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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게시물ID : readers_191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꽃눈
추천 : 5
조회수 : 67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4/10 23:05:55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 
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경주마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도토리 두 알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집인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다시 읽으며, 좋은 시들을 옮겨 봤어요. 

그리고 요새 읽고 있는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에 나오는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혜화경찰서에서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아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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