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이승만 특집을 한다느니 시절이 하수상하여 광복절이 가기전에 부랴부랴 올려봅니다... 백범 김구 암살의 하수인인 안두희는 1955년 ‘시역의 고민’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안두희의 수기’란 부제로 세상에 등장해서 정부 각 기관, 군부대, 학교 등에 배포되었다. ‘시역의 고민’은 백범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는 이승만을 보호하고 어디까지나 안두희 본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자발적인 단독범행임을 주장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안두희가 옥중에서 썼다는 이 일기형식의 수기는 감옥에서 집필 행위가 금지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볼 때 암살 배후세력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로 안두희는 백범 시해 진상규명위원회의 김석용씨와 가진 육성녹음에서 특무부대 김창룡, 인천의 김일한 같은 사람들의 권고가 있어서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어쨌든 안두희는 옥중수기를 쓰게 되었고 이것을 건네받은 김창룡 일당은 내용을 크게 변조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변조된 내용은 바로 백범과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을 용공으로 몰아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측근들은 정치적 라이벌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암살자의 이름으로 백범의 사상과 노선을 ‘부관참시’ 한 것이다. 안두희도 육성녹음에서 “중간에 거저 내가 쓴 원고와는 딴 원고입디다”라고 변조 사실을 입증했다. 변조자들의 목적은 암살범을 동정하는데 있지 않았다. 안두희가 백범을 죽이게 된 동기를 리얼하게 위작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변조자들은 단지 백범을 서너번 만난 적이 있는 일개 포병 중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안두희 자신을“백범의 제자”같은 백범과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묘사한다. 이들은 안두희가 백범 면전에서 백범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처럼 쓰면서 암살자의 입을 통해 백범을 용공주의자, 여순사건의 교사자, 송진우와 장덕수의 암살 배후 등으로 채색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얼마나 소설에 불과한 것인지 금방 드러난다. 안두희를 경교장 2층으로 안내했던 백범 선생의 비서 선우진의 증언에 따르면 백범 피격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뤄졌다.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안두희가 백범을 보자마다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또한 4.19직후 서울에서 안두희를 붙잡아 검찰에 넘겼던 김용희씨는 당시 안두희로부터 “인사를 드리는 척하다가 백범이 쳐다보는 순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란 자백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안두희도 육성녹음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확인한다. <육성녹음의 내용> “그대루 그저 나두 모르게 총을 빼자마자 한 발 갈기니까, 벌써 어데 두골(두개골)에 맞아서 말두 못하구 팍 쓰러지는데, 그 다음에 뭐 그저 무조건 더, 몇 방 더 쏜 기억이 납니다. 그럭하구선 완전히 선생이 쓰러지드만요” 안두희가 쏜 4발의 흉탄 중 제1발과 2발은 머리에, 제3발은 가슴에, 제4발은 배에 명중되었다. 사건 직후 총소리를 들은 비서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암살 배후세력들은 ‘시역의 고민’을 변조하면서 백범의 노선과 한독당의 행적을 겨냥했다. 가고 없는 지도자, 이미 해체된 정당의 이름마저도 독재자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변조 내용을 보면 “...반동배, 소위 국회 소장파의 노선과 한독당의 지론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합될 법인가. 공산당 프락치 국회 소장파 주도배의 본거지이며 참모부가 경교장(백범의 처소)이라는 세론도 중상만이 아닐 것이니 지금까지 반동적인 정치사범의 배후관계를 캐고 들어가면 거개가 경교장이라는 미궁으로 숨어버린다는 이 사실을...” 이들이 책에서 반동배 국회 소장파라고 부른 이들은 반민특위에서 친일파 척결을 주도한 의원들로서 우리 현대사의 미스터리의 하나인 ‘국회 프락치 사건’을 빌미로 대부분 제거되었고, 같은 해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습격과 백범 암살로 이어지는 굴절의 역사가 자행되었다. 특무대장 김창룡이 주도한 ‘시역의 고민’과 같은 변조 행위는 그 후 정적을 때려잡는 수법으로 전승되고, 이처럼 권력에 맛들인 정치군인들의 행위는 3대에 걸친 군사정권으로 이어져 우리 현대사를 퇴행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김상웅 저/인물과 사상사)에서 요약 정리 <참고> * 국회프락치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4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공작을 한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이문원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이 외국군(미국,소련)의 완전철수,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자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을 검거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반민특위가 해체당하는 결과를 가져옴. (위키백과에서 요약) * 김창룡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시작 일본군 사복헌병이 되어 정탐원으로 정보분야에서 대활약?... 해방 후에는 대개의 친일파 군인 출신들이 그러했듯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함. 한국전쟁 중에는 일본헌병 때 익힌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여 좌경분자 및 인공치하 부역자를 색출하여 수만명을 고문하고 처단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민간인 학살의혹도 큼.. 전쟁 후에도 이승만 정권을 위해 수많은 정보 정치조작사건을 일으키나 결국 자신도 암살로 삶을 마감하는데 이승만은 자신의 수족이 잘린 것처럼 슬퍼했다고 함.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루고 비문은 역사학자 이병도가 씀. 비문 내용은 대충 조국애로 똘똘 뭉쳤다는 둥, 호국의 신이라는 둥 그런 내용임.. 묘지는 대전 국립묘지에 있음... 문득 우리나라 자칭 우익의 뿌리를 생각해보니 참 씁쓸합니다...심지어 정부나 국군, 경찰의 경우 말로만 임시정부의 후예이고 광복군의 후예이지 권력자들의 면면은 조선총독부의 후예인지 만주 관동군의 후예인지 착각할 정도네요. 사실 어디서 정통성 운운하기도 쪽팔립니다..그래서 그런가? 지들도 누가 볼까 쪽팔리는지 근현대사 역사교육 분량을 줄이자는 소리나 하고 있지요...이들이 애써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이유를 알만합니다. 아~ 진짜 보수들은 정말 다 어디로 사라졌나요...아마도 한국전쟁때 남에선 좌익으로 몰려서 죽고 북에선 반동으로 몰려서 다 죽었나봅니다....그래서 오직 기회주의자와 친일파 출신의 친미사대주의자만 남았나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재정권이 불리하면 튀어나오는 게 용공 간첩이라는 만병통치약이니 국민의식수준은 60여년 전보다 얼마나 높아졌을까... 거짓과 조작이 이젠 안통할 만큼 높아졌을까... 자주통일, 평화통일, 외국군철수를 주장해도 용공빨갱이로 몰리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