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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2차 요동정벌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게시물ID : history_185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8
조회수 : 211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10/27 12:47:14
북원, 여진과 손을 잡으면 갓 건국한 명에 충분할 대항할 전력이 될 수 있으니 성공할 수 있는 정벌이었다가 정벌성공론의 주요 주장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세를 보면 손을 잡을 북원과 여진이 모두 박살난 상황이었습니다.

요동정벌이 있던 1388년 바로 전해에 명의 최대 골칫거리이던, 나하추가 명에 항복했습니다. 나하추의 군 대부분은 여진족이었기 때문에, 이는 명에 대항하는 만주지역의 여진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요동정벌 바로 당해년도 봄에 남옥이 이끄는 15만 군에 의해 북원이 멸망했습니다. 

나하추와 북원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고려와 연계를 두려워하여, 고려에 유화적이었던 명이, 두 세력을 처리하자마자 안면을 바꿨죠.
북원이 멸망하기 바로 전년도 겨울에 철령위 설치를 결정한 것입니다.

고려조정은 안면을 바꾸며, 매우 무례하게 나오는 명에 대항하여 요동정벌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전에 1차 요동정벌을 성공시킨(바로 철군했지만) 이성계가 주장이 되어, 공요군이 꾸려지게 됐지만,
이성계는 이 정벌의 성공가능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왕과 조정의 결정에 따라 정벌반대에서 정벌의 시기 조절을 조언하게 되는데, 이 조차도 거절당했습니다.
여름으로 결정된 정벌시기를 가을로 연기하자는 것이었는데, 시일을 끌고 싶지 않았던 우왕과 최영에게 이 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역사드라마에도 자주 나오죠. 장마와 그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 화살의 아교를 녹게하며, 병장기를 녹슬게 하는 우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군사적으로 타당한 조언이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거기에 명이 역공을 가해올 경우,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지역이 이성계의 기반인 동북면이었기에 
더욱 더 정벌에 부정적이었을거라 짐작됩니다. 

정리하면,
1. 명을 위협할 동맹세력(나하추, 북원)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2. 수인성 전염병, 병장기 파손, 사기저하를 불러오는 여름우기에 정벌이 이루어졌다.
3. 얼마전인 봄에 이미 명의 15만군이 동원되어 북원이 격파된바 있다. 이 병력이 공요군에 파송되면 대항이 불가능하다.

와 같은 이유로, 이성계는 공요군의 성공가능성을 대단히 낮게 봤고,
이로 인해 위화도 회군을 결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성공할 수 있었다면, 고려입장에선 역사적 전환이었겠지만,
주변여견을 고려할때 성공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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