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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이후의 세도정치의 근원은 영/정조에게 있다
게시물ID : history_187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11
조회수 : 188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11/14 17:30:07
순조이후 안동김씨(김조순)의 60년 세도정치가 정순대비탓이라는 일반의 인식이 강한데요.
기록을 보면 세도정치의 원인은 정조에게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에게도 있습니다.

1. 정조의 책임 : 안동김씨 김조순을 세자(순조)의 후견인으로 들임
    이는 정조의 핵심정강 가운데 하나였던 척신정치 배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정조는 즉위연간에 홍인한, 정후겸으로 대표되는 영조말년 최고의 실력자였던 척신 둘을 단독으로 제거했고, 
    척신이 되려했던 홍국영역시 봉조하라는 이름으로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후일 순조가 되는 세자의 후견인으로 안동김씨 김조순을 들이면서, 이러한 본인의 척신정치 척결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안동김문 60년 세도정치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 정조의 책임 : 당파라 할수 없는 시파의 수립
    정조-순조초에는 노론벽파와 노론시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는데(남인은 이인좌의 난이후 거의 몰락했기 때문에 제외)
    사실 시파는 당파라 할수 없었습니다. 시파의 정강은 "전하의 뜻을 따르자"인데, 이게 무슨 정강이겠어요.
    그냥 왕말대로 하자는 건데, 반면 벽파는 신임의리를 기반으로, 명백한 보수적 정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당파라 할 수 있었는데, 정조는 계속 벽파를 공격했고, 결국 순조초에 몰락하게 됩니다.

    시파가 집권하면서, 사실상 당파정치는 종말을 맞이하고, 안동김문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게 됩니다.

3. 정순대비가 역할을 했다는 주장
    순조즉위직후부터 김조순은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용영대장, 병조판서등의 고위직을 역임했는데,
    이는 정순대비의 뜻이라기 보다는 정조의 뜻이었습니다 ( 순조의 후견인으로서 역할 )
    정순대비는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국구로서 대우를 한것뿐입니다.

4. 영조의 책임 : 출신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 그리고 척신정치의 발호
    영조는 어머니의 출신에서 비롯된 컴플렉스로 재위기간내내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 일곱차례에 걸친 양위쇼 )
    비슷한 경우를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과 인조가 보여준바 있었지요.
    영조자신의 정치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후반기에 들면 대신들을 가지고 놀 정도의 정치력을 보여주게됩니다.
    그러나 장기간 집권하면서 후반기에는 숙종못지 않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이로 인해 홍인한/정후겸으로 대표되는 말년의 척신정치를 불러왔고, 이러한 척신정치의 경험은 순조대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맹아를 구축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순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지요. 선대왕이었던 정조처럼 당파간의 균형을 이루는 힘든 정치세계에 발들이지 않고, 중요결정을 비변사에 맡긴겁니다. 그러면서 비변사를 장악한 안동김문이 자연스레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순조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성실했으나 방향성없는 정치입니다 ( 중종이 그랬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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