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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남성의 삶 - 김영철전
게시물ID : history_187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개드립커피
추천 : 12
조회수 : 245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11/19 19:20:31
17세기 조선 남성.jpg

위 글에서 김영철이라는 예시는 김영철전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영철전>


- 조선 후기 홍세태가 <김영철유사>를 읽고 지은 전계 소설



 

조선조 광해군 대에 평안도 영유현 중종리(中宗里)에 김영철(金英哲)이란 이가 살고 있었다. 영철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벼슬을 하였는데, 영철 또한 어려서부터 말 타기를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아 영유현의 무학이 되었다.


그때 중국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명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모아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명나라를 공격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힘이 만만치 않아 명나라는 크게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에 명나라는 1618년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크게 군대를 일으켰는데, 조선에도 군대를 내어 여진족 치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력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조정 내에서도 군대 보내는 일의 명분과 실리를 견주며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은공을 생각하며 마침내 명의 요청을 받아드리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강홍립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김경서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2만 명의 군사를 파병하도록 하였다.


한 번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쳐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 임진왜란의 고통을 여실히 겪었는데, 또다시 전쟁의 여파에 휘말리게 되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철의 집안에서는 영철뿐만 아니라 영철의 작은 할아버지 김영화(金永和)까지 징집되어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들은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의 부대에 편성되어 선봉군이 되었다. 이때 영철의 나이 열아홉이었는데 아직 장가들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 여관이나 영철 모두 형제가 없는 독자였다. 군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영철의 할아버지 김영가는 울면서 손자 영철에게 말했다.


“영철아!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대가 끊긴다.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

“예, 할아버지. 꼭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영철은 굳게 다짐하며 늙은 할아버지를 위로했다.

 




1618년 8월, 조선의 군사는 창성으로 집결하고 명나라 군사는 요동으로 집결했다. 명나라 장수 경략 양호는, 만주 지방은 일찍 추워져서 남쪽 지방에서 온 군사와 말들이 겨울을 견디기 힘들 거라 생각하고 봄을 기다려 공격하게 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날이 풀리자 강홍립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간을 건너 경마전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했다. 조명 연합군은 우모령을 넘어 여진족의 성과 요새 십여 곳을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전진했다. 명나라 군대가 제일 앞에 서고, 조선 군대의 좌영(左營), 중영(中營)이 각각 그 뒤를 잇고, 우영(右營)은 맨 뒤에서 행군했다.


전열(戰列)을 재정비한 후금 군대는 다시 정예 병력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명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후금 왕 누르하치는 그의 아들 귀영가(貴永可)를 선봉장으로 세워 조명 연합군을 공격하니 선봉에 섰던 명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거의 전멸하였다. 선두에 섰던 조선 군대의 좌영 또한 공격을 받고 형세가 몹시 위급하니, 좌영장 김응하가 급히 도원수 강홍립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강홍립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김경서가 홀로 나가 싸우다 돌아와 강홍립에게 말했다.


“장군! 적들은 지금 어찌나 피곤해하는지 말안장을 껴안고 졸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때 우리가 대병을 이끌고 적들을 협공하면 모조리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자 강홍립은 주머니에서 밀지를 꺼내어 말없이 김경서에게 보여 주었다. 밀지를 본 김경서는 사기가 꺾여 감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응하는 적들에 둘러싸여 홀로 맹렬히 싸우다 비장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강홍립과 김경서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적들에게 항복하였다.


후금의 장수가 크게 기뻐하여 다음 날 포로가 된 군사들을 점검하기로 하였다. 투항한 조선 군사 중에는 임진왜란 때 항복했다가 연합군으로 출별한 왜병 3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강홍립의 뜻에 따르지 않고 적장을 죽이고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었는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날 밤 거사 계획이 탄로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를 본 조선 병사들은 몹시 분개하였다. 후금의 군대는 조선인 포로들이 난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모두 죽이려는 마음도 먹었다. 마침 조선의 한 장교가 전투에서 후금 군사의 머리를 베어 감추어 둔 것이 있었는데, 후금의 한 장수가 이것을 발견하였다. 크게 화가 난 후금의 왕 누르하치는 조선 군사를 모두 모아놓고 좋은 옷을 입고 풍채가 좋은 사람 400명을 가려내 따로 세워 놓고 말했다.


“이 자들은 조선의 양반이자 장교일 것이다. 살려 두어 봤자 위험할 뿐이니 모두 죽여라.”


갑작스런 명령에 400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처형당하였고, 영철의 작은 할아버니 영화도 이들 중에 섞여 죽었다. 영철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하였는데, 그 급박한 순간에 후금의 장수 아라나(阿羅那)가 영철을 끌고 나와 후금 왕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왕이시여! 제 아우가 저번 싸움에서 전사하였는데, 이 자가 죽은 제 동생의 모습과 참으로 닮았습니다. 이 자를 살려 주시어 제 종으로 부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후금의 왕은 아라나의 요청을 허락하고, 여기에 항복한 명나라 군사 다섯을 더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영철이 간신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을 마치고 아라나가 영철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그 집안사람들이 영철을 보고 크게 놀라며 죽은 동생이 다시 살아왔다고 하였다. 같이 종으로 끌려간 명나라 사람 중에 전유년(田有年)이란 자가 있었는데, 중국 남쪽의 등주(登州) 지방 사람이었다. 전유년은 얼마나 지혜롭고 총명하던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전백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영철은 전유년과 함께 새벽부터 밤까지 마구간 일을 하였는데, 할아버지와의 약속이 생각날 때면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반년을 일하던 영철은 할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꿈에도 잊지 못하고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도망친 지 며칠 만에 영철은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후금에서는 포로 된 자가 도망치다 붙잡히면 혹독한 형벌을 주었다. 처음에는 발꿈치를 자르고, 두 번째는 다른 쪽의 발꿈치를 자르고 세 번째에는 죽이는 것이었다. 도망치다 잡힌 영철 역시 왼쪽 발꿈치를 잘렸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고통도 잠시, 영철의 고국을 향한 집념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다시 몇 개월 뒤 영철은 또 탈출을 시도하였는데,이번에도 곧 잡혀 오른쪽 발꿈치를 잘렸다. 영철이 끝내 도망치리라 생각한 아라나는 영철에게 과부가 된 자신의 동생 부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


