 병력을 멀리 진출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이구요.

다시 케이넨의 조선일일기로 돌아가 보자면, 처음에 후퇴할 당시 케이넨은 그저 포구로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충청도의 포구로 봐야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때 "충청도와 전라도를 모두 점령했다"면서 기뻐하는 것으로 보아 이 퇴각 역시 충청도에서의 전면퇴각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구요. 충주로 간 가토 기요마사가 바로 조령을 넘지 않았고, 상주에 도착한 게 20일인 것으로 보아 가토 군의 전면퇴각은 18~19일 선이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또한 청주의 남쪽 보은에서 정기룡의 병력이 구로다-모리군의 선봉과 부딪힌 게 20일이라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총퇴각 역시 18~19일 사이에 결정된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3) 직산 전투의 역할
그냥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본 철수의 정확한 시점에 대한 문제는 머리가 아픕니다. -_-; 명량 해전 이전에 이미 철수 움직임이 보이거든요. 일본과 명의 경우 명량 해전보다는 직산 전투 및 일본군 애초의 계획에 무게를 더 두고 있거든요. 물론 명량 이후에 적이 서해로 진입하지 못 한 것도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철수 원인으로는 잘 두지 않죠.
하지만 직산 전투는 기병 4천으로 구로다군 선봉도 초기에 격파하지 못 한, 결코 잘 했다고 볼 만한 전투가 아닙니다. 구로다군의 병력은 사오천 정도, 우백영과 양등산은 이 병력이 많다고 싸움을 꺼렸다고 하고 결국 제대로 격파하지 못 한 채 (윤민혁님의 묘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만 하면서 몇 차례 치고 빠지고 하다가 모리군이 나타나자 후퇴한 전투입니다. 이후 일본군이 계속 직산에 머물고 안성까지 공격한 것을 보면 직산 전투가 적 후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명군이 초반에 구로다군을 강력히 압박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강력한 적을 이겼다"는 과장법을 생각하더라도요. 그 자체의 전과보다 중요한 것은 명군이 본격적으로 요격을 시도했다는 것이겠죠. 다 합쳐서 일만수준밖에 됐다고 하더라도 명군은 계속 증원되고 있었고, 임진년처럼 싸움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강력한 반격을 시도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겠죠. 졸전을 벌였다 하나 모리군이 올 때까지 명군 역시 후퇴하지 않고 버텼고, 그 때의 병력이 명의 가용병력 전부인 것을 생각하면 후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도 직접적인 전과보다는 명군이 참전했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강조합니다. 에 좀 과장하지만요. -_-; 아무튼 겨울은 다가오고 보급은 오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명도 강력하게 맞서니 전략의 변화가 필요했겠죠.

직산 전투 다음 날인 9월 9일의 군의는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포구 확보를 위한 후퇴" 및 "가토군의 충주 기동"이라는 점에서 일본군의 작전은 전면 철수가 아니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실제 그 날 기록을 모두 적는 실록을 제외하면 일본군의 후퇴는 청주에서 전라도 방향으로의 후퇴라고 적고 있고 여기에는 가토의 이름도 포함돼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토의 목표인 울산 서생포가 경상도 동북쪽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안전한 전라도 방향이 아닌 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충주 -> 상주 방향으로 후퇴한다는 것은 이상하죠. 실제 가토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충청도-경상도 병력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명군에서 잡아 온 일본 포로나 충청 병사 이시언이 잡은 복전감개라는 포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9월까지만 공격하고 10월에는 돌아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명군이 잡은 포로는 "10월까지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건 바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복전감개의 경우 "전라도도 포기하고 부산포-울산으로 후퇴"라고 했는데 히데요시는 전라도는 다 점령하라고 했고 실제 정읍회의에서도 전라도-경상도의 축성을 의논했지 전라도 포기를 의논하지는 않았죠. 살기 위한 과장일까요. 아니면 이게 맞는 말일까요. 일단 전 부정적입니다. 히데요시가 따로 명령을 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히데요시가 서울공략 포기 및 충청도, 전라도 포기를 명할 만한 시기가 없었고 9월 9일에 서울 공략을 논했다는 것부터가 히데요시의 명령이 따로 없었다는 것을 말 해 줍니다.

