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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의 여진족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들의 영토에서 거리가 먼 남쪽 일본의 대마도와 규슈에까지 쳐들어가 약탈을 저지르는 해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일본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 의하면, 관인(寬仁) 3년(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에 쳐들어와 소와 말 같은 가축들을 빼앗았으며, 4월에는 이키섬(일기도壹岐島)을 공격했고, 그 다음에는 일본 규슈에 상륙하여 하카다(博多)와 나카사키(長崎)까지 침략했다고 합니다.
이때 여진족 해적들에 의해 460여 명의 일본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약 1300여 명의 일본인들이 붙잡혀갔다고 소우기에 전해집니다.
또한 소우기의 기록을 보면, 여진족 해적들은 모두 방패를 들었으며, 제 1열의 전투원들은 짧은 칼(단도短刀)을 사용했고, 제 2열의 전투원들은 긴 칼(대도大刀)을 사용했으며, 제 3열은 활을 쏘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맹위를 떨친 여진족 해적들은 그러나 규슈의 지방 호족들에 의해 격퇴당해 배를 타고 다시 바다를 건너 본거지로 돌아가던 도중에, 고려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고려사절요 현종 10년(1019년) 4월 기사를 보면,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등이 (여진족)해적의 배 8척을 잡았는데,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들이 사로잡은 사람(일본인) 2백 59명을 돌려주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일본으로 쳐들어간 여진족들은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소에도 바다와 접하며 살았기 때문에 해적이 되어 그들의 고향과 거리가 먼 일본에까지 쳐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처 | 무장한 한국사/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 130~13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