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본 게시글은 이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 주를 이루며,
부활이라는 신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게시글을 읽지 말기 바란다.
일단, 내 글의 목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하단의 서문을 읽고 오기 바란다.
서문을 읽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게시글을 읽지 말기 바란다.
본 설명을 하기에 앞서, 필자와 나를 혼용하겠다. 그럼 시작한다.
■ 성경에서 예시가 된 급작스런 사고, 실로암 망대의 붕괴사건
제자들이 특정 사고는 당사자의 죄 때문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의 대답은
눅 13:1-5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서 간단히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첫째, 예수께서는 특정 죄에 대한 가중 형벌의 결과인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멸망에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죄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셋째, 이를 통해 회개의 필요성, 자신을 돌아볼 것을 교훈하고 있다.
즉, 타인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교훈하고 있다.
소결론으로,
신앙인이라면, 급작스런 사건사고를 단순히 죄의 경중의 결과로 벌어진 것은 아닌지 추측하기 보다는 먼저 자신의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경중은 멸망(구원)과 관련한 부분에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한 물음의 근본적 해결책은 다른 곳에 있다.
참고 : 죄의 경중이 의미가 없는 이유인간의 도덕적 수준에 비추어 보면 극악무도하거나 장발장의 경범죄가 큰 차이를 보인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토리키재기라고 한다.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 규정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수준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기본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의도까지 흠이 없어야 한다.
마태복음 5:28, 로마서 1장,2장
■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불합리적 사건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1
1.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과정을 보이셨으며,
그로인해 성경이라는 결과물이 생겼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특정한 방법으로 약속이나 계시를 주시는 특별계시로 역사를 주관하셨다.
이 특별계시는 각 시대별로 그 방법이 변했고, 단 한번도 동일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그에 대해 성경이 자체적으로 해설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해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특별계시는 그 변하는 간격이 여러 세대를 넘는 오랜 기간을 거치며 항상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아버지나 조상 세대에 주신 특별계시는 세대가 계속되며 바뀌었으므로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대해 모든 사건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간략히 요약한다.
출애굽 이전은 직접대면과 음성대면으로 계시하셨고,
출애굽 이후, 모세5경 중에 나오는 어느 산(이름을 까먹었으나 찾기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겠음)에서
유대민족의 요청으로 계시방법이 변경되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대면하고자 하셨으나,
유대민족이 모세를 통해 말씀해 주시라고 요청한다. 이 사건 후 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대로 대리자를 통해 계시한다.
모세를 통한 계시, 사사를 통한 계시, 대제사장을 통한 계시가 있으며,
사무엘 이후에 왕정이 시작되는 데,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사무엘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 졌으며, 여기서 수 많은 선지자가 폭정으로 죽임을 당한다.
유대민족이 노예가 되고 회복된 이후, 말라기를 기점으로 500년 동안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런 후,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성취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약의 예언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
십자가를 시초로 은혜의 새약속이 시작되었고,
12제자와 초대교회와 사도바울 등의 역사를 통해 성경이 완성되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끝마치게 된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성경을 통한 일반적 계시로 하나님을 알수 있도록 하셨다.
2.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영적존재 사탄에 대한 것이다.
또한, 사탄이 일정 기간동안 실질적으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주관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대하게 이루시는 역사의 과정 안에 사탄의 권세또한 포함된다.
1. 영적존재의 등장
창세기에서는 물리적 공간의 창조되는 과정 이외의 영적 존재에 대한 창조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사탄의 존재의 이유와 시기는 알 수 없다.
또한 왜 사탄에게 인간을 속일 힘과 권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2. 욥의 경우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에게 실질적으로 고통을 가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이 경우는 후세를 위한 교훈을 담고 있는 특별한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파멸의 목적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욥 자신도 욥의 친구들과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게 됐으며 영적 성숙을 이루게 됐다.
뿐만 아니라, 무고하게 고난받는 이의 심정이 어떤지 후대 사람들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교훈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무고하게 고난받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후대 사람들이 알게 해주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3. 공생애 시작 전,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탄
이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자료가 널렸으니 스스로 찾아보길 바라며 생략한다.
어찌 됐건, 그리스도 스스로 세상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3. 세상은 끝을 항해 가고 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중에 가장 명확한 한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적, 민족적으로 회개하리라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세상은 끝에 다다른다고 말씀하고 있다.
