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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서가 위서로 의심받는 열가지 이유
게시물ID : religion_190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qing香
추천 : 1
조회수 : 77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3/09 11:07:24
1. 일단 베드로의 아버지가 누구냐로 까보자.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다. 예수가 그를 반석이라는 의미로 베드로로 부르면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부였으며 서기 64~67년 경 순교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 하다.

근데 이상한 것은 신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성경에서 조차 베드로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요나의 아들로(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1:42, 21:15-17)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이라면서 왜 사도의 아버지에 대해서 조차 틀린 것일까? 그게 전지전능한 신의 영감이라는 것인가? 

결국 후대에 작성 된 것을 이리저리 짜 모으다 보니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특히나 구약의 다니엘서나 신약중 베드로서는 위서로 보이는 증거가 특히 많다

그 위서를 실어 놓은 성경은 과연 믿을만 할까? 그런것이 신의 말씀? 정경일 수 있을까?


2.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이 베드로서의 저자가 누구냐? 를 살펴보자. 

베드로서 첫 부분에 보면 이 서신의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1:1 전반)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왜 베드로서의 저자가 누구냐로 논쟁이 생기는 것일까? 일단 경위를 알아 보자.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이 베드로라고 밝힌 점(1:1)과 실루아노에게 대필시킨 것이라고 한 점(5:12)과

이 서신 마지막 문안 부분(5:13)에 언급된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 저자 곁에 "내 아들 마가"가 있다고 한 점 등으로 인해 쉽사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a. 고펠트(L. Goppelt) 는 베드로서가 소아시아(터키등) 교회들에 관한 권면들인데

실제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와 연관이 없는 인물이며 유대지역이 주 활동지역 이었다는 것이다.(소아시아 지역은 주로 바울의 담당 이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지역에 별 영향이 없던 베드로가 베드로서 처럼 이지역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b. 슈라게(W. Schrage)는 베드로서가 바울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베드로의 사상과 상이한 것이다. 

바울의 사상처럼 예수부활이 종교적 희망이 되며 바울의 다른 서간처럼 믿음이나 은혜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특히 에베소서나 로마서와 같은 바울의 저서와 일맥상통하는 구절이 많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바울 서신을 잘 아는 사람이 베드로의 이름을 차용해 작성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c. 또 베드로는 중년까지 어부로 살아서 학식이나 교양은 없는 사람인데

베드로서는 매우 수려하고 문학적인 문장과 매우 세련되고 유창한 희랍어로 씌여져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이고 아람어를 사용했다. 예수도 아람어를 사용했다.) 

아마 베드로는 희랍어를 거의 몰랐거나 초보적인 수준으로만 구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d. 베드로서에 인용된 구약의 내용이 희브리어 구약이 아닌 희랍어(헬라어) 구약에서 인용 되었다는 점

따라서 희랍어를 잘 모르는 베드로가 희랍어로 된 구약을, 그것도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완벽하게 인용, 사용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

e. 슈라게(W. Schrage)는 베드로서에 헬레니즘의 사상이 진하게 묻어난다는 점을 꼽는다.(2:11에 보이는 인간론이 헬레니즘 사상과 연관이 깊다) 

따라서 베드로서는 헬레니즘에 정통한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한다.

f. 베드로서에는 예수의 생애나 교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직접 옆에서 예수를 모시던 베드로가 썼다면 아마도 예수에 대한 언급이 몇번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를 직접 보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1:8), 예수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다는 증언을 하기는 했으나(5:1), 증거로는 충분한 것이 못 된다. 

g. 저자가 자기 소개에서 "나는 함께 장로 된 자"(5:1)라고 하였는데 

사도와 장로의 의미가 엄격히 구분되던 시대이므로 저자가 사도였던 베드로라고 보기 어렵다.

(사도는 예수에게 직접 임명 되어야 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자로 그 자격이 매우 엄격했다. 따라서 사도인 자가 자기를 장로로 부를 이유는 없다. 

때문에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은 사도자격을 얻기 위해 환상에서 예수를 보았고 자기를 선택 했다고 사기를 치기에 이른다.)

h. 베드로서는 4세기까지도 성경으로 채택하는 문제로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어 온 서간이다

만약 대필이라도 베드로의 저서가 명백하다면 초기 교회에서 정경 채택 여부 문제로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서가 등장하는 시기도 3~4세기로 매우 늦은 편이다. 

i. 베드로서에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를 멸망시킨 로마를 저주하며 바벨론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오는데(5:13),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른건 서기 70년 이후 부터다.(로마가 유대를 멸망 시킨게 서기 70년 이므로)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베드로는 서기 64~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순교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서기 64~67년에 죽었다는 베드로가 로마에 의한 유대멸망 이후인 서기 70년 이후 쓰이기 시작한 명칭을 자기 저서에 넣을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 적어도 가톨릭은 사실을 인정하고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래도 믿어라" 라고 하는 면에선 도찐개찐이지만.)

  누가 썼나요? 

베드로 전서와 후서 첫머리에는 각각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집필했다고 나와 있어요(1베드 1,1; 2베드 1,1). 그래서 사도 베드로를 이 두 편지의 저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에는 이름있는 사람을 저자로 내세워 집필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초대교회에서도 이 두 편지의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어요. 먼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베드로 전서를 인용했었다고 밝히면서,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논란은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오리게네스는 베드로가 남긴 편지 한 통은 공인되었지만, 두번째 편지는 의심스럽다고 밝히고 있어요. 예로니모 또한 베드로가 공동서간이라고 불리우는 편지 두 통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대체로 베드로 전서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에요. 
오늘날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 문장도 세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베드로 전서를 베드로의 친서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요. 베드로 후서 또한 사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유다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 친서가 아니라고 봐요.

  언제 쓰여졌나요?

각 서간이 담고 있는 상황과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집필연대가 달라져요. 베드로 전서는 5,13에 ‘바빌론’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로마 당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70년 이후에 집필되었어요.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로마는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빌론과 동일시되었거든요. 그리고 125년경에 파피아스가 이 서간을 인용했던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를 넘지 않았을 거에요. 대략 70-92년경에 쓰여졌다고 보아요. 반면에 베드로 후서는 바오로 서간들이 널리 알려져 권위있게 받아들여지고 또 사도성의 기준이 드러나기 시작한 2세기 초쯤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늦게 쓰여진 성서에요. 그런 만큼 초대교회에서 2세기의 교회로 전환되는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어요.


이러한 위서들을 종교 서적이라고 하여 아무 생각없이 인용하거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엄연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며, 그런 행동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출처 오유 종게
성 김대건 성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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