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아닌 인생’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엑스트라, 곧 보조출연자들이다. ‘방송사→제작사→기획사→보조출연자’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최말단에서 소품처럼 취급당하는 이들은 드라마 안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엑스트라’일 뿐이다. 보조출연자 7만여명이 노동자로서 지위를 얻은 지 1년이 됐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드라마 <각시탈>의 보조출연자 고 박희석씨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사건을 계기로, 한국 엑스트라 역사 60년 만에 얻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보조출연자들은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다. <한겨레>는 이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현장을 들여다 보기 위해 취재진이 직접 보조출연자로 취업해 취재하는 한편,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보조출연자 30여명을 인터뷰했다. ‘드라마 왕국’의 그늘에서 눈물짓는 엑스트라들의 이야기를 8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나는 시급 5000원짜리 엑스트라다. 출연작은 고작 두 편뿐인 신참이다. 8~9월 세차례 일을 나갔지만 출연료는 아직 받지 못했다. 기획사는 “(출연료는) 출연일이 속한 달의 다음달 말일 지급에 동의하며, 지급 기일 연장에 동의한다”고 적힌 근로계약서를 내밀었고, 나는 서명했다. 출연료를 얼마나 줄지도 정확히 모른다. 기획사는 “나와 봐야 안다”고 얼버무렸다. 때로는 어디로 촬영을 가는지도 몰랐다. 기획사는 집합 장소와 시간, 드라마 제목만 공지했고,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버스에 실려갔다. 지난 10일 새벽 4시30분. 졸린 눈을 비비며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MBC) 남문 앞에서 경기 용인으로 가는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앞서 밤 12시께 용인 드라미아 세트장에서 문화방송 드라마 <기황후>(10월 방영 예정) 촬영을 마치고 여의도로 옮겨졌고, 집에 갈 시간이 없어 근처 찜질방에서 3~4시간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버스에 탄 보조출연자 40여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4시간 전까지 함께 촬영하던 사람들이었다. 스태프들은 용인에서 숙박을 하는데, 보조출연자들은 용인에서 서울에 부렸다 또다시 용인으로 데려갔다. 숙박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숙박비 안 나오냐고 따지면 다시 여기 못 와. 기획사가 일을 안 주거든.” “용인에서 <선덕여왕> 찍을 땐 식당에서 잤는데, 이젠 (식당은커녕) 대기실에서도 못 자게 해. (경북) 문경처럼 먼 데 촬영 가면 숙박비가 나오는데 그것도 반장이 일부 떼어 먹는 경우가 많아.” 선배 보조출연자들은 전날 15시간30분을 일하고도 새벽에 또 용인과 서울을 오가는 살인적 일정에 체념한 듯 말했다. 새벽 5시, 버스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한시간 뒤 용인 세트장에 도착했다. 간밤에 세트장에서 몰래 잠을 잔 보조출연자 ㄱ씨는 속삭이듯 말했다. “샤워실이 열려 있던데? 몰래 씻었지. 여의도에서 집에 가려면 택시비가 왕복 2만원이라 갈 수가 없어.” 기획사 반장은 전날 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용인에 남겠다는 보조출연자 5명을 쥐잡듯 다그쳤다. “어떤 싸가지 없는 ××가 서울 안 가고 자기 차로 다른 애들 찜질방에 데려다 준다고 ××이네.” 서울에 가지 않고 촬영장에 남을까봐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반장에게 따지지 않았다. 피곤한 우리는 땀과 먼지, 분장으로 뒤범벅된 채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기황후>의 ㅇ제작사와 ㅌ기획사는 ‘숙박이 필요한 경우 보조출연자 1인당 3만5000원에 해당하는 숙박을 지급한다’고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숙박을 제공하지 않았다. ㅇ제작사는 “(서울과 용인을 왕복하며 3~4시간 쪽잠을 자는 것은) 그 분들의 사정이고, (그게 싫다고 하면) 서울에 있는 다른 보조출연자를 부르면 된다. 보조출연자들은 고정 배역이 아니라 매일 필요 인원도 바뀌기 때문에 경남처럼 먼 곳을 가지 않는 한 숙박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내가 전날 맡았던 기생 역은 보조출연자 세계에선 신참의 몫이다. 누구도 원치 않는 역이다. 12시간 이상 몇 ㎏짜리 가체 두 개를 얹으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헤어 담당 스태프가 머리카락을 얼마나 세게 잡아당기는지 두피가 욱신욱신했다. 옷을 갈아입을 땐 남자 스태프가 뒤에 서 있었다. 민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한복 안에 받쳐 입었어도, 여성 스태프가 한복 치마를 죽죽 당기는 통에 민소매 티셔츠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속옷이 보일까봐 손으로 가슴을 가려야만 했다. “저… 오늘도 기생 역할인가요?” 부반장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짜증이 돌아왔다. “그런 거 따지려면 왜 출연해?” 보조출연자 ㄴ씨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언니, 나 엠비시 <불의 여신 정이> 찍을 때 가체 4개 올리고 12시간 대기했잖아. 다음날 머리 왼쪽 부분이 다 빠졌어. 티 많이 나?” 두피가 드러날 만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다행이다. 이날은 기생 역할 촬영이 없었다. 보조출연자들은 버스에서 버선과 짚신을 신으며 투덜댔다. 더러운 건 둘째치고 발에 맞지 않았다. 버스 귀퉁이에선 반장이 한 여성에게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 니가 술을 먹고 안 나오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아냐?” 무슨 일인진 몰라도, 출연하기로 하고 촬영장에 안 나온 적이 있었나 보다. 나는 시급 5000원짜리 엑스트라
그러나 얼마 받을진 나와봐야 안다 첫날은 신참자에 떨어지는 기생 역
가체 얹고 12시간 대기 머리 깨질듯
찜질방서 쪽잠 자고 다시 촬영장행 둘쨋날은 밧줄 묶여 끌려가는 공녀
부딪혀 우는데 “리액션 더!”
