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지켜보다 >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우리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대번에 ‘신병’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게다. 아니. ‘신병’이라는 건 무당이 될 사람들이 신내림을 받기 전에 이유없이 아픈거라니까, 신내림하고 하등의 상관이 없는 나에게 이런 병은 아마 ‘귀신의 조화’ 쯤 되지 않을까. 처음엔 그저 가슴이 답답한 정도에 불과했다. 나야 자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니까 두껍고 무거운 이불을 돈 들여 가벼운 이불로도 바꾸어보고, 브래지어도 끌러 놓고 자고 하는 게 처방의 전부였다. 그냥 몸이 좀 지쳐서, 좀 피곤해서 그러려니 치부 해 버린 게 실수였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손이 저렸다. 저린 것만이 아니고, 가끔 마비도 되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자다가 손만 막대기처럼 되어버린다니, 코끝이 가려워 긁으려다가 잠이 황망히 깨어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병원에 가보아도 별 소용은 없었다. 여덟 군데가 넘는 병원에서 그저 일종의 신경증이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정신병자 비슷한 취급을 받기 보다는 그냥 이대로 참고 지내다 보면 나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살아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꼭 한 달 전부터 발작이 시작되었다. 마치 침대 밑에 진동모터라도 달아놓은 듯이 온 몸이 흔들렸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침조차도 제대로 넘길 수 없었다. 그런 진동은 내가 침대위에서 까무러친 후에나 멈추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야속하게도 너무나 말짱해졌다. 처음의 증상으로부터 지금의 증상이 있기까지 꼭 여섯 달이 걸렸다. 여섯 달 만에 밤만 되면 나는 잠자는 걸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미친 여자가 되어버렸다. 삼 주 전. 각성제로 깨어있는 시간이 결국 70시간 가까이 지속되고 나서야, 가족들에 의해 까무러친 채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고, 가족들은 심각하게 나의 정신과 치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된 상담선생님에게 나는, 지난 여섯 달의 사정과 그 전에 내가 가족들에게 진심을 담아했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있는 그대로 해내었다. 일곱 달 전 쯤, 나는 악마 같은 사람을 사랑했다가 실연을 당했었더랬다. 그 때 내 뱃속에는 생겨난 지 사 주 쯤 되는 생명체가 들어있었고, 가족 모르게 절친한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가서 그 생명체를 없애버렸었다. 그 즈음부터 방에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예민해졌다. 꼭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 무서워서 거울조차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내가 없애버린 아기가 나에게 건 저주라고 생각했다. 악마같은 사람을 닮은 악마같은 생명체가 악마 같은 제어미에게 내린 저주라고... 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누군가 시퍼런 눈매를 번뜩이며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생명을 내 손으로 없애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미 제정신으로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없을 꺼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덕분에 깊어지는 죄의식에도 없애버린 그 생명체에 대해 사과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하...하... 그러고 보면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 걸 보니, 내가 한 예상은 정말 잘 들어맞았나보다. 제정신으로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순 없을꺼라고... 그럴 꺼라고...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가족들에게 나의 상황을 이실직고 해야했고, 스물 일곱 평생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찌검을 당한 후에야,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잠을 자고, 발작을 하고, 까무러치고, 가족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고... 이렇게까지 되고 나서야, 상담 선생님을 뵙는다고... 그렇게 말했더랬다. 무테 안경인대도 안경에 가려 눈빛이 별로 보이지 않던 첫 번째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죄의식이 너무 깊어져서 일시적으로 육체에 일어난 변화라고 설명해주었다. 여러 유망한 학설까지 언급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허탈했다. 그건 한 석 달 전 쯤 내가 다니는 대학 도서관을 이 잡듯 뒤지며 읽었던 책의 내용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번은 발작이 심해져, 이틀 정도 깨지 않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더랬다. 병원에도 이젠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체면구구한 부모님께 입원치료를 설득했다. 시집갈 나이가 꽉찬 딸의 혼사길이 막힐까 엄마는 한사코 말렸지만, 결혼한 언니가 엄마를 결국 설득시켰다. 이 주 동안... 