3) 총정리
-_-; 엄청나게 길어졌네요. 하아... 좀 정리해 보자구요.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명의 대부대가 올 경우 곧바로 보고하라. 내가 바다를 건너겠다"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작전 행동이 끝나면 각각의 축성지로 돌아가라"는 것이 있죠. 이것을 대입해 보면...
경기도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제법 강력한 저항을 받고, 두려워서 떨던 조선 조정과는 별개로 더 이상의 진격을 자제하며 명군에 맞설 대비를 합니다. 아산만을 공격하는 등 포구를 확보하고 안성을 공격해서 명군을 도발하죠. 한편 가토는 충주로 기동해서 조령을 통한 약간의 보급이라도 가능하게 하죠. 충주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에서 볼 수 있듯 우회해서 한양을 공격할 수 있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여차할 경우 조령을 통해서 바로 후퇴할 수 있는 위치였죠.
명이 추격에 나서자 일본군은 이에 맞서면서 보급을 기다립니다. 이 상황에서 충청도 서해의 포구는 거의 확보된 상태였을 겁니다. 여차하면 가토군과 연계해서 추격해오는 명군을 포위할 수도 있죠. 이런 면에서 유인책이 아니냐는 선조의 판단이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랬던 일본군이 총퇴각한 것은 18일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빠른 퇴각은 더 이상 진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겠죠. 여기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명량 해전이죠.

패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안까지 600~700척이 이동했다는 것은 이들이 단지 바다 유람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 해 줍니다. 충청도의 일본군이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고, 이 기대가 완전히 꺾이자 바로 철수합니다. 임진년의 악몽이 떠올라서겠죠. 

3. 재조지은
적이 물러간 후 선조는 뻔질나게 명 장수들의 거처에 드나듭니다. 뭐 늘 하던 짓이었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좀 특이했죠.
25일 부총 해생, 중군 팽우덕
26일 유격 파새, 참장 양등산
27일 지휘 왕내징
28일 유격 우백영
29일 부총 吳惟忠
10월 3일 유격 파귀

선조가 거처를 방문해 주례를 베풀고 선물을 준 명단입니다.
이 중 해생, 파새, 양등산, 우백영, 파귀는 직산 전투 참가자죠. 특히 파귀의 경우 사관이 "직산 전투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갔다"고 직접 적고 있습니다. 선조가 이들을 찾은 이유는 9월 중후반의 일본군 추격이 아닌 9월 초에 있던 직산 전투를 치하하기 위함이었죠. 거기다 최소한 임금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던 이들에게 선조는 큰 절로 예를 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오만방자하던 명 장수들도 당황한 모양입니다. -_-; 거기다 이게 명 장수들에게도 퍼졌는지 우백영 때부터는 아예 읍, 반절을 서로 하는 걸 먼저 제안합니다. 

직산 전투가 나름 가치가 있다 하나 일본군을 확실히 몰아내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 이후의 추격 역시 일본군의 후퇴를 대충 추격하다 만 것을 볼 때 이것은 확실히 정치적인 이유로 한 거였죠. 이렇게 직산 전투는 직산 대첩으로, 넘어서서 재조지은의 대표적인 전투로 올라섭니다. 현대의 중국과 일본도 직산 전투의 전과를 과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영역으로 올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선조였죠. 

이것은 조선군에 대한 포상에도 이어집니다. 충청도가 점령된 상황에서도 버티면서 공을 세운 충청병사 이시언은 가자되고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보고가 쏟아지면서 이에 대해 각종 상을 내립니다. 조선 수군에도 포상이 이어져서 11월 16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거제 현령 안위가 되고, 기타 여러 장수들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위는 그 공이 인정된 건지 전라우수사의 자리에까지 오르죠. 하지만 이순신이 받은 것은 은 20냥이었습니다. 여전히 정 3품 절충장군이었던 거죠. 

한편으로 조경남이 난중잡록에서 직산 전투를 과장해서 적고 (들은 걸 적은 거니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_-; ) 이후의 기록들에서 명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면서 직산 전투는 완전히 직산 대첩이 돼 버립니다. 직산 전투를 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 정도였죠. 나중에 연려실기술에서는 명이 이렇게 도와 줬는데 마치 적이 그냥 물러간 것처럼 적었다고 류성룡을 디스합니다. -_-;

이렇게 직산 전투는 대첩이 되고, 명량 해전은 적을 조금 꺾은 전투로 바뀌어 버립니다.

4. 조명연합군의 진격
10월 초, 명군은 남진을 시도합니다. 6일에 전라도로 가는 장수들의 명단이 있는데 이여매, 해생, 파새, 파귀, 우백영 등이었죠. 이들은 7일 내려갑니다. 8일에는 선조가 직접 백성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하죠. 

