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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와 영혼과 자아와 뇌. 우리는 기계인가?
게시물ID : religion_19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qing香
추천 : 2
조회수 : 102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6/09 22: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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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일단 사족.

-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토픽이지만,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 이 분야에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있거나 고민해보신 적이 있는 분들께는 "뭐야 다 아는 얘기잖아?" 라고 느껴질 수 있는 수준의 시시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 유물론을 끝까지 밀고 가면 자유 의지, 영혼, 자아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미 이 과정을 다 거친 분이라면 상관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는 분들이 처음으로 이런 결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 성격에 따라서는 강력한 패배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최대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도록 긍정적인 이야기들도 되도록 삽입하긴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멘탈이 약한 유물론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미리 말씀드려둡니다.


0. 들어가기에 앞서 몇몇 단어의 정리.

출처는 모두 위키피디아입니다.

자유의지 -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과 관계에서 인간 자유와 자연법칙의 비중을 얼마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
영혼 - 사람이나 동물의 생명을 유지하고 정신을 갖게 한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과학의 범주 밖에 있기 때문에 과학의 범위에서는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과학으로는 존재 여부가 식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과학적인 범위에서의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써 영혼이 존재한다고 증언되고 있으며 인류 역사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와 사후세계 및 영적인 현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자아 - 우리 일상의 모든 경험(감각, 사고, 행동 등)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모든 경험을 하는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을 말한다. 칸트는 본능·욕망에 의해 사는 경험적인 자아 이외에 도덕적으로 살려는 자신(양심)을 신적인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여 '본래적인 자기'라고 불렀다.
의식 - 유물론에서 의식은 고도로 조직된 물질(대뇌피질)의 작용으로, 언어를 이용한 외적 세계의 반영이다. 말 없는 의식이란 없다. 관념론에서 의식은 물질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며,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든가 또는 의식이 낳은 것이 물질이라고 주장하게 되며, 의식이 물질보다 근원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의식이란 일반적으로 대상에 관한 의식이며, 정신작용을 '나'의 작용이라고 자각하는 의식을 자의식이라고 한다.

이 네 단어는 척 보기에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맥상 그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단어를 섞어서 쓸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른 대상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구별해서 사용하겠습니다.

1. 고대의 멋쟁이들.

아직 철학이 고도로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저 네 가지 개념이 큰 구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3500년 전 (1500 BC) 힌두교
아트만 -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목숨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지요. 즉 우리의 몸은 아트만이 머물다 떠나는 그릇 같은 것이고 진짜 나, 즉 아트만은 끝없는 윤회 속에서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변하지도 않는 어떤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은 물질계와 정신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의 시작이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합니다.

2500년 전 (500 BC) 붓다
니르아트만 - 붓다는 이 아트만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 인과율을 통해서 묶여있으니 (불교에서는 인과율을 "인연"이라는 매우 멋진 말로 표현하지요) 그 어떤 존재에도 본성 같은 것은 없고, 생명도 예외가 아닌지라 생명에 주체는 없고 아트만이나 자아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했지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 나는 없다)의 시작입니다. 붓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고 모든 물질은 인과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현대 유물철학은 지난 2 ~ 30년의 연구를 거쳐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 조류는 이후 서양에서도 생겨납니다. 사실 뭐 철학과 종교라도 해도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던지라, Psyche (고대 그리스어로 "숨") 이라는 단어가 영혼의 어원이 되었지요. 다만 서양에서는 순서가 반대였던 지라, 처음에는 psyche 역시 필멸이고 변화하는 존재라고 여겼던 반면에 (스타워즈의 뽀스와 비슷한 개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를 거치면서 영혼은 불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고, 기독교가 서양 세계를 2천 년간 지배하면서 영혼의 불멸성은 절대적인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2. 중세 유럽인의 고민.

인도와 힌두교에 대한 이해가 얕은 관계로 이제 인도 이야기는 빼고, 동아시아와 유럽을 주로 다루겠습니다. 사실 영혼이 인식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만한 이야기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깊게 생각해보면 자아라는 것 역시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철학자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졌었는데, 