후금은 세력이 점점 더 강성하여져, 1621년 요양(邀陽)과 심양(瀋陽)을 공격하여 얻고는 도읍을 아예 심양으로 옮겼다. 아라나는 가족과 종들을 데리고 심양으로 이사하면서 영철을 건주(建州)에 머무르게 하여 밭일을 맡겼다. 이 해에 영철이 아들을 얻으니 이름을 득북(得北)이라 하였고, 또 아들을 낳자 득건(得建)이라 하였다. 북쪽에서 낳았다 하여 득북이요, 건주에서 낳았다 하여 득건이라 한 것이다.





세월은 또 흘러 1625년 5월이 되었다. 아라나는 영철에게 말 세 마리를 주고 전유년 등 두 사람을 붙여 건주의 강가로 가서 기르도록 하였다. 아라나가 영철에게 말했다.


“이 말들을 잘 먹여라.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들이 살질 때 내가 와서 영원(寧遠) 전투에 갈 때 타고 갈 것이니 잘 키우도록 하여라.”


그리고는 비밀스레 영철에게 덧붙여 말했다.


“너는 이제 우리 일가 식구이다. 내 너를 진실로 믿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한족(漢族) 오랑캐는 틈만 나면 도망치려고 할 것이니, 네가 잘 감시하도록 하여라.”


이때 건주의 강사에는 심호(瀋胡) 땅에서 말 먹이러 온 자들이 많았다. 영철과 유년 등은 다른 항복한 한족 일곱 명과 함께 말을 먹이며 여름 내내 수고하였다.


가을이 되자 영철은 아내를 만나러 잠시 집에 들렀다. 아내는 오랜만에 온 남편을 반기며 술과 고기를 갖추어 내었다. 저녁이 되자 문을 나서 배웅하는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싸울 날이 멀지 않았으니, 이제 곧 낭군님과 이별하겠군요.”


비록 적국에서 만난 여인이었지만, 어느덧 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말하는 것이 더욱 은근하고 간절하였다. 아내는 영철에게 술과 고기를 주며 동료들과 같이 먹으라 하였다. 같이 말 먹이던 자들이 영철이 가지고 온 음식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서로 나란히 앉아 마시며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이날 밤은 8월 15일, 보름날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달빛은 땅에 가득하였다. 유년이 달을 우러러보며 동료들에게 탄식했다.


“이 달은 마땅히 내 부모처자를 비추고 있을 것인데, 나의 부모처자 또한 이 달을 보고 반드시 나를 생각하리라.”


유년의 말에 10여 명의 남자들이 마주보고 통곡하였다.


“영철이! 자네는 부모가 조선에 있으나 여기서 처자식을 두었으니 돌아가려는 마음이 우리들과는 다르겠지?”


유년의 묻는 뜻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영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짐승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을 향해 둔다는데, 어찌 이곳에 처자식이 있다고 해서 부모를 잊을 수 있겠는가? 내 고국에 살아 돌아가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 뵐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네. 다만 내가 전에 도망치려다가 붙잡혀 두 번이나 욕을 당했으니 이제 만일 도망치다가 다시 잡히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유년이 말했다.


“요동의 육로(陸路)는 막힌 지 오래지만, 뱃길이 있잖은가? 듣자니 조선의 사신이 등주(登州)까지 배로 와서 육로로 황도에 간다고 하네. 이제 내가 자네와 함께 도망하여 등주까지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자네는 조선의 사행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자네 뜻은 어떠한가?”

“등주까지는 어떻게 가려고 하나?”

“내가 전쟁터를 쫓아다닌 지 오래고, 이 후금 땅의 산천 형세를 잘 알고 있네. 게다가 이 말들은 천리마여서 4~5일 부지런히 달리면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걸세.”


이 말에 무리가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다. 다만 유년은 영철이 처자식 때문에 머뭇거리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여 영철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내게 여동생이 둘이 있는데, 모두들 아리땁다고 하지. 등주로 돌아가면 내 누이동생을 자네에게 시집보내겠네. 큰누이가 시집갔다면 작은누이라도 반드시 자네에게 시집보내겠네.”


영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하였다. 영철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술에 섞으니, 유년 또한 그러하였다. 술을 나눠 마신 뒤 일행은 달에 절하고 굳게 맹세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뜻을 같이 하기로 하니 모두 열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각기 5일 치씩의 식량을 준비하여 깊은 밤 일시에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다른 목동들은 모두 잠들어 사방이 고요하였다. 곧바로 강여울을 건너 북쪽을 향해 말을 달리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깊은 여울이 나타났다. 물살이 자못 셌기 때문에 말을 채찍질하며 건너는데, 경비하는 사람들이 이 소리를 알아차리고 크게 소리 지르며 쫓아왔다. 그 와중에 영철 일행이 큰 연못에 빠져 상황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여섯 명은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네 명을 끝내 나오지 못하여 사람과 말이 함께 죽었다. 다만 주인 잃은 말 한 마리가 홀로 빠져나와 일행을 따라왔다.