21일 제독 접반사 장운익의 장계가 올라오는데, 이 병력은 15일 전주에 도착하고 16일 임실까지 이르렀고, 남원과 구례에 소규모의 병력을 보내 약간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장수들은 곡성에서 일본군이 물러난 것을 공으로 삼고 구례나 남원을 탈환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고 하죠. 난중잡록에서는 이 때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백성들을 또 학살하고 곡식을 뺏고, 주인 없는 논에 있는 곡식을 모두 거두어 갔다고 합니다. 그나마 안심하고 다시 농사를 지으려 했던 백성들은 여기서 또 다시 떼죽음을 당한 거죠. 점령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 분풀이로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명군과 조선 조정의 징병 요청...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겠죠.
한편 케이넨의 일기를 보면 가토 군은 22일까지 상주에 머무르다가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초에는 영천까지 후퇴했고, 명군 역시 경상도에서도 계속 추적해 왔구요. 5일에 경주에 도착한 후 9일 마침내 울산에 도착합니다. 케이넨은 드디어 포구에 도착해서 집에 갈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적었는데... 글쎄요. 전쟁이 끝나야지요.

남원이 탈환된 게 23일이라고 기억하는데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네요. -_-; 이후 명군은 재정비를 위해 다시 후퇴했고, 일본군은 해안의 성에 머물면서도 다시 여러 차례 진군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도의 경우 함양에까지 이르렀고 조선 수군은 해남, 장흥 등에서 일본군과 계속 맞서 싸웠죠. 아직 명군은 적을 확실히 밀 정도의 병력이 되지 못 했고, 조선군은 도망간 수령을 계속 처벌하고 임명하면서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전라, 경상도의 중부는 양군이 대치하는 중립지대로 남았구요.

조선군도 적은 수로나마 적이 진격하는 과정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충청 병사 이시언 휘하의 병력, 전라 감사 황신 휘하의 김언공 등이 후퇴하는 적에 맞서 싸운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창원까지 쳐들어 간 장수도 있죠. 다만 이런 장계들이 너무 중구난방이라서 선조가 정확히 알아보고 상을 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너무 많아서 여기엔 넣지 않겠구요. -_-; 조경남도 이 시기에 의병을 일으켜서 남원 등지는 물론 진주 부근까지 쳐들어가서 신나게 싸웁니다. 이것에 대한 얘기는 다음 편에 하도록 하죠.

12월 9일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경상도에서의 적의 상황을 보고합니다. 여기서 경상도 남해안 전부 적이 웅거하고 있고 의령, 진주, 합천 등지까지 적이 몰려와서 약탈하고 돌아간다고 했죠.
이후 전라 감사 황신의 장계도 올라오는데 여기서는 해남, 보성 흥양 등지의 적이 순천으로 점차 후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2월 16일의 장계에 적이 남원에서 장수 일대까지 올라와서 공격한다고 하면서 방어의 어려움을 토로하죠. 이 때 영호남의 상황은 다수의 적은 각 왜성에 웅거하면서 소수로 치고 빠지고, 역시 소수의 조선군이 거기에 맞서는 형태였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정유재란의 전투 양상이죠.

이런 상황에서 명군이 속속들이 증원됩니다. 오만 오천에 달하는 명군이 증원되었고 선조는 명군이 올 때마다 장수들을 접견하느라 바빴죠. 12월이 되자 명군은 남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선조가 따라가겠다고 난리치죠 -_-; 덕분에 경상도로 남하하는 동안 전라도의 적이 치고 올라가면 어쩌나, 내려가기 전에 종묘에 제사 지내고 가야 되나, 왕이 내려가면 세자가 대신 나라를 다스려야 되나, 내려가기 전에 중요한 건 결제하고 가라, 내려가면 어디서 머물러야 되는 쓰잘데기 없는 논의가 계속되죠. -_-; 남행하기로 한 날짜는 12월 11일, 하지만 군문 형개가 반대하기도 하고 조정에서도 의논이 맞지 않아 취소됩니다. 이래저래 정리하기도 싫은 소동이 있은 뒤 명의 대군이 남하합니다. 목표는 가장 포악한 적이 기다리고 있는 울산이었죠. 정유재란 발발 반년만에 명군 3만 6천, 조선군 1만 1천 5백, 거의 오만에 이르는 대군이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이든 명이든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기를 바랬을 겁니다. 

울산성을 지키던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만 육천명.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호랑이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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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29010&page=584 눈시BB님 글.

부총 吳惟忠의 이름이 필터링에 걸려서 그건 그냥 한자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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