"방의 불을 다 끄고 소리도 끄고 눈을 감고 이제 당신들이 말하는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해보세요. 시간을 오래 보내면 보낼수록, 자아라는 것 역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옛 선인들은 그런 사실을 깨닫고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나마 동양은 유교와 불교가 번갈아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장하면서 일반 대중들도 "무아" "무상" 등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살았습니다만, 서양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단 하나였던 관계로 기독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영혼이나 자아의 문제에 회의를 일으킨 난다긴다하는 지성인들도 결국은 어떻게든 주류 철학과 자신의 회의를 조화시켜야만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우구스투스 -> 고백록 쓰고 기독교에 항복
"자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몸속에 있는가 아니면 영혼 속에 있는가?" 파스칼 -> 팡세 쓰고 기독교에 항복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지요. 하지만 영혼이라든지 비물질적인 정신 등등의 개념에는 재미있는 역설이 있는데, '우리가 영혼을 인식할 수 없다면 애초에 영혼이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라던지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정신이 어떻게 물리세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우리 뇌에 존재하는 송과선이 정신세계와 물리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한 거지만 송과선 이론은 아무런 논리나 실증적 근거가 없이 그냥 '송과선이 이 역할을 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하니까 송과선이 이 역할을 해야 함'이라는 식으로 갖다 붙인 것이었고, 현대 신경 과학을 통해서 간단히 부정되는 이야기입니다.

3. 신경 과학이 이룬 근래의 발견들.

신경 과학이라고 하면 많이들 20세기에나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신경을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지요. 

17세기에 이미 토마스 홉스는 '가슴은 펌프에 불과하고 신경계는 끈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라는 것은 우리가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때로는 좋아하고 때로는 싫어하는 반응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18세기부터는 정신이 대뇌의 물질 작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설에 힘을 주는 과학적 발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데이빗 헉슬리는 '뇌가 손상을 받으면 인식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인식이라는 것은 혹시 신경계를 타고 다니는 어떤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이원론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뇌의 일부인 척수 신경의 동작 원리가 인간과 하등 동물 사이에서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면술이나 몽유병 환자의 관찰 등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토마스 헉슬리 등의 과학자들로부터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우리가 의식이나 자아라고 믿는 것은 뇌가 만든 log file 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이런 가설들에 더욱 힘을 실어줍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 자기 공명 촬영 기법을 통해서 인간의 뇌를 찍어보면, 의식이 다루는 주제에 따라서 뇌의 다른 부분이 활성화됩니다. 예를 들어서 수학 문제를 풀 때와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뇌의 일부분이 활성화되고 다른 부분은 비활성화되는 식인데, 이 발견이 의미하는 바는 이 글의 0번에서 정의한:

자아: 우리 일상의 모든 경험(감각, 사고, 행동 등)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모든 경험을 하는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을 말한다.

이런 게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뇌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경험하는 곳이 따로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되면 그 특정 능력이 손상됩니다. 전전두엽 피질은 우리의 도덕 개념을 관장하고 편도는 공포와 동정심을 관장하는 부분이라고 알려져있는데, 미국의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의 1/4 정도가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손상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이코패스는 무슨 철학적인 숙고를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도가 손상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 앞에서 최면술이나 몽유병의 예를 들어서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에 관해 더욱 치명적인 관찰은 2007년의 헤인즈의 연구 결과였는데요, 헤인즈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두 개의 숫자를 주고 본인에게 두 숫자를 더하든지 빼든지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의 시계를 보면서 자신이 더하기와 빼기 중 무엇을 수행할지 결정한 시점이 언제인지 기록하게 했습니다. 인간이 더하기와 빼기를 할 때 전두엽의 활성 패턴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헤인즈는, 실험 대상자들의 전두엽 활성 패턴을 측정하여 그 인간이 실제로 더하기를 시작하거나 빼기를 시작한 시점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험 대상이 본인이 결정을 내렸다고 믿는 시점실제로 결정이 이루어진 시점보다 나중이라는 것을 알아내게 됩니다. 이 실험은 이후 빨강/파랑 단추 누르기 실험 등을 통해서 다른 연구 그룹이 다양한 방법으로 교차 검증하였고, 우리의 의식이 뇌의 실제 동작 시점보다 최대 10초나 늦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헉슬리의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과 자아는 log file 이다'라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지요.

4. 자유 의지라는 환상.