■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불합리적 사건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2
죽음의 가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1. 일반적인 죽음의 관점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는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것이 생명이고, 그것을 빼앗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며 쌓아 형성된 이해의 한계 안에서 생성된 가치개념이다.
그런데, 누구도 죽음을 미리 경험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사후에 대한 가치는 무시하게 되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여기서, 경험하지 않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스스로 믿는 행위가 과연 합당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개념을 믿지 않겠다는 것 자체는 신념이다.
세상엔 그리고 또 우주에는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난제가 쌓이고 쌓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많다,
그것도 특히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도 고정된 불변의 상수가 아니며, 중력의 영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초기에 중력이 정확한 값을 가지고 있기에 3차원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또한 태초에 무에서 창조를 시작하는 시작점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한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런 극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창조된 만물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와서,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는 안 믿겠지만, 이해가 되는 순간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굳이 없는 것으로 미리 규정한, 다시말해 자신의 한계를 진리로 믿는 것일 뿐이다.
죽음의 문제가 그런 측면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비신앙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면서, 죽음의 문제를 들어 하나님을 정죄한다.
이는 당돌하게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하는 죽음이라는 도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을 측정하겠다는 말과 같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관점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에 대한 가치는 전혀 달라진다.
혹여나 부활의 신앙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서문에서 미리 밝힌 것을 어기고 여기까지 읽고 있다면,
부활이 있다고 가정하고 지금부터 게시글을 읽기 바란다.
싫으면 그냥 다른 글 읽으시고.
성경은 시종일관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지구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부활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이 특정인을 죽였다라고 정죄받아야 한다면, 부활의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죽인 사람을 다시 살렸으면 정죄받은 것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가?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도구로는 절대 하나님을 모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부활 때문이다.
서문에서 필자가 부활의 신앙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바로 그 신앙이 여기서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내 능력으로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사람과는 이 부분이 이야기의 종결부가 될 수 밖에 없다.
동의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다른 게시글을 읽기 바란다.
진정한 문제는 부활 후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시종일관 죽음과 연관된 복음을 전파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도바울의 여러 서신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여기서 그 부분을 설명하려면 너무 장문이 되어서 생략할 수 밖에 없고, 또한 직접 찾아서 읽는 것이 더욱 이해가 잘 될 것이다.
또한, 역사의 끝이자 곧 부활의 시작인 심판의 날에 모든 책임소재가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부활 후,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며, 성경에 기술된 이 왕국은 영혼만이 존재하는 정신적 세계는 분명히 아니며,
현재의 물리적 현상과는 다른, 썩음과 해가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모든 육체는 썩지 않는 완벽한 육체를 얻게 되고 성의 구분도 없어지게 된다.
거기엔 더이상 차별도 없고 눈물도 없다.
하나님의 친정이 시작되고, 더이상 하나님을 모욕할 필요도 없다. 직접 대면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을 모욕했던 자는 내어 쫓겨서, 모욕할 사람도 없겠지만.
참고 : 구약에서 발생하게 되는 전쟁과 살인 등에 관한 일련의 사건과 그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가 추후에 게시글을 올릴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필 받을 때, 작성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망설이는 이유는 나도 나름 바쁜 사람이고, 비신앙인을 대상으로 그 의미를 밝히는 과정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면서도, 정작 성경의 여러 개념들에 대한 이해 자체가 전무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의 개념이 모두 성경 안에서 해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특정 개념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것 둘중 하나다.
한편, 어떤 이는 100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에서 하나의 용어 개념을 몰라서 그 문장 전체를 불신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장이 모인 후에야 어떤 틀이 보이게 되고, 또 그 틀이 다시 모여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해하게 된다.
차라리 무식하더라도 불신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텐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성경의 내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성경의 하나님을 비판한다고 하는지 참 아리송하다.
본 종교게시판에서 하나님을 살인마라고 규정하는 사람들 중에
유대민족 정착 전에 벌어지는 정착전쟁으로 빚어진 살상인지, 아니면 정착 후의 유대민족 자체의 쿠데타로 벌어지는 살상인지
구분해 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힌트를 남긴다. 물론, 이 힌트만으로는 아무런 해석도 할 수 없지만.
말을 하다보니, 길어졌다. 광고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 내용으로 들어가겠다.