백여 리는 달리니 달은 이미 지고 주위는 캄캄하였다. 높은 곳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니 멀리 들판 사방에 후금 군대의 장막이 많아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철과 유년 일행은 우선 말에서 내려 산기슭에 숨어 생쌀을 씹고 물을 마시며 허기를 달랬다. 일행은 종일 울면서 하늘을 보고 기도하였다.


다시 밤이 되어 달이 오르자 영철 일행은 말을 타고 달렸다. 백여 리쯤 달리다 보니 사막이 나타났다. 그곳은 옛 전쟁터인지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오래된 전투의 흔적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 불을 피우고 깨진 화로 하나를 주워 밥을 하여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 다시 말을 타고 달리다 보니 새벽녘이 되었다. 유년이 주위 산과 강을 둘러보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여보게들! 기뻐하게. 이제 후금의 땅을 벗어난 것 같네.”


여섯 명은 모두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번엔 양식이 문제였다. 연못에 빠졌을 때 양식을 반 이상 잃었기 때문에 남은 양식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일행은 주인 잃은 말을 잡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고기를 나누어 각기 말에 매달고 다시 이틀을 밤낮으로 달렸다.


멀리 영원(寧遠) 땅이 보였다. 여섯 명은 이제야 살 길을 얻었다는 반가움에 앞다투어 달려갔다. 그런데 영원 변방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오랑캐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상부에 보고하자, 말을 탄 수십 명의 척후병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하고는 죽이려 하였다.


그때였다. 탈출한 일행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척후병의 대장을 보고, “형님! 하고 부르더니 자신이 그의 동생이라고 크게 외쳤다. 척후병의 대장이 깜짝 놀라 그 사람을 자세히 보더니, ”아우야! 네가 살아 돌아왔구나.“ 외치며 기뻐하였다. 덕분에 영철과 일행은 살아날 수 없었다. 영철 일행이 탈출한 소식은 영원성 사람들에게 크게 소문이 났다. 몇 년 전 후금 군대와 싸우다 잡혀갔던 고향 사람들이 7년 만에 살아 돌아왔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철의 소식을 알게 된 영원성 사람들은 그를 안타까이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을 뿐 아니라, 백금을 주어 집을 사고 아내를 얻도록 해주었다.





영원성에 잠시 머물던 영철은 유년을 따라 등주(登州)로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유년의 집에서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자식이 살아 돌아오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영철의 마음에는 별로 즐거움이 없었다. 점차 시간이 흘러가지만 고국으로 돌아갈 기약은 없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우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철의 마음을 눈치 챈 유년이 영철을 위로하였다. 이때 유년의 작은누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유년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친척과 옛 친구들을 청하여 술을 마셨다. 밤이 되자 유년과 영철은 후금 땅에서 동고동락했던 일,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한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보고 눈물을 흘렸다. 주위 사람들도 다 함께 울었다. 이때 유년이 술잔을 잡고 달을 가리키며 부모에게 말했다.


“제가 후금 땅에서 종노릇하고 있을 때, 영철이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탈출할 수도, 살아 돌아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 달을 가리켜 등주로 돌아가면 나의 누이를 영철의 아내로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제 이 달이 아직 있으니 어찌하오리까?”


이 말을 들은 유년의 부모는 딸과 영철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결혼하기 며칠 전 유년의 누이동생이 영철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시부모를 뵙는데, 저는 아직 뵙지 못한 채 혼례를 올리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영철은 이 말을 듣고 화공(畵工)을 청하여 부모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여인은 그림을 보더니 마치 시부모를 뵌 듯이 절하였다. 며칠 뒤 영철은 결혼식을 올렸다.


영철 부부의 이웃 사람들은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영철을 불렀다. 그리고 조선의 춤을 추게 하고 조선의 노래도 부르게 하고 옷감을 상으로 주곤 하였다. 영철의 집안 살림도 점차 넉넉해져 갔다. 영철은 유년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으니, 이름을 득달(得達)과 득길(得吉)이라 하였다. 이렇듯 중국의 남쪽 등주에서 뜻하지 않게 영철은 또 한 가정을 이루고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영철의 가슴 한 편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무심한 세월을 한탄하고 있었다.





1630년, 영철이 등주에 정착한 지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해 10월, 조선의 진하사 선박이 북경으로 가시 위해 등주에 머물렀다. 뱃사공 중에 이연생(李連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영철과 같은 고향 마을 사람이었다. 영철은 조선의 사행선이 등주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무슨 소식이나 얻어 들어까 하여 배를 찾아갔다. 무심코 배를 둘러보던 영철은 배 위에서 한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옛 고향 친구 이연생이었다. 영철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연생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불렀다. 처음에는 연생이 영철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영철임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다가 서로의 소식을 물었다. 연생은 그토록 궁금해하던 고향 소식을 영철에게 전해 주었다. 그 내용은 곧, 영철의 아버지는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할아버지는 동생 영화(永和)의 아들 이룡(爾龍)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고, 어머니는 외가로 돌아가 살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영철은 10여 년 만에 듣는 가족 소식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한참 뒤 정신을 수습한 뒤에 영철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고, 연생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였다.


