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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직교사
게시물ID : panic_187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프리
추천 : 2
조회수 : 326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8/23 19:55:55
오늘 숙직이다.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오늘 숙직이야.
그래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놈에게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지만 오늘은 못 만날 것 같다고 얘기했다.
너 때문에 중요한 회의 미뤘다고 뭐라뭐라 하는데 미안해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안 짤리려면 위에서 시키는대로 해야지.
솔직히 고등학교에 숙직이 왜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밤에 학생들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문 잠그고 퇴근하면 나도 좋고 교장도 좋고 과학실 해골바가지도 좋아할거다. 혼자 있는 것 좋아하게 생긴 그 해골바가지...

어쨌든 핸드폰이랑 밤새 읽을 책 몇 권 챙겨서 숙직실로 내려갔더니 기사님이 계셨다. 학교에 기사분이 두 분 계시는데 번갈아가면서 숙직을 한다.
더더욱 의아하네. 기사님들도 계시는데 왜 선생을 굳이 숙직시키는거야. 그나저나 두 분이 번갈아가면서 숙직을 하시면 가정의 평화는 잘 유지되나?
그렇게 남의 가정평화를 걱정하면서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윤기사님, 식사 하셨어요?"
"오늘 선생님 숙직이시구나? 저는 아직 안 먹었는데, 오늘은 그냥 굶을까 하고."
"그러세요. 저 배달시킬건데 정말 안 드시는거죠?"
"예예."

짜장면 한 그릇은 배달을 안 해준댄다. 그럴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결국 탕수육 소짜를 같이 시켜놓고 뒹굴거리다가 받아 먹었다. 탕수육이 조금 남았는데도 기사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뺏어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건데. 남은 탕수육을 일회용 접시 위에 덜어놓고 그릇을 밖에 내놓으려고 나왔더니 날이 쌀쌀하다. 가을이니까. 현관 계단에 그릇 내려놓고 담배 하나 피면서 주차장쪽으로 돌아오는데, 익숙한 승용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박선생님 아직 퇴근 안 하셨나?"

그런데 교무실은 불이 다 꺼져있었다. 뭐, 행정실에 계실 수도 있고. 어딘가에는 계시겠지. 그러면서 숙직실로 돌아와 바닥에 몸을 딱 눞혔더니 배도 부르고 숙직실 바닥이 따끈따끈한게 잠이 솔솔 와서 쿠션을 머리에 받치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난 왜 선생이 된거지? 그냥 국어시간이 즐거웠던 게 학창시절의 느낌인데 정신차려보니 국어교사가 되어있었다. 나쁘지는 않다. 다행인지 애들도 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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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님이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슥슥 비벼서 눈꼽떼고 시계를 봤더니 새벽 2시다. 얼마나 잔거야. 잘 때에는 몰랐는데 깨고보니 기사님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시 눈을 감아도 잠기운은 저 멀리 내뺀지 오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순찰이나 돌아볼까. 그러고 숙직실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있네."

박선생님 차가 아직도 있었다. 교무실부터 들러 볼 생각에 교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불이 꺼진 학교라는건 역시 그로테스크하다. 학교마다 괴담이 하나씩 꼭 있는 것처럼 우리 학교에도 애들 사이에 도는 괴담이 있다. 한 선생님이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과 눈이 맞아 연애를 시작했다가 여학생이 강간을 당해 아이가 생기고, 몇 달 뒤 결국 옥상에서 떨어져 식물인간이 되어버리고 그 선생님은 옥상 난간에 목매달아 죽었다고 한다. 뒤늦게 병상에서 일어난 그 여학생은 밤마다 옥상 난간을 보면서 오열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그 둘이 손을 잡고 걸어다니는 모습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여느 학교의 허술한 괴담들과 달리 이상하게 치밀한 구석이 많아서 괜히 섬짓하게 만든다. 특히 이렇게 후레쉬 하나에 의존해서 불꺼진 학교 건물을 걸어갈 땐 말이지. 꼭 뭔가 나올 것 같다.




안나왔다.

그런데 건물 반대쪽 2층에 움직이는 사람형체가 보였다. 디귿자 건물이라서 반대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다 보여서 교감선생님을 피해다니곤 한다. 잔소리가 너무 심하셔. 누군가 가만히 지켜봤더니 달빛에 비친 그 사람은 박선생님이었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시지?"

박선생님은 2학년 윤리를 담당하고 평소에 느긋하기로 소문나신 선생님이다. 걸음걸이가 너무 태평하셔서 아이들이 종종 따라하며 꺄르르 웃곤 했다.

"풉."

저렇게 종종걸음으로 가는 모습을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 혼자보기가 아깝다. 음악실 방향인 것 같은데. 좀 놀래켜드릴까.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2층 음악실로 향했다.

