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대한민국의 탄생- (3) 의회와 헌법을 상상하다
게시물ID : history_188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키위링
추천 : 7
조회수 : 153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1/24 23:59:04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2iGfG

<< 공론장이 열리다. >>
  

개혁의 취지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 그리고 인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여러사람에게 알려지고 , 어떤 정책이 바람직한지 토론이 활발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
 

189647, 서재필을 발행인으로 하는 << 독립신문 >>이 창간되었습니다 . 조정에서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상당한 급여를 보장하고 , 신문사 건물을 임대해 주고 , 신문 발행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 취재와 신문 판매를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 여기서 그 유명한 독립협회가 탄생하였습니다 . 독립협회는 고위관리가 주도하는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 정도로 출발하였어요 . 그런데 , 참가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면서 , 주도하는 이들도 달라지고 활동내용도 점차 요즘 시민단체처럼 변하였습니다 . 1896년은 주권 상실의 위기감이 매우 높았습니다. << 독립신문 >>이나 독립협회는 바로 이 같은 위기 상황을 공유하고 , 대안을 함께 찾아가려는 노력속에서 등장하였습니다 . 그것은 단지 여러 신문 중의 하나 , 여러 단체 중의 하나 그 이상이었습니다 .
본격적인 언론이 만들어지고 , 시민 사회 단체 역할을 하게 될 단체가 결성되면서 , 새로운 차원의 공론장이 열린 것입니다 . 정부에서 하려는 일이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토론되며 , 폭넓은 참여 속에서 국가활동이 시작될 단서가 마련된 것입니다 . 새롭게 열린 공론의 장이야말로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
 
독립신문.jpg
 
 
 
 
 

<< 의회가 만들어지다. >>
       

대신이 함부로 일 처리를 못 하게 해야 한다 . ”
법을 제정하거나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는 의회를 통해야 한다 . ”
 

그렇다고 독립협회가 요즘 같은 국회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들 역시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 정부가 나랏일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다만 갑오개혁 때 중추원을 설치하였으니 , 규정을 고쳐서 이 기구를 의회처럼 운영하자는 정도였습니다 .
(제 1조) 중추원은 다음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 법률과 칙령을 제정 ,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일 . 의정부에서 황제에게 아뢰는 일 모두 . 인민의 건의사항 ...
(제 3조) 중추원 의관은 황제가 임명하되 , 절반은 정부에서 추천하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협회 가 27세 이상으로 정치 , 학식 , 법률을 잘 아는 자를 투표로 선출한다 .
(제12조) 의정부와 중추원의 의견이 다를 때 , 함께 의논하여 합의한 뒤 실천할 것 .
 

- 중추원 신관제 , 1898 . 11 . 4
 

규정대로만 하면 중추원이 사실상 외국 의회처럼 운영되는 것입니다 . 비록 황제가 의회 위에 있고 , 황제가 의원의 절반을 임명하는 한계는 뚜렷하지만 ,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 되었다 해도 큰 흠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하지만 , 결국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집회를 강제 해산하고 , 독립협회 급진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 그러고 나서 자신의 뜻대로 국가 제도를 법제화했습니다 .
 
중추원.jpg
 
 
 
 
 
 
<< 헌법이 만들어지다. >>
 

1조 대한국은 세계가 공인한 자주독립의 황제국이다 .
2조 대한국 정치는 오백 년을 이어왔으며 만세불변할 전제정치다 .
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
4조 대한국 신민이 군권을 넘볼 경우 , 행동을 했는지 아닌지와 상관 없이 신민이 아니라 할 것이다 .
 

- < 대한국 국제 ( 大韓國國制 ) >
 

< 대한국 국제 >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 할 만합니다 . 그러나 황제가 제정한 방식을 취하였고 , 내용 역시 황제의 절대적 권한만 천명하였을 뿐 , 국민이 누릴 권리를 천명하고 이를 보장할 국가의 역할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 1897년 대한이란 새 나라가 탄생하였습니다 . 그러나 그 나라는 민국이 아니라 제국이었고 , 그래서 국민이나 인민은 없고 황제와 신민만 있었습니다 . 새 나라에 어울리는 국제도 만들었으나 , 그것은 헌법이라 부르기도 어렵고 아니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 헌법은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민주국가에서 헌법은 국민이 만들고 , 국민이 누릴 권리를 천명하며 , 그것을 보장할 국가의 임무와 역할을 정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
    
대한국 국제.jpg
 
 
 
 
 
 
 
<< 자유주의를 지향하였던 독립협회. >>
 
 

그런데 , 대체 왜 ? 독립협회 주도층은 국민 속에서 더 많은 지지층을 조직하는 데 소극적이었을까요 ? 그들 대다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 자유 , 생명 , 재산의 권리를 타고났으니 , 국가는 이를 함부로 구속할 수 없다 .” 라고 주장하며 이를 제도화하려던 사람들 아니었나요 ?
 

하원은 백성에게 정권을 주는 것이다 . 정권을 갖는 사람은 지식과 학문이 있어서 , 내 권리를 알면서도 남의 권리를 해치지 않고 , 사적인 일보다 공무를 앞세우며 , 큰 의리를 숭상하여 백성과 나라에 유익한 정치를 해야 한다 . 무식하면 한 사람이 다스리나 여러 사람이 다스리나 나랏일이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다 . 무식한 세계에는 군주국이 도리어 민주국보다 견고하다는 사실이 역사와 다른 나라 상황이 보여 준다 .
- < 독립신문 > , 1898 . 7 . 27
 

독립협회가 막 의회 설립 운동에 나설 무렵 < 독립신문 >에 실린 글입니다 . 이 글을 쓴 사람은 백성보다는 국가를 앞세웠고 , 백성을 나라의 주인 , 정치의 주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니까 무법한 인민과 시세를 알지 못하는 유생층이 민병을 조직하였으니 박멸함이 마땅하다 .” ( < 독립신문 > , 1896 . 8 . 6 )라거나 , 수도에 외국 군대가 와 있어 동학과 의병을 막아주니 다행 ( < 독립신문 > , 1898 . 4 . 14 ) 이라는 막말이 버젓이 < 독립신문 >에 실렸겠지요 . 회원들은 자주와 독립을 열렬히 소망하였고 , 그래서 충군과 함께 애국이란 단어를 퍼뜨리고 , 활발하게 실천하였습니다 . 게다가 민권이란 단어를 대중화하고 , 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뭇 사람들이 수긍하도록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하지만 외세의 침략으로 주권이 흔들리던 떄였습니다 . 그래서 국권을 지키는 일을 민권을 확장하는 일보다 시급하게 여겼습니다 . 민권을 말하면서도 민권을 제한하자는 모순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 자유를 지향하면서도 민중 , 민주주의와 손잡기보다 수구와 타협하고 외세에 의존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그들이 말한 그 자유조차 실은 수구나 외세와 대결할 수 있는 민주의 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을 텐데 .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