“여보게, 연생이! 내가 후금 땅에서 도망하여 구사일생으로 이곳 등주까지 온 것은 오로지 이곳에서 조선의 사행선을 얻어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네. 이제 천만다행으로 친구를 만났으니, 원컨대 자네는 제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게.”


이연생은 영철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조선의 사신 일행이 북경을 다녀온 뒤 돌아가는 배편에 태워 주기로 약속하였다. 영철이 연생을 만난 뒤 집으로 돌아오니 그 아내는 남편의 얼굴에 눈물 자욱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겼으나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음 해 봄, 조선의 사신 일행이 북경에서 황제를 뵙고 등주로 돌아왔다. 그동안 떠날 날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영철은 이제 막상 배가 다음 날 아침 조선을 향해 떠난다는 소식에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날 밤 영철의 아내는 등촉을 밝히고 남편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데, 남편이 평상시와 달리 초조해하고 조바심을 내는 모습을 보며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등주 부둣가에 조선의 사행선이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남편이 자신과 자식들을 버려두고 조선으로 가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영철 역시 아내가 불안해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복잡하였다. 어느덧 깊이 정든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 어찌 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있을까. 아비요 남편 된 자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철은 문득 아내에게 술상을 차려오도록 하였다. 연거푸 몇 잔을 마셔도 전혀 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아내에게도 술을 권하였다. 아내는 몇 잔 마시지도 못하고 취해 버렸다. 영철은 술에 취해 잠든 아내를 한동안 지켜보다 마음을 먹은 듯 훌쩍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연생을 찾아 배로 들어갔다. 연생은 배의 한 쪽 판자를 뜯어내고 영철을 그 밑에 숨기고 다시 못을 박았다. 누구도 그 속에 영철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날이 밝았다. 갑자기 영철의 아내가 장정 10명을 데리고 조선의 사행선에 들이닥쳤다. 영철의 아내는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남편을 찾았다. 배를 샅샅이 뒤졌지만 영철을 찾을 수 없었고, 뱃사람들 또한 영철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허탈해하는 영철의 처자식을 뒤로 한 채 배는 부두를 떠났다. 이튿날 아침, 영철이 판자 밑에서 크게 소리치니 뱃사람들이 깜짝 놀라 판자를 뜯어 꺼내 주며, 음식을 주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였다.





3일 후 배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밑에 정박하였다. 1618년 여름, 열아홉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13년간의 이국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고국,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국이었다. 하지만 막상 고향을 찾아가 보니 그렇게 그리워하던 집은 다 쓰러져 가고 그나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영철은 다시 이룡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때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문을 나서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언뜻 영철을 보고 얼이 빠져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한참 뒤에 노인이 말했다.


“영철이냐?”


영철의 할아버지였다.


“예, 할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 부여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룡의 집에서는 그 아비 영화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또한 통곡하였다. 이웃 사람들도 영철을 보고 또 그간의 소식을 듣고 다들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영철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소호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묵고 있는 외가에도 전쟁의 상처, 가난과 굶주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얘야! 영철이가 왔구나.”


토굴 같은 집이었다. 할아버지의 이 말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안에서 영철의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할아버지와 손자와 어머니가 서로 부여안고 통곡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 그리고 고향 마을을 13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영철은 기쁘고 행복하였다.


하지만 전란 후의 마을은 쓸쓸하고 가난하였다. 집집마다 전쟁통에 죽거나 흩어진 식구가 없는 집이 없었다. 영철 또한 재산은 물론 함께 살 집도 없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하였다. 반가움도 잠시, 영철의 어머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런 어머니를 부축하며 영철은, “제가 왔으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하며 위로하였다.


마침 같은 마을에 이군수(李群秀)라는 자가 있었는데, 집안이 꽤 부유하였다. 그런데 영철이 효자라는 소문을 듣고 그 딸을 시집보내었다. 영철이 열심히 일하고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하는 덕분에 집안은 차츰 안정이 되어 갔다.





세월은 또 흘러 1636년, 병자년이 되었다. 가을에 이연생은 또 사행선을 따라 등주에 갔다. 조선에서 사행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철의 아내가 두 아들, 그리고 오빠 유년과 함께 배로 찾아와 영철의 소식을 안타까이 물었다. 연생은 모른다고 하였다. 이듬해 북경에 다녀온 사신 일행이 등주로 돌아오자 영철의 처가 다시 와서 물었다.


“조선이 병자년 전쟁에 청나라에 항복하여 이제 이 뱃길도 마지막이라고 합디다. 원컨대 그대는 제발 낭군님의 소식을 전해 주어 내 마음을 풀어 주시오.”


연생이 여인의 마음을 딱하게 여겨 마침내 영철이 조선으로 돌아간 일을 다 말해 주었다. 영철의 처가 이 말을 듣고 손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전유년 역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영철은 효자로다! 대장부로다! 포로로 잡혀 있을 때부터 고국으로 돌아간다더니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도다.누가 이런 일을 다시 할 수 있으랴! 내 누이가 비록 과부가 되었으나 실로 그 부모에게 효자가 되었으니 어찌 영철을 탓할 수 있으랴!”





