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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이나 계속 부흥 전쟁을 벌였던 발해 유민들
게시물ID : humordata_18679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10
조회수 : 3932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20/06/18 2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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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거란의 기습 공격에 수도가 포위되어 항복을 했으나, 발해의 각지에서는 여전히 거란에게 굴복하지 않고, 발해를 다시 세우려는 부흥 세력들이 끊이지 않고 봉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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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나서, 자신의 큰 아들인 인황왕(人皇王)으로 하여 발해의 영토를 다스리는 동단국(東丹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했습니다. 여기서 단은 거란을 한자로 쓸 때의 호칭인 계단(契丹)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쪽의 거란국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동단국은 발해 유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시달려 제 구실을 못하다가, 928년 요동 지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 때, 발해의 도읍인 상경용천부는 발해 유민들이 점령하여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거란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불태워졌으며, 수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 땅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동단국의 철수로 발해의 영토는 거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발해의 여러 지방에서는 거란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추구하는 지방 정권들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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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처음 발해의 후계자를 자처한 나라는 후발해국(後渤海國)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929년, 지금의 압록강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세워졌습니다. 후발해국은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발해의 남쪽 지역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후발해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후발해국은 936년까지 중국의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자신들을 가리켜 발해국 사신이라고 칭했습니다. 또한 970년에는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나라 이름이 정안국(定安國)으로 바뀌었으며, 왕족의 성씨도 열씨(烈氏)라고 칭했습니다. 정안국은 981년에 다시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였으나 왕족의 성씨는 오씨(烏)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당시 송나라에 국서를 보낸 정안국 왕은 스스로를 오현명(烏玄明)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정안국 내부에서 왕위를 두고 세 가문끼리 치열한 내분을 벌였던 모양입니다.

 

정안국은 발해처럼 거란과 원수 관계에 있던 송나라와 연합해서 함께 요나라를 협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는 거란 말고도 서북쪽에서 새로 등장한 서하(西夏)와 한창 전쟁을 벌이느라 거란 방면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송나라가 소홀히 하는 사이, 거란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후방에 있던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려로 가는 길목에 있던 눈엣가시 같은 정안국을 먼저 없애기 위해 985년, 대군을 보내 정안국을 공격했습니다.

 

정안국을 침공한 거란군은 포로 10만 명과 말 20만 필이라는 막대한 재물을 노획하였고, 건국한 지 약 60년 만에 정안국은 발해가 그랬던 것처럼 원수의 나라인 거란에게 끝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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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안국 이후로도 발해 유민들의 복국 움직임은 계속되었습니다. 발해가 거란에게 망한 지 1백 년이 지난 102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7대손이었던 대연림은 당시 거란에서 파견된 동경유수 부마도위가 잇따른 실정을 하여 옛 발해 주민들의 민심을 잃자 1029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대연림은 원래 요나라의 동경(東京)인 요양(遼陽) 땅에서 동경사리군(東京舍利軍)의 상온(詳穩)이란 벼슬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봉기를 일으키게 된 동기는 한소훈과 소파득 같은 요나라 벼슬아치들의 지나친 가렴주구와 착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요나라의 도읍인 연경 지역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요양 땅에서 많은 곡식들을 징발해 옮기는 바람에 요양 지역 사람들은 크게 굶주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요양 백성들의 민심이 요나라 조정에 등을 돌리자, 대연림은 대세를 파악하여 요나라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규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뜻을 함께 한 무리들과 함께 원성의 표적이 된 한소훈 등의 요나라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요양을 통치하고 있던 요나라 황족인 소효선(蕭孝先)과 부인 남양공주(南陽公主)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하여 1029년 8월 3일, 대연림은 동경을 도읍으로 하여 흥요국(興遼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천경(天慶, 또는 천흥天興)으로 정하였으며, 문무백관들을 뽑아 본격적인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흥요국이 등장하자, 거란족에게 많은 세금을 착취당하여 반(反) 거란 감정이 높던 송화강과 요동 반도에 있던 여진족들도 상당수가 합류하였습니다.

 

왕이 된 대연림은 곧바로 9월, 대부승(大府丞)이란 벼슬에 있던 고길덕을 사신으로 고려에 보내 도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고려가 거란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점을 노린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고려 태조가 그랬던 것처럼 대연림도 고려를 동족의 나라라고 여겨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흥요국의 사신을 맞은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울지 외면할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곽원(郭元)이 나서서 도와줄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고려는 군대를 보내 흥요국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정한 고려군은 요나라의 수비군에 부딪쳐 흥요국으로 가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철수하였습니다.