"박선생님!"

음악실 문을 열었더니 박선생님은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영 이상한게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출입문 옆에 있는 불을 켠다. 탁. 형광등 불빛이 수차례 점멸을 반복하는데,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광등이 완전히 켜지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피.




머릿속이 하얘졌다. 황급히 그 아이에게 달려갔다. 지금도 컥컥, 피 섞인 기침을 하고 있었다. 입 주변에서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2학년 이혜영.
이름이 기억나자마자 나는 토했다.

탕수육이 올라온다. 기분이 나빴다.


턱.

혜영이의 손이 내 발을 잡았을 때 뒤로 고꾸라질 뻔 했다.

"쌔..쌤.."
"혜영아, 정신차려봐. 혜영아."
"유...윤..."
"잠깐만, 아무말도 하지마. 119 불러줄게."

나는 피로 물든 혜영이의 손을 붙잡고 주머니를 뒤졌다. 아, 제길. 숙직실에 놓고왔다. 나는 혜영이의 손을 한 번 더 꼬옥 눌러잡고 다 괜찮을 거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영아, 선생님이 바로 119불러줄게. 조금만 더 버텨. 알았지?"

하지만 솔직히 다 괜찮을 것 같지는 않다. 혜영이의 피가 음악실 바닥을 덮는 만큼 점점 더 희망의 불꽃도 점점 더 작은 진공관에 덮여버리는 것 같았다.
얼른 119를 불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사실 무섭기도 해서 나는 도망치듯 음악실을 빠져나와 숙직실로 내달렸다.

"허, 헉... 헉... 기사님... 큰일났어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사님을 흔들어 깨웠다. 곤히 잠에 들어있던 기사님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시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뭐요? 아니, 선생님. 손에 그거..."
"혜영이가 다쳤어요. 119, 119 불러야돼..."

기사님은 자기가 가보겠다며 후레쉬를 들고 숙직실을 뛰쳐나갔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찾아 폴더를 열었다. 영화도 아니고 이럴 때 꼭 배터리가 나간다. 숙직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더니 불통이다. 그러고보니 전화선 공사한다고 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피를 흘리고 있었지? 맙소사. 멍청한놈. 왜 그걸 이제야 궁금해하는거야?
그렇게 궁금증이 들기 시작하자 아까 본 광경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칼자국이야. 배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와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는 있다. 배에서 그렇게 피가 흐르려면 칼을 맞거나 총을 맞은건데 당연히 칼이다

. 성급히 걸어가는 윤리선생님이 떠올랐다. 제기랄, 기사님 혼자 나가셨는데.

난 숙직실 문을 거칠게 밀어버리고 음악실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음악실까지 가지는 못했다. 음악실 앞 복도에서 윤리선생님과 마주쳤다.
박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서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었는데 칼에서는 피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그런데 어디를 보고 있는거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무언가 윤리선생님을 덮쳤다. 기사님이었다. 윤리선생님의 팔을 붙잡고 칼을 뺏으려고 애쓰던 기사님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윤리선생님을 향해 달려들어 뒤에서 붙잡았다. 기사님의 팔뚝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봐서 윤리선생님이 들고 있는 칼에 흐르는 피는 기사님의 피인 것 같았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윤리선생님을 뒤에서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기사님이 윤선생님의 칼을 빼앗아들었고, 중심을 잃은 우리 셋은 뒤로 고꾸라지면서 겹쳐 넘어졌다.

"어으...으어..."

뜨거운 것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윤리선생님의 호흡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나는 몸을 비틀어 날 깔고있는 두 사람에게서 빠져나왔다. 곧 기사님도 일어나 뒤로 한 발짝 물러났지만, 윤리선생님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 가슴에 꽂혀있는 칼과 몸 사이에서 벌건 피만 꿀렁꿀렁 넘실거렸다.

"아..."
"..."

나와 기사님은 윤리선생님이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있었다. 아마 달빛이 조금 더 기울고나서야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기사...님...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119..."

잠시 멈칫하던 기사님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네주었고, 나는 슬라이드를 밀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119 번호를 입력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윤리선생님의 가슴을 파고 든 칼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는데, 윤리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윤리선생님의 입술이 계속 움직였다.

뭐라고 하는거야? 미안...? 아닌 것 같았다. 지하...? 아닌데. 순간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떠오른 단어를 그물삼아 물고기들이 건져진다.
내가 혜영이가 음악실에 있다고 말했던가
윤리선생님이 말하는 단어가 '기사'가 맞나?
그러고보니 혜영이가...

아, 씨발. 윤...기사.
창문에 비친 윤기사님은 웃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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