잘 못하면 기획사 반장 욕설 날아와 아침 7시30분. 부반장이 촬영 장면을 설명했다. “젊은 처자들은 안에서 우왕좌왕 왔다갔다하면 돼. 저잣거리에서 붙잡혀 가는 거야. 부모들이 달라붙고, 여자들은 잡혀가고. 백성들은 안타까운 눈초리. 하여튼 처음에 소리 지르고, 딴 거 없어.” 나는 원나라로 끌려가는 고려시대 공녀를 맡았다. 다음부턴 무작정 기다리는 시간이다. 보조출연자들은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잠깐 조는둥 마는둥 하고 나면 목이 탔다. 현장엔 마실 물이 늘 부족했다. 뙤약볕 아래 오래 대기하는 보조출연자들은 물을 구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인마, 빨리 가!” “이리 와!” 오가는 보조출연자들에게 반장의 반말은 수시로 날아들었다. 정작 보조출연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긴 원래 이래. 저 반장 정도면 양반이야.” 경험 많은 여러 보조출연자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드라마의 한 반장을 입에 올렸다. “현장에서 잘 못하면 그 반장은 ×××, 똑바로 하라고!’ 하고 바로 욕을 하지.” “부채질하면 혼나고, 물 마시면 혼나고, 바닥에 배 깔고 누우면 혼나고. ‘미친×아, 돌았냐’고 하는 날도 허다해. 그래도 야간 일당을 챙겨주니…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오전 11시. 끌려가며 우는 연기를 할 시간이 됐다. 정말 울고 싶어졌다. 공녀 10명이 한 줄로 밧줄에 묶인 채 걸어가는 장면을 찍는데, 앞에서 병사들이 밧줄을 당기면 우리들은 넘어지고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다. 보조출연자들끼리 강하게 충돌하는 ‘사고’도 터졌다. 한 보조출연자는 손으로 눈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다른 보조출연자는 턱을 다쳤고 어떤 보조출연자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부상자가 잇따르는데도 치료약은 물론 촬영 중단도 없었다. “여기선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해야 해.” 선배 보조출연자가 충고했다. “옳지, 옳지! 리액션 더 강하게!” “누가 우는지 안 우는지 다 보인다고! 울어!” 보조출연자들은 열심히 울었지만, ‘진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스태프는 없었다. 촬영감독과 반장은 보조출연자들이 만드는 ‘그림’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는 소리를 내다가도 보조출연자 아닌 ‘진짜 배우’가 대사를 하면 울던 우린 입을 다물었다. 낮 12시. 점심시간이 되자 진짜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태프들마저 보조출연자들과는 밥을 따로 먹었다. 세트장에 마련된 식당 한쪽엔 보조출연자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자리를 못 잡은 한 보조출연자가 스태프들이 모여 앉은 다른 쪽의 빈 자리로 갔지만, “여기로 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돌아섰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날은 그나마 큰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보조출연자와 스태프의 반찬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보조출연자들은 ‘음식’을 평등의 잣대라고 여겼다. 8월30일 문화방송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촬영장도 그랬다. 스태프들이 먼저 밥을 먹은 뒤 보조출연자들 차례가 됐는데, 주메뉴인 오징어볶음이 다 떨어져버렸다. 양념국물만 떠먹는 보조출연자들의 표정은 침울했다. 아이스크림을 똑같이 받았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스태프들 사이에 아이스크림이 돌자, 선배 보조출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한텐 주지 않고 스태프나 배우들끼리 먹는 거야. 기대하지 마.” 그러나 너나없이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자 표정이 환해졌다. 한 보조출연자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며 웃었다. 7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어서라기보다는, ‘유령’이 아닌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오후 2시. 식사 시간과 함께 촬영도 끝났다. 근처에 있는 정자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반장은 그날, 처음으로 농담을 했다. “난자가 아닙니다. 정자로 오세요.” 참으로 ‘건전한’ 농담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에 고단한 몸을 실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또 잠이 들어버렸다.
거의 인권침해 수준이군요
스타들과 같은 대접을 바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노동법이 적용되지 못하는 현실이 참 착잡하네요
티비에서 보이는 브라운관 이면엔 이들의 혹도한 노동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