나는 세상에서 잠이 이토록 달콤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두 번째 상담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은 10시간 이상을 깊은 잠에 푹 빠질 수 있게 해주었다.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그 약 한 알이면, 날 지켜보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잠이 들 수 있을꺼란 확신이 들었다. 이 주 간의 입원치료 중에는 발작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밥도 많이 먹고, 얼굴빛도 많이 좋아졌었다. 병원은 아파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건강해졌다. 따라서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고, 몇 가지 문진이 끝난 후엔 너무나도 간단히 퇴원조치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상담 선생님은 먹던 약과 같은 것을 일주일치 처방해 주면서 일주일 후에야 다시 상담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다시 나는 내 방, 이 숨막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 서슬이 퍼런 눈매는 이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어딘지 모르지만,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병원에서 이 눈빛을 느끼지 못한 것은 분명 여게 나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일게다. 하지만 이번엔 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정말 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지켜보는 느낌에 지지 않고, 푹 깊고 깊은 잠을 자서 이기고 말 것이다. 이 저주를 반드시 이겨보이고 말 것이다. 펄럭. “이걸 어째야 할지 모르겠군...” 담배를 피워 문 이형사가 꺼칠한 턱을 문지르더니, 종이 한 장을 맞은 편에 내밀었다. “이거 봐. 결국엔 너희 때문에 한 여자가 죽었다구. 개연성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지, 너흰 임마... 살인자야...” 이형사는 삼 일 전에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죽은 여자의 방을 보러 나섰었다.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 자살사건에서, 이형사는 침대 머리맡 창문틀에 정말 작게 뚤린 구멍을 발견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던 이형사는 결국, 아파트 1층에서 3층까지 연결된 노란색 가스배관 뒤 검은 색의 얇은 전선줄을 발견해냈고, 바로 두 층 아래 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두 남자 고등학생이 몰카로 이 여자의 방을 훔쳐보았다는 걸 밝혀냈다. 어찌된 일인지 이 두 놈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이 그 방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여러 달 전에 우연히 한 남자와 그 방에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서 설비를 장치한 일이며, 여덟, 아홉 차례에 걸쳐 녹화를 한 사실까지... 증거로 그 방에선 그만큼의 비디오테잎이 발견되었다. 취조실 이형사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두 남학생은 이제야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았다는 의미보다는 처벌 후에 부모님과 학교에 돌아가면 자기들에게 찍힐 낙인의 두려움 때문인 듯 연신 훌쩍이고 있었다. 이형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취조실 문을 나섰다. 예민해도 너무 예민한 여자. 어떻게 자기를 지켜보는 눈길을 알아차린걸까. 그저 우연의 일치였단 말인가... 이형사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책상 앞에 놓여있는 8미리짜리 캠코더를 만지작거렸다. 가슴팍에 달린 포켓에서 담배곽을 꺼내어 이형사는 라이터도 없이 피우던 담배에서 새 담배로 불을 옮겨붙인다. 피어나는 연기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이형사는 캠코더의 모니터를 펴고 앉아 무심코 작동시켜 보았다. 잠시 지지직 거리던 화면에 거울 앞에선 여자의 나신이 보였다. 죽기 직전, 아마 각오를 다지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라도 짓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여자는 거울 옆 서랍장 위에서 약병을 집어들어 뚜껑을 열고는 물도 없이 알약을 집어 삼킨다. 두 번째 상담 선생님이 처방해 주었다는 약을 이 여자는 미리 여러 루트를 통해 구해 놓았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고정시켰던 핀을 뽑자 긴 생머리가 여자의 빼빼마른 어깨 위에 풍성하게 드리운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6개월 여 동안 무려 15킬로그램 정도가 빠졌다고 했다. 혼자 걸을 힘조차 없었겠지... 여자는 침대 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불깃을 여민다.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드는 것 같다. 죽음의 잠을... 이형사는 그 모습을 측은히 바라보다 스톱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형사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침대위에서 푸르스름한 뭔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은 것이다. 아기가 뱃속에서 다 커서 태어나면 저만할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 손의 주인공은 섬뜩한 눈빛으로 이쪽을 쏘아본다. 이형사는 너무나도 놀라 새로 산 운동화 위에 떨어진 담배를 다시 주워들 수가 없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super2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