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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협 직전의 오스트리아
게시물ID : history_191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3
조회수 : 124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12/25 22: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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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협의 주역 언드사이 줄러입니다.

대타협 이전 제국 정부는 그동안 견지하던 현상 유지 정책을 더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는 일련의 위기로부터 비롯되는데, 특히 1859년 5월 3일부터 시작된 피에몬테-사르데냐,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이습니다.

제국은 마치 나폴레옹의 저주(...)가 있는거 마냥 다시금 이탈리아에서 마젠타에서의 대패, 솔페리노에서의 패배를 겪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3세의 변덕 혹은 두려움 (유럽의 질서가 급변할 수 있겠다는) 덕분에 사르데냐-피에몬테를 배제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평화조약으로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된 롬바르디아 지역을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할양해야 했고 이는

제국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후 혼란에서 제국 정부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1860년에 '10월 문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에 연방체제로의 전환을 검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독일계 정치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10월 문서를 대체하기 위해 2월 헌법이 공포되고 이 헌법에 의해 의회가 소집됩니다.

343명의 의원이 선출되었고 이중에 체코지역에서 54명이 배정되었는데 체코인 의원은 단 22명이었습니다.

이는 3계급 선거 때문인데, 자산, 주로 납세액에 따라 세단위로 구별지어서 대리인을 선출하게 했는데, 1계급에서 3계급으로

가면서 선출인원이 격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독일계의 제국의회 내에서의 발언권 및 영향력은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이는 특히 체코계의 불만을 삼니다.

그러나 체코계는 의회 등원 거부등 비교적 소극적인 저항으로 일관했는데 이것은 중부유럽에서 세력분포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체코계의 리더였던 팔라츠키가 누차 저서 및 연설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제국 내 슬라브 민족의 취약성 때문이었습니다.

제국 내 슬라브 민족이 독립할 경우 이는 필연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거나 혹은 일부로 흡수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체코계 지도자들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딱히 선진적인 이미지나 상식적, 합리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있는 러시아지만, 이시기에는 정말....1861년까지 농노가 존재하기도 했고, 더욱이 가까운 폴란드에서 

러시아가 하는 억압을 체감하던 것도 체코 지도자들의 이런 개념에 일조합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내리는 듯 일련의 자유주의 기조를 채택하자 대러시아 관념도 급변하게 됩니다만

다들 아시다시피 알렉산드르 2세는 무정부주의자들 손에 비명횡사하면서 러시아의 자유주의 개혁도 종결됩니다.)

그렇기 떄문에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계 지도자들은 연방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제국의 양보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850년 말부터 제국 내부의 엘리트들 특히 독일계와 헝가리계 사이에서 논의되던 이중체제로의 전환이 점차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체코계를 비롯한 슬라브계 지도자들의 위기감도 고조됩니다.

이런 이중체제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위를 상속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보헤미아 왕위가 신성로마제국 황위에 

딸린 부속품 같은 취급이었다면 헝가리는 어쩃든 신성로마제국 외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개념에서는 자유로웠습니다.

이런 이중체제로의 전환은 슬라브계 특히 헝가리인의 지배하에 놓일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투쟁의식을 심어주게 됩니다.

이런 의식은 위에 있는 언드라시 백작 같은 헝가리 엘리트들이 이중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시 자신들의

영역안에 위치하게 되는 슬라브계를 '자의적'으로 통치하겠다고 공공연히 언급하면서 더욱 심화됩니다.

물론 헝가리인들은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강력한 헝가리화 정책을 추진하는 등 실제로 아류 제국주의적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계와 슬라브계와의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합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이런 갈등을 적극 활용하고자 제국내의 체코계 지도자들에게

베를린이 체코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합니다.

체코계 지도자들은 이런 제안 후에 비교적 젊고 강경한 쪽과 나이가 많고 온건한 측으로 분열됩니다.

강경파가 범슬라브주의를 주장하며 자치권 획득, 혹은 독립을 프로이센과 보조를 맞춰 또는 자력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면, 친오스트리아적 슬라브주의를 표방했던 팔라츠키를 위시한 온건파는 제국 정부에

민족간의 사회적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대책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는 특히 1713년의 국사조칙으로 확인된 보헤미아 왕국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즉 이들은 다시금 연방체제로의 전환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에 온건파는 프란츠 요제프 2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어 그를 설득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익 현상유지에 관심이

깊던 황제는 이들의 설득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제국 내 다수인 슬라브계에 의해서

제국이 슬라브화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했다고 추정됩니다.

하지만 전쟁 패배로 새로운 내각 -벨크레디를 수상으로 하는- 이 등장하면서 슬라브인들의 기대감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는데

벨크레디가 프라하총독을 역임하는 등 체코, 슬라브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이중체제로의 전환을 반대하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는 체코에서 시행되던 언어강제법-고등학교 혹은 실업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이외에도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 또한 학습하여야 한다는 법-을 제국 전체로 확대하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떄문이도 합니다. 더 나아가 벨크레디는 언어적 동등권이 보장된-필연적으로 국어로서의 독일어의 지위를 약화시킬 것이 자명한-

민족단위체를 기반으로 한 제국의 5원화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제국을 1. 독일-알프스 지역(오스트리아)
                 2. 주데텐 산맥을 제외한 보헤미아 모라비아 지역(주테덴 지역은 독일계가 우세한 지역이므로)
                 3.헝가리
                 4.폴란드-루테니아-갈리치아
                 5.남슬라브 지역
으로 5원화 시키는 것이었는데 역시 문제는 저것이 완벽하게 제국 내부의 민족단위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지역에서

제외된 독일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슬라브계 지도자들은 소슬라브회의를 소집하는 등 기대감을 표출하고 선언문을 발표하여

제국의 5원화 및 연방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히게 됩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러한 슬라브계의 요구를 묵살하고 언드라시 백작을 위시한 헝가리 정치가들과 하던 협상을 마무리 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제국의 1/2이상에서 독일계의 우위 및 지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독일계 지도자들의 소망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타협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ㅠㅠㅠㅠ

아이고...

이 내용은 영문위키 혹은 독어 위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기반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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