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인간을 살아 숨쉬게 하는 생명의 힘,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번만 돌아서 버리면 사람을 죽이게 하는 무서운 칼끝이 되기도 합니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 미소 때문에 당신이 싫어졌다"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에 반했지만, 그 아름다운 미소를 또 누군가에게 지오 보일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증오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불가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옵니다.
大 怨 生 於 至 親 대원생어지친 큰 원망은 지극히친한 것에서부터 생겨난다. 지극히 친한것에서 부터 큰 원망이 생겨난다. 큰 원수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에서 생겨난다.
해석은 다양하게 가능하겠지요. 사랑을 빙자한 집착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게 되면 집착이 생겨납니다. "난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넌 날..." "난 니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해준건데 넌 그것도 모르고..."
연인사이,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선 후배사이, 동료사이 등등 관심과 애정이 생겨나는 여러 관계속에서 우리가 흔히 하거나, 듣는 소리들입니다. 애정이 없다면 관심도 없겠죠. 관심이 없는 사람은 무얼 하든 말 그대로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있으면, 그 사람의 행동에 분노도 일으키게 되고, 기쁨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게 되면 둘 다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럼 집착에 빠지지 않는 사랑, 대원생어지친을 피할 수 있는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젊은 스님이 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꽃이나 나무 분재를 아주 보물처럼 가꾸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산책하다 예쁜 꽃이나 나무가 보이면 자기 방 앞에 옮겨다 심거나 화분을 구해 옮겨 심어 물도 주고 양분도 주며 정성껏 가꾸어 줬습니다. 그날도 역시 산책을 하다 예쁜 꽃을 한 포기 옮겨와 방 앞 화단에 옮겨 심고 있었답니다. 그 때 마침 산중의 노 스님이 지나가시다가 그모습을 보시고는 "웬 꽃이냐" "포행(산책) 나갔다가 예뻐보여서 옮겨 왔습니다." "꽃이 좋으냐?" "예, 스님 저는 꽃이 좋습니다. 사람보다 꽃이 좋습니다." "그래, 그런데 꽃도 너를 좋아 한다더냐?" "!!!......"
사실 나는 꽃이 좋아 길거리에 피어 난 그 아이들을 옮겨와 정성껏 길러주었지만 꽃들도 그것을 좋아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비바람에 날려가 버릴수도, 어느 이름모를 등산객의 발길에 스러졌을 수도 잇겠지만 꽃은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요, 자주적인 꽃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던 것입니다. 내가 옮겨와 내 손길로 보살펴주는 것이 꽃에게 이로운 것 같기도 하겠지만, 그 순간 꽃은 하나의 자주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단순한 나의 소유물 내지는 나의 놀잇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 사례를 그대로 빗대어 생각해보십시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강요를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내 바람을 투영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무언지 알아내 그것을 주는 것입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내가 사랑을 준 것이 사실은 내가 주고 싶은 것만 준 적이 많을 것입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일방적인 내 생각의 강요, 내 마음의 투영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욕입니다.
나의 거울에 빗대어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내 거울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원생어지친' 잊지 마십시오.
군부대 군종법사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저는 불교는 아닙니다만 종교를 떠나서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서 좋은글 게시판에 남겨봅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글을 읽으시고 이대로 하라라고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좋은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