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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성관념을 바꿔놓은 시대의 혁명가 휴 헤프너 그는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집에서 태어난 헤프너의 집안 교육은 엄격했습니다.
보수적인 집에서 자란 터라 유년시절에 그는 온순하면서도 수줍은 많은 소녀였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150의 높은 아이큐를 소유한 소년이었지만 공부나 학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죠.
그 후 대학에서 성인잡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후로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사고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 꿈에 그리던 에스콰이어에 입사하게되었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급여도 높지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하게 되죠.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잡지를 창간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누구보다 보수적이었던 어머니가 가장 많은 투자를 해주었다고 하죠. 50년 대 중반에 평균 연봉이 약 4000달러 였으니
일반인 2년 연봉을 자본금으로 시작한 셈이었던 것이죠.
사실 플레이보이의 시작은 휴 헤프너의 차고에서 시작했고, 조금은 초라했습니다. 게다가 잡지의 원래 이름은 총각파티라는 뜻을 가진 'Stag party' 였다고 해요.
다행이게도 이 이름은 상표권을 등록하지 못한채 플레이보이가 되었는데요.
그 후,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가 성공하려면 창간호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끌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초기투자금의 거의 전부를 단 한장의 사진을 구입하는데 쓰게 되죠.
이는 예상을 적중했습니다. 결국 휴 헤프너는 5만부 이상의 발행물을 전부 매진시키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런 플레이보이의 대박행진의 비결은 바로 플레이메이트 였죠.
이는 플레이보이 각 호에 특집으로 실리는 누드모델을 이야기 합니다. 플레이메이트에 선정되면 어마어마한 페이와 유명세가 따라왔기 때문에 많은 모델뿐 아니라 헐리우드 스타들까지 플레이메이트에 지원했습니다.
또 하나 플레이보이 하면 플레이보이 바니를 빼놓을 수 없죠. 창간호 다음에 등장한 이 플레이보이의 상징 나비넥타이를 맨 토끼는 놀기좋아하는 토끼의 상징과 우아함을 표현하는 보타이가 만나 단순한 야한것을 좋아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지적이며 노늣것도 잘하는 독자를 타겟팅한다는 철학을 상징하게 된것이죠.
실제로도 플레이보이는 여성의 누드사진만 올리는 것이 아닌 유명작가들의 글을 주기적으로 연재했고, 남성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지명인사의 인터뷰 등 높은 수준의 컨텐츠를 실으려 노력을 쏟았습니다.
이 결과로 플레이보이 바니는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죠. 다양한 분야에 로고가 사용되면서 지금은 잡지수익보다 로고 라이선스에서 나오는 수익이 훨씬 높은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플레이 보이의 창시자 '휴 헤프너' 의 재산은 얼마일까??
이런 그가 죽기전 가지고 있던 자산은 5천만 달러로, 약 600억원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 할 수 있는 그의 재산의 비결은 살아있는 동안 아쉬울 것 없을만큼 플렉스 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플레이보이 맨션으로 이름지어진 그의 집은 전세계 모든 남성들이 0순위로 살고싶어하는 집이죠.
캘리포니아 최고 부촌 중 하나인 홈비 힐스에 위치해 있는 이집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집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가장 핫한 플레이메이트의 여성들과 이집에서 함께 살았고, 지금의 지안루카 바치나 댄 빌제리언의 라이프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주었죠.
그 뿐 아니라 소형 수목원, 체육관, 테니스 코트, 온수 풀과 인공동굴까지 있는 이 대저택은 플레이보이 화보촬영과 리얼리티쇼 촬영지의 역할까지 수행해내었죠.
이 파티는 선택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었고, 헐리웃 스타들도 초대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곳입니다.
플레이보이라는 브랜드 이름만큼 그의 인생도 플레이보이였는데요. 한번에 7명의 여성을 사귄적도 있을만큼 수많은 플레이메이트들이 그를 거쳐갔다고 합니다.
또 60세의 연하와 결혼할 때에는 헤프너의 사망시 어떠한 상속도 받지 않는다는 혼전 계약서 를 작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해요.
물론 그는 어린 부인의 명의로 500만 달러짜리 저택을 선물했고, 결혼 전 잠깐 파혼했을 때는 벤틀리를 위자료로 지급하기도 했죠.
로고를 그려넣은 비행기가 있었죠. 이 비행기는 맥도널드 더글라스사의 dc-9 모델입니다.
빅버니에 탑승하는 객실승무원 4명은 젯버니라고 불렸는데 플레이보이 모델중에서도 최고의 요원들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행기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전세를 내 투어를 돌기도 했고, 베트남전의 전쟁고아를 실어 나르기도 하는 임무를 수행했죠,
휴 헤프너의 차컬렉션 역시 대단했습니다. 그가 가진 클래식 카들은 각 시대를 호령했었던 자동차들이었죠.
캐딜락 62시리즈 컨버터블, 메르세데스 벤츠의 300SL컨버터블, 600pullman 리무진,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등 일찍이 부를 이룬 그 답게 타고다닌 닌 자동차를 오랜세월 보유했고, 그의 플레이보이멘션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죠.
마지막 가는 길마저 특별했습니다. 7만 5천달러를 주고 1992년도에 구입한 LA웨스트우드 빌리지 공원묘지에 묻혔는데,
이 위치는 마를린 먼로가 묻혀있던 바로 옆자리였다고 하죠.
인종차별이 난무했던 시대에 그는 프로그램에 흑인과 백인을 함께 출연시켰고, 플레이보이 재단을 만들어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단체를 후원했으며, 종교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활동에 많은 돈을 기부했죠.
여성의 인권문제에도 누구보다 앞서있었던 그는 성에 대한 해롭고 위선적인 생각을 바꾸는데 일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0023317&memberNo=38455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