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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청춘, 6.10 민주항쟁과 6.29 선언
게시물ID : history_19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
조회수 : 62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6/29 17:20:19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에서부터 29일까지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일컫는 말입

니다. 이를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혹자들은 이 시기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고 평하

기도 합니다. 그럼 항쟁의 발단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노태우의 직선제 수용 선언

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봅시다.

1987년 1월 14일

이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1학년 박종철 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하지

만 어이없게도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라는 실로 개콘에서나 나올 법

한 사망 원인을 발표하였고, 이 사건은 이후 전두환 독재정권 몰락의 한 단초가 됩니다.

1987년 2월 7일

이날을 기하여 전국 주요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식" 이 치뤄졌으며, 도심에선 정권을 규탄하는 시

위가 벌어졌습니다.

1987년 3월 3일

이날은 박종철 군의 49재가 있던 날이었습니다.이날을 기하여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대규모 시위가 열렸습

니다.

1987년 4월 2일

서울대학생 학부모 130여명이 모여 시국사태 관련 구속 학생들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철야 농성이 있었습니

다.

1987년 4월 13일

이날, 전두환 정권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이른바 "호헌 조치" 를 발표하였고 이것은 분노한 시민들

의 불붙은 가슴에 기름을 뿌리는 것과 같은 조치였습니다.

1987년 4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은 일제히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의 철회를 요구하

였습니다.

1987년 4월 24일

전두환 정권에 의한 이른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이 알려지며 시민들의 정권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지

게 됩니다.  

1987년 5월 17일

부산상고 앞에서 노동자 황보영국 씨가 "독재정권 물러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

으나 안타깝게도 열흘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987년 5월 18일

이날, 박종철 군 사망사건을 경찰이 조작했음이 알려졌고, 이에 분노한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나

와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사실상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당겨진 것이지요.

1987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 가 조직되고 6월 10일을 기하여 대규모 규탄대회를 가

지기로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987년 5월 26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박종철군 사건의 책임을 물어 국무총리를 노신영에서 이한기로 교체하였으나 그

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1987년 5월 27일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명이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고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가

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4.13조치 철회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선언" 이 발표되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이날 연세대 학생 이한열 군이 학교 앞에서 시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크게 다쳤습니다. 이후 병원으

로 옮겨졌으나 7월 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호헌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집회가 있었습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정

권에 대한 항쟁의 의미로 차를 세워 경적을 울리거나 혹은 흰색 손수건을 흔들어 줄 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하

였고 실제로 6시가 되자 도로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와 버스에 탄 시민들이 흔드는 하얀 손수건으로 가득 메

워졌습니다. 여고생들은 항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함은 물론 직접 시위

에 참여하는 등 든든한 조력자들이 되어 주었고 이런 학생들과 시민들의 도움으로 서울 도심에서의 대규모 

집회는 계속될수 있었습니다. 특히 명동성당 농성당시 성당 옆의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을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시위가 계속될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날, 당시의 집권여당이었

던 민주정의당은 노태우 대표를 대선후보로 선출했습니다.

1987년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총 3467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습니

다. 이날 무려 6만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으나 지난 6월 10일에 열린 집회 참석자의 수에 3배에 달하는 

인원이 참여하였고, 특히 회사원들의 참여가 크게 늘어 단순한 학생운동을 넘어 시민운동으로 발전하는 모습

을 보였습니다. 이런 거대한 민심의 해일 앞에서 아무리 경찰수를 더 늘린들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결국 백기를 들고 8개의 시국수습 내용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각종 재야단체는 즉각적인 개헌 착수와 양심수 석방 및 수배 해제를 요구하였

습니다.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으나 DJ와 03옹의 후보 단일화 불발

로 민정당 후보였던 물태우 장군이 당선되었고, 결국 절반의 승리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결과를 맞게 되었

지만 이후 노동운동과 각종 시민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그 어떤 역사적 사건보

다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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