1636년 겨울 후금의 왕은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에 들어오더니 곧바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석 달 만에 인조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군사를 물려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 고산(高山)과 한윤(韓潤),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의 장수와 군사를 남겨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진을 치고 있는 가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평안도 감사 민성휘는 영유 현령 이회(李檜)로 하여금 청나라 장수를 돕게 하였다. 이때 영철은 농사일을 도우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영유 현령이 영철이 청나라 말과 명나라 말, 조선어 세 나라 말을 잘하는 것을 알고 통사로 삼아 청나라 진영을 다니도록 하였다. 영철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영철이 영유 현령의 명을 받고 청나라 진영에 가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청나라 장수 한 명이 영철을 보고 소리쳤다.


“너는 거기 섰거라. 너는 내 숙부 아라나 장군의 종이 아니더냐? 네가 전에 몰래 숙부의 말을 훔쳐 도망하여 숙부께서 늘 분하게 여기셨는데, 마침 잘 만났구나. 이제 내 너를 잡아가 숙부께 바칠 것이다.”


그리고는 군사를 시켜 영철을 꽁꽁 묶게 하였다. 꼼짝없이 청나라로 끌려 갈 판이었다. 영철이 없으면 군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영유 현령은 청나라 장수에게 영철을 놓아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요청을 거절하자 현령은 그에게 담배 열 근을 선물로 바치고, 또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주어 아라나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제야 청나라 장수는 노여움을 풀고 영철을 풀어 주었다. 뒤에 현령은 그 말 값을 영철에게서 받아냈다.





영철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640년, 청나라는 명나라와 다시 일전을 벌이기 위해 개주(盖州)를 침범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번에는 임경업이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이완이 부장(副將)이 되어 수군 5,000명을 이끌고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임경업은 영철이 청나라와 명나라 말을 잘할 뿐 아니라 양국의 사정을 잘 안다 하여 통사로 삼아 데리고 갔다.


이해 4월 임경업 장군과 이완 장군은 각기 2,500명씩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바다에 띄우고 준비하다가 6월에 군사를 움직여 개주 근처에 이르렀다. 청나라 군대와 명나라 군대, 조선 군대가 팽팽한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임경업은 대국 청나라의 명령 때문에 할 수 없이 명나라와 싸우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들과 피 흘리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 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임경업은 한밤중에 영철을 불러 물 긷는 군사 두어 명과 함께 배를 태워 명나라 진영에 보내어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우리 조선이 어찌 명나라의 은혜를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이 힘이 약하여 청나라의 강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군대를 내게 되었습니다. 내일 싸움에 귀국과 우리가 싸울 때 우리 조선군은 총의 탄환을 제거하고 싸울 것이니 귀국 역시 화살촉을 제거하여 서로 다치는 일이 없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거짓으로 싸우는 체하다가 우리 군이 포위되면 귀국에게 항복할 것이니 이때 힘을 합쳐 청나라 군대를 쳐서 한 놈도 살아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명나라 장수는 이 편지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영철에게 은 삼십 냥과 베 이십 필을 상으로 주고 답서(答書)를 써 주었다. 영철이 하직 인사를 올리고 배에 올라 돌아오려 하는데, 저편 불빛이 있는 곳에서 한 군사가 나와 영철을 한참 보더니 영철의 손을 잡더니 크게 외쳤다.


“영철이! 자네 영철이 아닌가?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기를?”


영철이 놀라 자세히 보니 옛적 등주에 살던 친구이자 처남 전유년이었다. 영철 또한 기쁘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영철이! 자네가 갑자기 사라진 후에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어 의심도 했네만, 지난 번 조선의 뱃사공 이연생을 만나 자네가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 모시고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고……. 우리를 갈라놓은 바다가 너무 넓어 다시는 자네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자네를 보게 되다니…….”


유년은 말을 다 잇지 못하였다. 영철 또한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의 소식을 묻고 베 이십 필을 유년에게 주며 아내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자네는 돌아가서 이것을 내 처와 아이들에게 전해 주게. 이 베로 옷을 해입고 그 옷을 보면서 날 본 듯이 여겨달라고 해주게.”


반가움의 기쁨도 잠시, 영철은 전유년을 뒤로 한 채 조선진으로 돌아오니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임경업이 명나라 장수가 본낸 편지를 받고 기뻐 막 뜯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청나라 장수 두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와 배로 올라왔다. 임경업이 깜짝 놀라 급히 그 글을 배 밑바닥에 감추고 일어나 장수들을 맞으니 그들이 호통을 쳤다.


“너희 배가 적진에서 오는 것을 다 보았다. 너희들이 적들과 내통한 것이 틀림없으렷다?”


그러고는 임경업을 위협하여 군화와 옷을 벗게 하고, 선졸의 옷도 벗게 하여 샅샅이 조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임경업이 감춘 편지나 다른 어떤 증거물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장수가 조선의 병사들에게 배에 있는 이유를 캐어물으니 물을 길러 갔다 왔다고 대답하였다.


청나라 장수들이 그들을 칼로 벨 듯이 협박하였으나 병사들은 죽기를 작정한 듯이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청나라 장수들은 노하여 임경업으로 하여금 그들을 목 베게 하였다. 임경업은 부하 김덕중을 불러 다른 섬으로 데리고 가서 목을 베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덕중이 임경업의 뜻을 알고 병사들을 배에 싣고 작은 섬에 가 꿇어 엎드리게 하고 칼자루를 잡아 거짓으로 베는 형상을 하였다. 그리고 코를 살짝 쳐서 칼에 피를 묻혀 돌아와 청나라 장수에게 보이니 그제야 물러갔다.

그날 오후 명나라 군대가 배 스무 척을 이끌고 나아와 조선 군선(軍船)을 포위하니, 임경업이 또한 큰 깃발을 세우고 군중에 명령하였다.