 

고려의 지원이 실패하자, 흥요국을 둘러싼 운명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발해 왕족 출신으로 흥요국에서 태사(太師)를 지내고 있던 대연정(大延定)은 여진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하여 요나라 군대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연림과 미리 호응을 하기로 약속을 했던 요나라 관리들인 발해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와 동경 부유수(副留守) 왕도평(王道平)이 돕지 않는 바람에 흥요국은 고립된 상황에 놓였습니다.

 

10월이 되자, 요나라는 소효목이 이끄는 토벌군을 편성해 흥요국을 침공하였습니다. 대연림은 12월과 1월에 두 번이나 고려에 사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부탁했으나, 이미 지난번에 패한데다가 더 이상 요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던 고려는 끝내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흥요국은 요나라의 거센 공격에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1030년 8월, 장군 양상세(楊祥世)가 성문을 열어 요나라 군대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국왕인 대연림과 많은 신료들이 요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고, 많은 발해유민들이 잔혹한 거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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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요국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약 80년 후인 1116년에는 발해의 유민인 고영창(高永昌)이 들고 일어나 대발해국(大渤海國)을 세웠습니다. 고영창은 대연림처럼 원래 요나라에서 군사 3천을 거느리는 벼슬인 비장(裨將)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요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1115년, 만주 동쪽에서 지금까지 요나라의 악랄한 착취와 학대에 시달리던 여진족들이 완안아구타(完顔阿骨打)라는 뛰어난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금(金)나라를 세워 요나라에 맞섰던 것이었습니다.

 

놀란 요나라는 대군을 보내 금나라를 진압하도록 했으나, 아골타는 불과 2만의 군사로 요나라 70만 대군을 섬멸하는 기적 같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해지자, 요나라는 고영창에게 옛 발해 유민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인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2천 명을 편성하여 동경을 금나라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고영창은 원수의 나라인데다 이미 여진족에게 얻어맞고 다 망해가던 요나라를 위해 충성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발해무용마군을 주축으로 하여 당시, 동경유수로 있던 소보선의 가혹한 폭정으로 분노하고 있던 백성들을 모아서 소보선을 죽이고, 동경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고영창은 군사를 8천으로 늘렸으며, 자신을 황제라 하고 대발해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사 초반에 대발해국의 기세는 매우 강성했습니다. 고영창은 봉기한 지 열흘 동안 요동의 주 50개를 손에 넣었으며, 심지어 요나라의 왕족이자 철령을 다스리던 영주인 야율여도조차 자발적으로 대발해국과 협조할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토벌에 나선 거란군이 몰려오면서 대발해국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고영창은 고심 끝에, 요나라의 적인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나라의 완안아구타는 고영창이 황제의 명칭을 쓰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자신은 대국 금나라의 황제인데, 고영창은 한낱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외람되게 황제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니, 고영창이 자신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황제라는 이름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지 2백년 만에 다시 나라를 되찾았다는 열망에 부푼 고영창은 대발해국 황제라는 이름을 버리길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아구타는 대발해국을 적으로 선언하였고, 이리하여 대발해국은 거란군 뿐만 아니라 금나라와도 싸우게 되었습니다.

 

1116년 5월, 요양부는 금나라 군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고영창은 자신이 직접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요양의 남쪽인 수산에서 싸웠으나, 금나라 군대의 강력한 철기병에 의해 참패하고, 달아나다가 금나라 군대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로써 대발해국은 성립한 지 5개월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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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소개할 발해의 잔존 세력인 오사국(烏舍國)은 발해의 귀족 가문인 오(烏)씨가 세운 나라입니다. 오사국에 관련된 자료들은 매우 적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였는지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빈약한 자료들이나마 모아보면, 오사국의 지배층은 발해 귀족인 오씨들이지만, 백성들의 대부분은 여진족인 올야부족(兀惹部)들이었습니다. 오사국의 수도는 오사성(烏舍城)인데,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인 하바로프스크라고 추정됩니다.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에 의하면 975년에 발해의 부여부에서 거란에 반란을 일으켰던 발해 유민들이 올야성(兀惹城) 혹은 오사성으로 달아나 오사국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 뒤 1004년 여진족들이 국왕인 오소경과 그 가족들을 붙잡아 거란에 넘겨주었으며, 1012년에는 철리국(鐵利國)에서 오사국 1백 명을 포로로 잡아서 역시 거란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1114년, 금나라가 거란을 공략하면서 오사국을 병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오사국은 1백 년 동안 존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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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발해가 멸망한 지 2백 년이 지난 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여전히 '발해'란 이름을 잊지 않고 거란에 대항해 실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잊어버렸지만,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진짜 후손들이 아닐지요?

출처 어메이징 한국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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