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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넓은 의미로 예술까지)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편견?
게시물ID : sisa_191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혜나아빠
추천 : 2
조회수 : 28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6/01/05 12:19:49
먼저 말씀드면 얘기가 두서없고, 논점도 정확하지 않으며, 불특정 누군가에게는 머리만 아프게 할 것이며,
어쩌면 점심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욕을 얻어먹을지도 모르는 글입니다. 이해하실 분만 해 주세요.

귀연이씨의 '시'가 '時'인가? 아닌가? '소설'이 '小說'인가 아니가? 의 논쟁.
또는 그에 앞서 이젠 조금 진부해지긴 했지만 문희준의 음악적 장르가 '락'인가 'Rock'인가 아닌가?의 논쟁.
때론 밤 11시를 전 후하거나 주말 오후 5~6시만 되면 거의 모든(이라고 해봤자 3개 밖에 안 되는)지상파 
방송에서 쏟아내는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또는 말꼬리잡기 아니면 상대방 '쫑코'주기가 단순하게 '재미'만 
있으면 그만인건가? 아니면 '諧謔'이 있어야 하는가?의 논쟁까지.

이 모든 논쟁에서 옹호론자(귀연이와 문희준과 오락프로그램을)들의 주장은 그것을 '시'와 '록'과
'재미'라고 부르는 것이 왜? 문제인가 하는 것이며, 그 것이 문제인 이유는 무엇이냐?는 반론이고,
반대론자들의 논지는 그것은 '형식'에서 '완전성'에서 그리고 '사회성'에서 다분히 부족한 점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해소되지 않은채 무비판적으로 '시'와 '록'과 '재미'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의제로부터 시작해서 지금부터 하고 싶은 얘기는 양측의 주장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왜? 이러한 논쟁이 중요한가에 대해서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정말 주관적인
얘기일수도 있겠지만 늘 객관성은 논리적인 주관성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할 때 내 얘기가 또 다른 반론과 
의견을 거쳐 객관성으로 거듭나길 희망해 본다.

사회가 생산해 내는 문화 - 예술은 그 것이 소비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귀연이나 문희준이나 오락프로그램이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지 않는 문화라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뿐더러 논란의 꺼리가 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과 관점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국한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에 소속된 개인은 완전히 분절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철저하게 관계의 사슬로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로까지, 더 나아가 '우리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로움'이나 '고독'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겠지만, 그로 인한 이유없는 폭력은 바로
불특정한 누군가의 문제로까지 확대되며, 가끔은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기도 한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나, 봥화사건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소비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국한될 수도 있지만
소비를 통해 이어지는 관계의 끈을 잡아당겨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소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문화적인 소비는 정신적인 무형의 소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집안에 틀어박혀
'읽고', '듣고', '보는'소비가 도데체 나 아닌 누구와 연관지어 질 수 있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읽고', '듣고', '봤던'사람들이 형성해 나아가는 의식과 정체성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문제보다
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회적 문제를 야기 할 수도 있게 된다. 단순히 읽는 차원의 '도덕'교과서가
어떻게 국민의식을 획일화하고 이념을 통제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사회적 연대성을 생각했을 때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나'에 치중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더욱 다가갈 때 그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만족스러움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
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만능적인 의식보다 연대주의, 이타주의, 자연친화적인 의식이 더욱 중요하다
는 것을 서른의 강을 건너 마흔의 어귀에 다다라 가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
식'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 바로 '읽고', '듣고', '보는' 것이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문학'과 '음악'이며, 현대사회의 '대중매체'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다시 처음의 의제로 돌아가 왜? 귀연이와 문희준과 오락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를 해야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소비했을 때
충분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쟁과 비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꼭 그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닌 우리모두가 하나의 객체임과 동시에 전체를 구성하
는 부분이라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누구나 조금씩은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뼈아픈 성찰과 반성, 깊이있는 내면의 울림과 사회에 대한 일갈, 충분한 시간을 거쳐 심사
숙고해서 토해내는 말들이 우리의 일상처럼 될 순 없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충분히 어렵다는 것을 알
고 있기에 우리들 주변의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자세를 매 순간 요구할 수 없고, 그래서 그런 것을 느끼
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많은 그 대상이 많은 사람들
이 '읽고', '듣고', '보는' 것들로 확장된다면 이러한 '진정성'에 대한 결여가 왜? '나쁜가'에 대해 충분
히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것들(귀연이의 시와 문희준의 음악과 선정적인 오락프로그램 등)을 소비하는 주된 층이 현재
의 청소년이라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욱 심각하게 논의해야 하고 '좋다', '나쁘다'의 차원을 벗어나 '옳
고', '그름'에 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에 
우리사회를 지탱해야 하는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현재 '읽고', '듣고', '보
는'것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의식으로 자리할 것이며 그 
의식이 우리사회의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기여 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러한 문화를 소비하는 주 층은 청소년일 수 있지만 그것을 생산해 내는 것은 어른이
라는 것이다. 그들 - 어른은 문화적 순수함보다는 눈 앞에 이윤에 더 집중할 뿐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내
는 문화예술이 갖는 사회적 문제점을 고민하기 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효용이 먼저라는 것이
다. 가끔은 그 상술에 귀연이씨나 문희준씨 그리고 많은 연예인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 지금을 반추해 볼 때가 됐을 때 그들 역시 그 때의 자신을 조용히 타이
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자녀들이 조금 더 진지한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부족한 글인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는 것에 무조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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