“우리 군대가 청나라의 핍박을 못 이겨 이렇게 왔으나 그러나 어찌 명나라의 은혜를 잊겠느냐? 오늘 싸울 때 너희들은 총과 대포를 쏠 때 탄환을 빼고 헛소리만 진동케 하라. 그러면 명나라 군대도 우리 뜻을 능히 알 것이다.”


조선 군대들이 탄환을 빼고 빈 총과 빈 대포를 쏘니 명나라 군사들도 살촉을 빼고 화살을 쏘았다. 그렇게 하니 양쪽에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듯 물러가고 나아가기를 세 번쯤 한 뒤에 명나라 군사들은 미리 짠 계획대로 쇠갈고리를 가지고 조선 군사를 걸어 끌어당겼다. 조선 병사 중에 한 명이 그 계획을 알지 못하고 명나라 병사들에게 진짜 탄환을 넣고 총을 쏘았다. 명나라 군사 가운데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생기자 조선 군선을 둘러싼 포위망을 풀었다. 임경업의 계략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에 만일 임경업의 계획대로 하여 조선군이 명나라에 항복하였으면 영철은 반드시 등주로 가서 처자식을 만났을 것이다. 그날 낮에 청나라 장수가 사자를 보내어 임경업에게 승전을 축하하였다.


“조선 통사, 당신은 혹시 옛날 건주에서 살던 김영철이 아니십니까?”


영철이 깜짝 놀라 말했다.


“당신은 누구신데 저를 아십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득북이 외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영철이 그 이름을 물으니 과연 영철의 건주 아내에게 오라비 되는 사람으로, 김영철의 처남이었다. 청나라 사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건주에 있을 때 나는 소년이었는데, 이제 당신은 조선의 통사가 되고, 저는 장부가 되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625년 가을 당신이 명나라 사람들과 도망친 뒤에 소식을 알지 못하였는데, 뒤에 아라나 장군의 조카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라나 장군이 당신이 여기 온 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내와 자식은 다들 잘 있습니다.”


청나라 사자는 영철을 형이라 부르며 옛 소식을 물으며 서로 즐거워하였다. 임경업이 기이하게 여겨 사자에게 예물을 주었다.





7월에 양군이 싸움을 마쳤다. 청나라가 또 임경업에게 정예 병력을 뽑아 금주(金州)로 진격하여 주둔하게 하니 겨울을 지내고 돌아왔다. 이듬해, 1641년 봄에 청나라가 금주를 공격하면서 다시 조선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이에 유림을 상장군으로 삼고, 영유 현령 심담을 우영장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려 금주로 갔는데, 영철이 다시 통사(通詞)로 불려 가게 되었다. 매번 병역의 의무를 다하느라 영철의 고생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선 군대가 금주에 이르니 청나라가 금주를 반드시 함락시키고자 하여 청나라 황제가 친히 나서고, 여덟 명의 고산대장(高山大將) 또한 각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금주성을 에워쌌다. 고산대장이 매번 사자를 조선군 진중(陣中)에 보내니 유림이 사자 대접하는 일을 영철에게 맡겼다. 한 번은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 진중에 와서 일을 논의하는데 영철이 통역을 맡게 되었다. 그때 그 청나라 장수가 영철을 한참 보더니만 이윽고 말했다.


“내 너를 처음 부는 것 같지 않은데, 너는 나를 알아보겠느냐?”

“소신(小臣), 장군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 청나라 장수가 노하여 말했다.


“내 이제 너를 자세히 보니 누군지 알겠거늘 네가 어찌 나를 모른다고 하느냐?”


이에 영철이 청나라 장수를 자세히 보니 옛적 건주에서 자신이 모시고 있던 아라나 장군이었다. 영철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아라나에게 절하고 사죄하였다.


“옛적 제가 장군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배반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때 고단한 이 몸이 한족(漢族) 동료 아홉의 협박을 못 이겨 같이 도망하였으니, 그 죄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아라나가 노기 띤 목소리로 영철을 꾸짖었다.


“네가 네 죄를 아는구나. 내가 네게 세 번의 큰 은혜를 베풀었다. 네가 죽음에 처하였을 때 내가 너를 살려준 것이 첫 번째요, 네가 한 번 도망하고 두 번 도망하였을 때 죽이지 않고 풀어 준 것이 두 번 째요, 내가 동생의 처로 너에게 시집보내고 건주의 살림을 맡긴 것이 그 세 번째다. 너는 용서받지 어려운 죄를 진 것이 셋이니, 네가 목숨을 살려 준 은덕과 사랑하고 돌봐준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도망한 것이 그 하나요, 너로 하여금 말을 먹이도록 할 때 진심으로 너에게 맡겼거늘 도리어 오랑캐놈들과 짜고 나를 배신한 죄가 그 둘이요, 네가 도망하고 또 나의 천리마를 훔친 죄가 그 셋이다. 나는 네가 도망한 것이 한스러울 뿐 아니라, 내 천리마 세 필을 잃은 것이 한스러워 지금도 원통하다. 네 내게 세 가지 큰 죄 있으되 뉘우칠 줄 알지 못하니 네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네 내게 세 가지 큰 은혜가 있거늘 갚을 줄을 생각하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 이제 다행히 너를 만났으니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그러고는 그 부하를 불러 영철을 묶게 하니 상황이 몹시 급하게 되었다. 영철은 크게 소리쳤다.


