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도 노동자다. 창작에 종사하며 또한 대중을 상대로 감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어야 한다. 대중이 원한다면 남자가 여자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며,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의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울고 싶어도 웃고, 웃고 싶어도 울며, 화내고 싶은 순간에도 즐거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연예인 자신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감정이 이성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다면 그것을 감정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미숙하기에 때로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하고는 한다. 누구나 한 번 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연예인의 감정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마는가.
아니다. 정확히 이미 한국의 대중들은 불과 몇 개월 전 있었던 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승무원에게 라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승무원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승객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어야 했었다. 항공사는 승무원을 징계하려 하고 있었다. 승무원으로서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래서 시청자들도 연예인의 감정이 문제가 되었을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시청자가 보고 있는데 어딜 감히!"
시청자는 소비자다. TV를 시청함으로써 시청률을 올리고 그 수익이 다시 출연자들의 출연료로 지급될 수 있도록 해주는 물주이기도 하다. 시청자는 재미를 원한다. 그렇다면 출연자들은 재미있게 해주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이나 사정따위는 전혀 아랑곳없다. 어떤 경우에도 참고 견디며 시청자를 위해 웃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연예인이란 더구나 대상이다. 인간이 아니다. 개인이 아니다. 연예인이란 대중에게 단지 이미지로서만 존재한다. 인간이지만 도구다. 연예인에 대한 비난은 그래서 너무나 쉽다. 도덕적인 판단을 내린다. 대중 자신이 갑의 위치가 되며 다수의 힘을 빌어 도덕적인 의무를 부여한다.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개인의 인성의 문제로까지 비화되던가.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단지 직무에 대한 성실성이나 적합성의 문제다. 연예인으로서 방송에 나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은 부적절했다.
그런데 또 보면 토크쇼라는 것이다. 토크쇼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것이다. 감정이란 가장 솔직한 자기의 표현일 것이다. 불편하다. 불쾌하가. 어렵다. 곤란하다. 그런 것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토크쇼라는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그 자체로써 받아들이고 즐긴다. 하지만 도적적 판단이 우선한다. 감히 대중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갑을문화의 한 단면일 것이다. 연예인은 을이다. 대중은 갑이다. 갑이 모든 것을 정의한다. 을은 그 대상이 된다. 직무상의 사소한 문제가 크나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갑이기 때문이다. 갑이 불쾌하다. 사소하게 비판하고 넘어갈 일이 끝없는 비난의 레이스로 이어진다. 어딜 감히다. 어딜 감히 연예인따위가. 고작 그런 정도다. 그것 역시 갑인 자신이 판단한다.
이번주 '라디오스타'에서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여자아이돌의 경우일 것이다. 공개연애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또다시 스캔들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로 인한 많은 곤란한 소문이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두번은 웃으며 넘어가도 반복될수록 상처를 건드리게 된다. 웃으려 했다. 하지만 끝내 감정조절에 실패했다. 그것이 이렇게까지 논란이 불거질 일인가. 갑작스런 애교요구에 마음이 따르지 않아 시도조차 못하고 말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란 상당히 예민한 동물이다. 연예인으로서 미숙했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 모욕당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 논란이 불거진다. 악플이 기승을 부린다. 정의로운 악플들이다. 부적절한 행동을 한 아이돌 '카라'를 단죄하다. 그렇게까지 중대한 일인가. 중요하다. 자신들이 모욕당했다. 연예인의 감정표현은 소비자인 대중이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에 굴복했을 때 만족을 얻기도 한다.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한 마디로 논란 그 자체를 즐기려 한다.
'라디오스타'야 원래 그런 프로그램이다. 그런 프로그램인 것을 알고 출연도 하고 시청자 역시 채널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차라리 그 사연을 듣고 이해하고 그마저도 한 부분으로써 받아들고 즐긴다. 관용이다. 존중이다. 그것이 없다. 이유인 것이다.
사소한 실수다. 충분히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다. 충분히 관용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 놔두지 않는다. 잘못이 커서라기보다는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유독 연예인과 관련한 이슈에서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때로 가혹한가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심판자가 된다. 그것은 절묘한 쾌감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즐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연예인도 때로 울고 때로 화내며 때로 곤란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뚱해지기도 하고 멍해지기도 한다. 피곤하면 잠시 표정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그런 자체가 재미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다.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렵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