■ 부활 후의 심판
이 부분은 필자가 지식이 부족해서 설명을 잘 못하겠다.
모르는 부분은 물음표(?) 를 사용하며, 내 능력껏 정리해 보겠다.
일단, 확실한 영원형벌적 심판의 대상은 거짓선지자와 그 추종자들과 사탄과 사망권세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외의 존재들에 대한 심판
지옥 곧 음부로 번역된 스올, 하데스, 타르타투스, 게헨나에 관해서는 신구약의 여러 군대에서 잘 못 번역되었다고 한다.
방금 말한 이 내용 자체를 내가 크로스체크를 안 해봐서, 헷갈린다.
구원에 대한 심판
여기서, 구원이라는 것이 ?영원 형벌로 고통받는 것에 대한 구원인지,
아니면 ?영원한 멸망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인지잘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예화는 고통받는 형벌로 묘사되는 데, 이 부분은 좀더 공부해야겠다.
심판의 기준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단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 즉 기회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판별하실 것이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자연계시, 특별계시, 일반계시, 양심과 혀의 직고를 통해서 각자가 핑계하지 못하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행위에 대한 심판
공력
삶의 기간동안 이룬 상과에 대한 테스트라고 한다.
공력 시험은 불로 테스트하게 되는데, 자신이 이룬 공력이 불에 타면 그 자신만 구원받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공력에 알맞는 상을 받게 된다고 한다.
상
성경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상에 관한 것이다.
상은 수 많은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에게 물 한 잔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상이 있다고 하신다.
물론, 이것도 공력테스트로 그 진위여부를 가리게 된다고 한다.
?벌
이 부분도 잘 모르겠다.
그 밖에 내어 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 밖에 왕국에서 얻게 되는 개인의 지위
?이 부분도 잘 모르겠다.
예전에 성경에서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 망대사고와 세월호 참사의 비교와 대조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런 사고였음을 볼 때, 세월호 참사는 망대사고와 비슷한 면을 보인다.
신앙인이라면, 예수님께서 망대사고로 교훈하신 것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 자신도 어느 순간에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일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정치적 개입을 포함하는 일련의 관련자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면은
성경에서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므로, 실제의 삶에서 우리가 지혜를 모아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어떤 사람들의 태도
어떤 사람은 어떤 슬픈 사건을 겪게 될 때 성경의 망대사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먼저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죄를 추궁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작 그 자신은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
오직 모든 사건의 책임이 신에게 있지 않느냐고 비방한다.
신앙인은 이런 사람들의 태도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개인적 확신
실제적인 삶의 측면에서 볼 때, 남은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숙제를 준 것이라 생각한다.
시작은 무고한 희생이었으나 그들을 통해, 남은자들이 기리고 가꾸고 밝혀야 할 숙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숙제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정치법개정, 특조위, 시위, 언론활동, 연극 공연 영화 등 문화제, 서명운동, 시민운동, 기타 이와 관련한 일련의 민간활동 등으로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신앙적 측면에서 볼 때, 희생된 사람들도 부활에 참예할 것을 믿으며,
그들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대 앞에 오를 것이다.
덧붙이는 말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월호 참사가 비록 우리에게 크나큰 슬픔으로 찾아 왔으나,
이는 분명히 작은 불꽃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이것이 1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믿는다.
이에 대한 구체적 의도 2는 내가 대신 설명이나 해석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그 구체적 의도를 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날에 묻기를 바란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분명히 대면(face to face)하여 답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하고 마치려 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로마서 8:32 -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설령 죽은 자일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합당한 선한 보상을 해 주시리라 확신한다.
1.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 첨언하겠다.
'이것이' 라는 말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하나님께 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에 대해선 죽음의 문제와 관련한 부분에서 이미 내 생각을 서술하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것은' 이란,
사건이 벌어진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긴, 곧 내가 잠깐 언급한 각자에게 주신 불꽃들을 말하는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2. '이에 대한 구체적 의도' 란 말은 '세상에서 불합리하게 보이는 일이 생기는 구체적 이유' 로 다시 설명하겠다.
하나님께 이에 대해 직접 물을 수 없는 이유는
첫째로, 특별계시의 기간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반계시의 시대이다.
앞으로 있을 단 하나의 특별계시는 바로 세상의 끝이요 부활의 날이다.
