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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대한민국의 탄생- (4) 구한국 최후의 날, 신한국 최초의 날
게시물ID : history_188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키위링
추천 : 6
조회수 : 104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1/26 02:15:2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9KFVQ
 
 
 
 
 
 
 
 
<<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
 
조소앙.jpg
     
<신한민보>는 미국에 있는 동포들끼리 소식을 나누고 서로 협력하며 발행하였던 신문인데, 국내는 물론 한인이 많이 머물던 간도와 연해주에도 배포되었습니다. 미국에는 한인 단체가 여럿이었는데, 그 중 안창호 등이 활동한 공립협회가 국권회복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공립협회 회원들은 1907년 초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새로운 단체 건설에 나섰습니다.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통일 연합하며 독립과 자유를 지향할지니 이것이 신민회의 목표다. 다시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 우리가 인민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사랑하며, 인민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지키겠는가.
                                                                                                                                                                   
 -대한신민회 취지서 , 1907
  
 
 
이들은 먼저 미국에서 대한신민회를 조직한 뒤, 안창호 등이 귀국하여 신민회 국내 지부 건설을 추진합니다. 미국에서 온 동포들은 망국의 위기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을 전제 정치에서 찾았습니다. 왕 한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양반과 평민 사이의 차별이 이토록 분명하니 국력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애국지사들도 큰 틀에서는 생각이 같았습니다. 다만, “ 공화제를 목표로 하자 .” 라는 주장에는 바로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왕을 없애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법 긴 토론을 거친 뒤, 미국에서 온 안창호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양기탁 등 여러 그룹의 애국지사들이 신민회를 만들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 스스로 혁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혁신된 자유 문명국을 건설할 것. ”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완전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그 합의가 공화제였다고 해석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미국 동포들은 거의 그러하였고, 국내에서도 동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 헌병대가작성한 기밀 보고문서에도 공화정체를 추구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라는 백성으로 이루어지고, 임금은 백성이 있어 세워진 것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백성과 함께 만든 헌법에 따라야지 위에서 억지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입헌 정치를 하는 나라는 흥하고, 전제정치 하는 나라치고 쇠퇴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 헌정연구회 취지서 , 1905
 
 
 
군주제를 부정하지는 않되, 의회를 만들고 헌법에 따라 정치를 하자는 주장입니다. 입헌군주제로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에 대해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계몽 단체가 공감하였습니다. 나라 안에서 왕을 없애자는 주장을 펴기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주장을 편 사람들 중에는 인민이 아직은 어리석어 충분하게 교육한 후에야 공화제가 가능할 것 이라 생각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공화제는 고사하고 입헌군주제조차 주장에 그쳤고, 대한제국은 결국 전제군주제 상태에서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헌정연구회.jpg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조소앙 등 여러 투사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여려 날 동안 토론을 거듭한 끝에 역사적인 문서를 하나 집필합니다.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829일은 즉 우리 동지들이 이를 계승한 829일이니, 그 사이에 순간의 쉼도 없다. 우리 동지들은 주권을 완전히 상속하였으니,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하는 때요, 구한국 최후의 하루는 곧 신한국 최초의 하루다 ... 그러므로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곧 우리 국민 동지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우리 동지들은 당연히 주권을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 <대동단결선언> , 1917
 
 
 
주권민유(主權民有) , 민이 나라의 주인이니 이제 황제가 행사하던 주권을 국민이 직접 행사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된 이들의 무한 책임을 거론하며, 단결된 인민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자며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합니다.
 
 
 
- 여러 곳의 단체들이 모두 모여 유일무이한 최고 기관을 만들자.
- 한 곳에 본부를 두고, 한족을 통합하되 지역별로 지부를 두어 운영한다.
- 헌법에 준하는 규칙을 만들어 인민의 의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자.
- <대동단결선언> , 1917
 
 
 
이 글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읽어 봅시다. 이런 뜻이 되지 않을까요?
 
주권은 민족 고유의 것으로 침략자에게 넘겨질 수 없다. 황제가 주권을 포기하였으니 이제 인민이 주권자가 된다. 대동단결하여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임시정부를 만들자. ”
 
그렇습니다. 이 글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서 민주, 공화가 흔들릴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은 현실을 보여 주는 글인 것입니다.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던 분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면서 진정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깨달으며,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모두를 위한 국가, 민주공화의 나라를 상상한 것입니다.
  
대동단결선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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