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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즉위를 둘러싼 몇가지 오해
게시물ID : history_183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5
조회수 : 218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0/13 13:19:18
1. 노론은 과연 경종(영조의 형)을 협박해서, 연잉군(영조)의 세제 지명을 얻어냈는가?
    협박이라 할수는 없지만, 노론위주의 대신과 삼사과 밤중에 모여 정전에서 경종에게 세제 지명을 요구한건 사실.
    거기에 야간에 대비전의 수결까지 요구했기 때문에 무례한 요구는 맞음
    정치적 결정사항은 군왕의 교지로 충분한대, 야간에 대왕대비의 수결까지 요구했다는 것은 노론이 경종을 제대로 된 왕이라 보지 않았던 것

    그러나, 경종이 세자 시절 서른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던 걸 고려할때,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것도 사실
    ( 조선시대 국본은 10대 중반에 결혼해서 20 전후해서 첫 후사를 보는게 일반적. 군왕들의 평균수명이 40안밖이었다는 것도 고려사항 )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서른 여섯이면 한창이라고 말하는 소론의 대사가 나오는데, 이건 현대적 관점이고, 그 나이에 후사없고 건강이 않좋으면
    후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게 논리적임.

2. 경종은 세제 연잉군에게 적대적이었는가?
    경종이 그랬다기 보다는 경종의 지지세력인 소론이 그랬다는게 더 적절
    개인감정은 좋지 않았을거라고 추정되나, 공적으로 당시 왕실의 후계는 연잉군 뿐이었음.
    경종 본인의 후사는 없었고, 건강과 나이, 전적을 고려할때 후사를 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음.
    밀풍군이 있었으나, 그는 소현세자의 증손으로 효종의 정통성 시비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어 어려웠음.

3. 연잉군은 노론과 모의하여 경종을 독살했는가?
    어의가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게와감(서로 맞지 않는 음식. 소화기에 않좋음)을 올리고,
    거기에 또 한번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탕을 올려 경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게 일반의 인식인데.

    첫번째 게와감을 올린것은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음
    "대왕대비(인원왕후·숙종의 둘째 계비)께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자성(慈聖·임금의 어머니)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경종에게 게장을 진어(進御·임금이 먹는 것)한 것이 내가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수라간)에서 공진(貢進)한 것을 알았다. 경종의 죽음은 그 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하인들이 지나치게 진어한 것이다. 그들이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였다."
    정리하면 게와감이 진상된건 연잉군과 별 관련이 없음.

   두번째 어의 이공윤에 대한 평가인데,
실록에서는 그를 괴팍하다고까지 묘사했는데 그는 이전에도 감수산이나 승기탕 같이 효능이 너무 강해 복용에 주의를 요하는 약들도 마구 처방했습니다. 거기다가 나중에는 왕을 설렁설렁 진찰하는 모습까지 보였고 남이 처방을 의심하면 무조건 화부터 버럭내면서 1년에 백여가지의 약을 처방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만약 대비의 병을 낫게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해고되고도 남았을 위인입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8월 들어와 경종의 상태가 심해질 때 그는 대황이 들어간 약을 처방했는데 이는 대소변을 확실하게 유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초에 약 자체가 독한 약재들 위주로 되어있던데다가 대황은 차고 독한 성질이 있는 한약재였습니다.

   과연 이공윤의 처방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음.
  
   마지막으로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은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거기에 후사도 없고, 후사가 있을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몇년 기다리면 돌아오는 왕위인데,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독살같은 모험을 할 이유가 없어보임.
   
   연잉군 이외의 후계는 경종이 양자를 들이는 경우인데, 경종은 즉위기간 내내 한번도 이와 관련된 언급을 한 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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