“주공(主公)! 원통합니다. 말을 훔쳐 도망한 것은 한족의 무리 때문이니 제가 만일 이 죄로 죽는다면 저는 원통하여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당시 제가 그들의 계획을 따르지 않았으면 그들이 저를 칼로 죽이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을 것입니다. 제가 처자를 버리고 도망한 것이 어찌 제 본심이었겠습니까? 몇 년 전에 장군의 조카에게도 이러한 사정을 아시고 말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공께서는 살펴 용서하여 주소서.”

“그 일은 내 이미 알았거니와 네 죄를 생각하면 어찌 말 한 마리로 용서할 수 있겠느냐? 내 이제 너를 만났으니 진실로 용서치 못하리라.”


영철이 안타깝게 소리쳤으나 아라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에 유림이 아라나를 달래며 말했다.


“장군! 영철에게 죄가 있으나 이미 공이 살리셨는데 이제 죽이시면 덕스럽지 않습니다. 제가 영철의 몸값을 후하게 치를 것이니 공께서는 호생(好生)하는 덕을 보전하소서.”


그러고는 세남초 이백 근을 내어 아라나에게 주니 이때는 담배가 매우 귀한 물건이라 값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다. 아라나가 처음에는 받지 아니하였으나 억지로 받는 듯이 하여 허락하였다.


“이놈의 죄는 결단코 용서하지 못하리라. 내 죽이기로 맹세하였더니 이제 장군이 후한 사랑으로 이렇듯 갚겠다 하시니 어찌 따르지 않겠소.”


아라나가 부하를 시켜 그 묶은 것을 풀어 주게 하니, 영철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두드리며 사례하고는 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득북이 청나라 군사로 와 있었는데, 아라나가 영철을 일어나게 하고는 말했다.


“네 이미 여기에 왔으니 네 자식을 보고자 하느냐?”


아라나는 즉시 득북을 불러오게 하였다. 득북이 건주에서 아버지를 다시 못 보게 된 것이 다섯 살 때이었는데,이제 장부가 되어 만나게 되니 그 감격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부자가 서로 만나 우니, 그 옷과 머리 모양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그 얼굴 생김새와 목소리는 부자간에 똑 같으니 군중에 이를 보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로부터 득북이 날마다 술과 고기, 야채와 과일 등을 가져와 아버지에게 드리니 영철이 먼저 좋은 과일을 주장에게 바치고, 남은 것을 물리어 동료들과 함께 먹었다.


청나라 군대가 금주를 포위하자 명나라에서는 십만 명의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 왔는데 크게 패하였다. 유림이 영철을 보내어 청나라 황제께 축하의 인사를 전하였다. 그때 아라나가 영철을 보더니 아직 노여움이 덜 풀렸는지 황제 앞에서 다시 예전의 죄를 고하여 영철에게 벌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영철과 아라나에게 사연을 자세히 듣고는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철은 본디 조선인인데 8년 동안 우리 백성이 되었고, 6년 동안은 등주인이 되었다가 이제 돌아가 조선인이 되었도다. 조선인도 우리 백성이라, 또한 구사일생으로 도망한 자가 오늘날 통사가 되어 이 진중에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네 이미 조선으로 돌아갔다가 여기에 섰고, 네 장남은 봉수장으로 여기를 따라왔고, 차남은 또 우리 건주에 있어 부자가 모두 우리 백성이 되었고, 저 등주에 있는 두 아들 또한 어찌 우리 백성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천하를 얻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이 사람이 온 것도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러고는 아라나에게 다시는 영철을 괴롭히지 말라 하니 아라나가 부끄러워하였다. 또한 영철에게 비단 열 필과 달마(㺚馬) 한 마리를 내리니 영철이 절하며 사례하였다. 황제가 또 특별히 한 말 술과 익힌 고기를 하사하여 먹게 하니, 영철이 황제 앞에서 그 술과 고기를 한 번에 다 마시고 먹었다. 황제가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영철이 황제에게 다시 절하고 말했다.


“황제시여! 청컨대 이 말은 아라나 장군에게 주어 제 죽음을 면한 은혜를 갚고, 또 말 훔친 죄를 씻게 하소서.”

이에 황제가 흡족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영철은 진실로 허물을 알고 은혜를 잊지 않는 자라 이를 만하구나.”


이에 영철이 황제에게 받은 말을 아라나에게 바치니, 황제가 영철에게 다시 청노새 한 마리를 하사하였다.

영철이 조선 군중으로 돌아와 청 황제가 했던 말과 상 내린 일을 보고하니 유림 장군이 영철의 말 잘함을 칭찬하고 청 황제의 기량이 큼을 기이하게 여기었다. 득북이 이날 와서 영철의 상 받은 일을 듣고 기뻐하면서도,한편으로 자기의 아우는 멀리 건주에 있어 아버지를 만날 기약이 없다며 슬퍼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철은 자기가 탄 말을 아들에게 주며 말했다.


“득북아! 돌아가 이 말을 네 아우 득건에게 전해 주고, 이 말을 볼 때마다 이 아버지를 생각하라고 하여라.”


그날 낮에 유림 장군이 영철을 불러 말했다.


“영철이! 자네에게 이미 타고 다니는 말이 있고 또 노새를 얻었으니 말이 두 마리가 되었구나. 군중에서 두 필 말을 먹이기 힘드니 청노새를 나에게 파는 것이 어떠하냐?”


영철이 말했다.