지금 하나님께 특별계시를 요구하는 것은 다시말해, 세상의 끝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일일이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삶은 길어야 100년이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불합리하게 보이는 모든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무리 일일이 반복해서 드러내신다 한들,
그 유효기간은 길어야 100 년 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재차 반복해야 한다.
지금은 미디어가 발달했기때문에 비디오로 찍으면 될 것 아니냐는 우스운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만약 신인데, 내가 만든 피조물들이 나를 비디오로 찍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광고한다?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못 할 것같다.
자신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창조주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난독증 친구들, 특히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친구들을 위한 한 마디 첨언
하나님이 특정인을 죽인 살인마라고 욕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성경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 곧 모든 사람을 부활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죽인사람을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렸으면, 당신에게 정죄받은 것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가?
하나님을 살인마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도대체 누구를 정죄하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떤 대상을 정죄하고 있는가?
만약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을 살인마라고 욕하는 사람은
성경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정죄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 만들어 낸 거짓들로 범벅된 실체없는 허상일 뿐이다.
여기서, 부활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질문을 한다면, 신약성서를 적어도 두 번 이상 읽은 후 질문하기 바란다.
■ 질답 1
Q :
"또한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믿는다."
"이에 대한 구체적 의도는 내가 대신 설명이나 해석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 주권과 주관은 다르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엔 동의하지만
전 그런 이유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세월호가 이렇게 큰 사고 번지게 된 이유는 인간이 돈에 집착하여 노후한 선박을 무리하게 운행하였고
또한 어떤 이유에서인지 초동대처에 있어서 방관뿐 아니라 선박에 그대로 있게한것이 피해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인재일지도 모르는 정황이 큰데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참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주권도 하나님께 있죠
이 사건에 대해 주권은 있으셨지만 주관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상황의 전체를 파악하는 이 부분이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사건이 인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A :
말씀하신 원인분석에 대해서는 당연히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는,
□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게시글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죽음과 생명을 넘어선다고 서술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면, 세상의 모든 일에서 첫째로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 예로, 인간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죽음에 관한 일로 하나님을 정죄하는 행위가
자신이 신앙인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라고 앞서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로암망대의 사고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죄의 결과로 인한 멸망인지
물었던 제자들과 같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제 심장이 왜 뛰고 있는지, 단 한번도 나의 의지로 심장이 뛰게 만든 적이 없습니다.
비록 내 심장이 내 몸에 붙어있을 지라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은 계속 뛰고 있습니다.
저는 제 몸 자체를 생각할때에도, 이것이 간단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고요.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은, 참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의미 중에서, 그 말 자체를 하나님을 정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앞서 말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하는 죽음이라는 도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을 측정하겠다는 말과 같다."
인간은 절대 하나님을 정죄할 수 없다고 성경이 밝히고 있으며, 저 또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때에 선하신 방법으로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 말을 생각해 볼 때,
그 허락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가를, 참새가 떨어지는 순간에 바로 질문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춰진 대답이 아니라,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때에 알려 주시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질답 2
Q :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운명론 숙명론이 기독교적 입장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믿고계시나요?
A :
안녕하세요. 이게 당분간 마지막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말 자체가 하나님의 경륜을 축소하거나 부정적 또는 회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때문입니다.
□ 큰 틀에서 보는 관점
아주 큰 틀로 보면, 시작점이 창조주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침점도 창조주의 권능이 되는 것이 정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다르는 경륜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 작은 틀에서 보는 관점
작은 틀이란, 구체적인 사례들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예가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수명이 변경된 것을 물론 아실 껍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다르는 경륜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운명이나 숙명과는 다른 하나님의 경륜
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차피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삶에 무슨 노력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반문으로
현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따르는 것은 전혀 그리스도의 뜻도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신 사명을 걷어차버리는
게으른 악한 종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향은, 오히려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라는 것이요,
다시 말해서 새로운 지표와 목표를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며,
또한 현실의 삶을 오히려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세상적 관념에서는 어리석고 가난하고 약하게 보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하고 약하고 어리석은 삶은 절대 추하지 않습니다.
□ 책임을 묻는 것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참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 저의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 정죄하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나를 왜 만들었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죄하기위한 물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며,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그 순종을 행한 이유도 성경이 자체적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했노라고.
□ 남은 자가 할 일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그 사건이후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렇다면 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다 포기하거나 절망하며 주저 앉아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소망을 품고, 달려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