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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역 그녀와의 이야기
게시물ID : soda_18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밥알이코트
추천 : 27
조회수 : 5265회
댓글수 : 73개
등록시간 : 2015/10/22 13: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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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논현역 쪽에 볼일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7번 출구로 나와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항상 강남의 주요한 역들 주변이 그렇듯이 거기에도 도를 아십니까부터 시작해서 복이 많아보이신다느니 조상님이 보인다느니 설문 조사를 좀 도와달라느니 하는 순진무구한 본인을 현혹하기 위한 영주세력들이 많았었는데 그중 가장 위험했던 적은 너무 잘생기셨다고 들러붙길래 아아닛 어떻게 알았지 허허허 하며 개드립을 날리며 혼인신고까지 생각하다가 내가 고백 필패의 신화를 이룬 20대 상처기업가임을 자각하고 돌아섰던 적이었다.

아무튼 무더운 여름이던 그 때 한창 불쾌지수가 상승해 옷깃만 스쳐도 악연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는데 어김없이 2인 1조인 여자 두명이 조상님을 뵙고싶은지 '조상님이 보이세요' 라며 나를 불러 세웠다. 
항상 그들이 그렇듯 한명은 뒤에서 망을보며 한명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평소같았으면 아랍어 몇마디 던져주고 시크하게 돌아섰을테지만 그날은 너무도 짜증이 났고 더군다나 사람이 가장 죄책감이 없어져 돌아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저녁 7시였다. 
어디보자 싶어 찬찬히 살펴보니 40대로 보이는 아바타 조종수가 망을보고 20대의 세련된 여성이 나에게 본격적인 작업(?)을 시도하였다.


처음엔 네 네 하며 듣는 척을 하면서 논현역에서 강남 교보문고 쪽으로 그들을 유도했다. 그들은 걸려든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테지.

20분 정도 얘기를 들으며 교보문고와 강남역 사잇길 즉 강남 길거리를 우리나라 역사로 봤을 때 베이비붐 세대에나 비유할법한 인구수를 자랑하는 그곳에 왔을때 그들은 이제 한창 기부 얘기를 하며 이야기의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냥 평일도 아닌 불타는 토요일 7시 30분, 즉... 금슬 좋은 천생연분 잉꼬 커플도 여기서 무릎꿇고 고백하면 일단 쪽팔려서 도망가고 본다는 딱 골든 에아리아. 
나는 내 지난 30분을 보상 받기 위해 판돈을 더 키우고 있었고, 때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진짜 구질구질하게 왜이래!!'


'?!'
그녀의 눈이 내 목소리보다 더 커졌다.


'내가 그만하자고 했잖아!! 여기까지 와서 어쩜 이렇게 찐득거려? 너 싫다고! 그만하자고!!'


'아...아니 그게'
그녀는 그동안 길거리 포교(?)를 하면서 굴욕 깨나 당해보았겠지만 그것과는 비교조차 불허하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장소에서 처음 겪어보는 남자의 반응에 처음엔 이게 무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동공이 개나 소나 한번씩 와서 밀어본다는 울산바위 마냥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기사 그도 그럴것이 지가 태어나서 지금껏 어디서 외모로 아쉬운 소리 한번 안들어보고 자랐을 것인데 사람들은 벌써 모여들어 여기가 지산 락페스티발인가 강남인가 구별 안될 정도지 아바타조종수인 40대녀는 벌써 멀찌감치 도망가있지 심지어 자기 앞에 있는 남자는 츄리닝차림에 덥수룩한 머리에 만약 소개팅에서 만났다면 주선자를 중환자실로 보내줬을텐데 자기를 보며 지긋지긋하다고 큰소리치고있지.
이건 넬슨 제독이 와도 어려운 역경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한마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너 솔직히 별론데 호기심에 만난거고"
난 길거리 포교하는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만나봤는데 별로 재미도 없었고"
그녀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지루했다

"너한테 들인 내 시간도 아깝고"
낭비한 내 30분은 너무 아까웠다

"너한테 줄 돈도 이제 없으니까"
사실 난 집앞 식당 월식 끊어먹는 자취생이다

"이제 그만 구질구질하게 굴고 좀 가"
그녀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만든지 2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 말을 뒤로하고 나는 시크하게 시속 9km로 도도하게 걸으며 강남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그 여자는 어찌 됐는지 모르지만, 평범하던 강남의 주말 길거리는 이미 막장드라마가 된지 오래였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그녀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녀도 알아야한다. 누군가 이유없이 호의를 베풀면 경계를 해야한다는 것을. 그게 내가 됐던 그녀가 됐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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