“장군! 제가 타고 다니던 말은 이미 건주에 있는 제 자식에게 전하라고 주었고, 황제께서 하사하신 청노새는 청나라 진중에 다니는 때에 없으면 곤란하니 나중에 팔고자 합니다.”

“나중에야 어찌 팔 수 있겠는가?”


유림이 이렇게 말하며 불편한 안색을 지었다. 그후 몇 개월 만에 조선에서 교대병이 오니 유림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영철은 득북의 손을 잡고 목메어 울다가 등주의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마침내 득북과 헤어져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영철이 봉황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유림 장군이 어느 날 영철을 불러 말했다.


“네가 금주에서 아라나에게 잡혀갈 때 세남초 이백 근으로 네 몸값을 치러 너를 구하였는데, 그 물건이 나랏돈에서 나온 줄은 너도 알 것이다. 이제 각 진영에서 쓰고 남은 것을 계산하여 호조에 바쳐야 하는데 세남초 값은 네가 갚아야 할 것이다.”


영철이 깜짝 놀라 말했다.


“장군! 제가 일찍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문(軍門)에 출입하여 재산을 모은 것이 없는데 이렇게 큰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네 비록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재산을 아니 갚을 수 있겠느냐?”

“장군! 제가 세 번 전쟁에 나가 그동안 수고한 것과 세운 공이 적지 아니하니, 그것으로 이를 갚은 것으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는 장군에게 달렸으니 소신의 청을 헤아려 주소서.”


영철은 몇 번이고 유림에게 간청하였으나 유림은 끝내 영철의 청을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유림이 이렇게 영철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금주에 있을 때 영철이 자신에게 청노새를 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까닭이었다.





영철이 마침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 노모와 아내는 서러움과 기쁨이 뒤섞여 마치 죽었던 사람을 새로이 만나는 것처럼 반겨 맞이하였다. 영철이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호조에서 관리를 보내 영철에게 은 이백 냥 갚기를 재촉하였다. 호조에 돈 들이는 일이 늦어지자 영유 현령은 영철의 일가친척을 감옥에 가두고 기한을 정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감옥에 갇힌 일가친척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 중에 한 명이 분개하여 말했다.


“영철이 임경업 장군과 유림 장군을 따라 바다로, 육지로 종군하면서 들인 노고와 세운 공이 적지 아니한데, 어찌 조정에서는 조그마한 상조차 주는 일은 없고 도리어 이렇듯 살과 뼈를 깎는단 말이냐? 우리는 조선 백성도 아니더란 말이냐?”


영철이 청노새를 팔고 집안의 세간을 다 파니 호조에 갚을 돈의 반 정도를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충당할 길이 없어, 결국 친족들의 도움을 받아 그 나머지를 갚을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 후로도 영철에게 상 주는 일이 없었으니 이 일을 듣는 사람들마다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전에 영철의 아버지가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을 때 어머니는 혼을 부르기 위해 남편의 옷을 한 벌 남겨 둔 적이 있었다. 영철이 집으로 돌아오자 영철의 노모는 아들과 함께 안주성으로 갔다. 그리고 성에 올라 사방을 돌면서 소리 높여 슬피 울고, 죽은 남편의 옷을 흔들며 남편의 혼을 부르는 의식을 하였다. 어머니가 영철에게 부탁했다.


“아들아!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 옷을 함께 묻어다오.”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영철은 어머니의 시신에 그 옷을 함께 묻어 장사하였다. 영철은 고국에 돌아와서 네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름을 각기 의상(宜尙 ), 득상(得尙), 득발(得發), 기발(起發)이라 하였다. 영철은 자신이 겪은 군역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자식들 또한 그렇게 될까 걱정했다.





1658년, 조정에서 자모산성을 보수하도록 명하자 보초병을 모집하여 그들에게는 힘쓰는 일을 면제해 주었다.이에 영철이 네 아들과 함께 성중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 이미 육십이었다. 영철은 여전히 가난한데다가 늙어 의지할 곳도 없었다. 매번 마음이 불편해지면 문득 산성에 올라가 건주가 있는 북쪽과 등주가 있는 서쪽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음이 슬프고 쓸쓸해지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영철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처와 자식들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나는 진실로 그들을 배반하였지. 나는 고국에 돌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두 나라에 살고 있는 처와 자식들을 죽을 때까지 비통하고 한스럽게 만들었어. 지금 내가 이토록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것은 다 그 죄값을 치르는 걸게야.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종과 나그네 되었던 내가 끝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으니 이제 뭘 원망하겠는가?”


영철이 성을 지킨 지 20여 년,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외사씨(外史氏)는 말한다.


“영철이 전쟁 포로가 되어 후금(後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처자식을 두었으나, 모두 버리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그 의지가 참으로 강직하도다. 영철이 겪었던 일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가도(椵島)에서 군역할 때는 목숨이 위태로운 곳을 다니면서 그 수고로움이 매우 심하였다. 그가 세운 공은 장부에 기록할 만큼 많고 굵직하였으나 일찍이 티끌만큼도 상 주지 않았고, 오히려 현령은 말 값을 다 찾아갔고 호조 또한 남초 값을 갚도록 심하게 독촉하였다. 영철이 늙어서는 성을 지키는 졸개가 되어 가난하고 한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래서야 천하의 충성스러운 선비들에게 무엇으로 권면(勸勉)할 수 있겠는가? 내 김영철이 겪은 일이 잊혀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이 전(傳)을 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조선 땅에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출처 - http://dezign.tistory.com/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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