의식이나 자아라는 것이 환상이고 인간이 오토마타라면, 당연하게 따라나오는 결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없다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림 A는 전통적인 자유의지 개념도입니다. 자유의지 (WILL) 은 인과율의 바깥에 존재하며 의식 (Conscious thought) 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의식은 무의식적인 신경 작용 (Unconscious neural activity) 를 결정하고, 그것이 우리의 행동 (Behavior) 를 결정하여 바깥의 물질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반대로 물질세계는 유전자, 환경, 양자역학적 임의성을 (GES; Gene, Environment, Stochasticity) 통하여 우리의 신경계에 간섭하고 그 결과는 다시 우리 의식으로 피드백됩니다. 신경 과학계에서 지난 200년 동안 이루어낸 모든 결과물은 A 모델이 거짓임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그림 B는 유물론의 일부 사조에서 자유의지를 합리화하는 방식입니다. A의 모델을 약간 수정하여, 자유의지 역시 신경계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 의식을 조정한다는 모델입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을 양립가능설 (compatibilist; 자유의지와 인과율이 양립할 수 있다) 이라고 하는데, 자유의지가 인과율에 종속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그냥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림 C의 모델에서는 자유의지가 아예 삭제되어 있으며 화살표의 굵기가 반대로 변했습니다. 모델 A와 B에서는 의식이 신경계에게 결정을 통보하고 신경계는 결과물을 보고만 하는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서, 모델 C에서는 신경계가 의식에 결정을 통보 (이 모델에서 의식은 log file)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의식은 가끔 무의식이 지난 기억을 검색할 때에나 사용되는 수준이라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이 현재 신경 과학계에서 주장하는 모델이자 양립 불가능설 (incompatibilist;  자유의지와 인과율은 양립 불가능하다) 에서 말하는 모델이자 제가 믿는 모델입니다. 캐시모어 논문은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5. 유물론과 과학에서 볼 때 자유의지도 없고 의식도 없고 자아도 없다고 치고, 영혼이 있으면 다 해결?

0번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혼은 그 단어의 정의상 과학의 범주 밖에 있기 때문에 과학의 범위에서는 판단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혼을 믿어서라도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고 싶으면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됩니다. 다만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신경 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당신이 (문맥상 사람의 의식) 당신 영혼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는데 그 영혼이 무슨 선택을 자유롭게 하든 말든 그게 당신 자유와 무슨 상관입니까?" 

라는 반박을 했었지요. 저는 저 반박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6. 자유의지도 없고 의식도 없고 자아도 없고 영혼도 없으면 나보고 뭐 어쩌라고?

이런 결론을 내고 나면 사실 꽤 울적한 것이 사실입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진화론의 선구자인 찰스 다윈은 진화론이 자유 의지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긴 말이

"이 사실은 생각을 아주 깊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깨달을 수 없고, 따라서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질 수가 없으니 사회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다소 냉소적이고 진화론부심 가득한 말을 남겼지요. (근데 도킨스는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려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건 함정) 사실 저만 해도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꽤 울적하게 느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자유의지가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거야 약간 과장 섞어서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저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꽤 오래전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문장 한 두 줄로 아는 것과 뇌의 신비가 하나하나 벗겨지면서 새록새록 우리가 오토마타인 것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기분이 좀 다르더라고요.

하지만 저 결론을 다른 태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무신론 (본인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냥 립서비스....) 인 칼 세이건이 남긴 것인데

"우리는 우주가 오랜 시간을 거친 성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기원을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별의 시체에서 태어난 것들이 우주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원자가 모이고 모이고 위로 위로 더 복잡하고 더 복잡하게 진화해서 마침내 의식이라는 특성이 우주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종과 우리 별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꼭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 자체를 위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두 번째는 붓다입니다. 아마 칼 세이건보다 더 유명하지요?

"자아라는 것은 허상이니 자기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모든 타인과 다른 생명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둘 다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선택은 자기 마음대로.



댓글 몇개

허공에삽질
    
13/05/23 07:26
전기과 출신이라 그런지 뇌의 신경회로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신경세포로 구성된 이 신경회로는 정말 그야말로 인간이 접할수 있는 복잡계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스템일것 같습니다. 전공자가 아니라 얼마나 이런 복잡회로의 구조가 규명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뇌의 신경회로의 구조 또는 매카니즘이 아직 신뢰할만한 수준이하로 알려진경우, 이런 복잡한 회로상에서 거시적으로 관찰되는 뇌의 활동(fMRI상에서의 피의 흐름)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과 판단의 유무를 판단하는것이 강한 신뢰도를 가질까요?


나다원빈
    
13/05/23 08:58
엄청나게 복잡한 회로도를 보면 마치 그게 아무 규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회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과 시야가 생기면 그 회로도의 규칙과 패턴을 파악하고 확장시킬 수도 있죠.

현재 인간의 자아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뇌의 행동패턴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파악하게 되는 날 인간의 자아란 것도 단순히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의 행동패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라고 쓰니 댓글에 이미 그런 내용이 수두룩...


피자21
     
13/05/23 09:17
우주가 우주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게 칼 세이건이란 천문학자가 남긴 말인가 보군요.
진짜 처음 들었을때 소름끼치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우리가 기계인지 아닌지는 머지 않은 미래에 실제 체험할 수 있게 될거라고 봅니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해서.. 의식을 컴퓨터로 옮겼는데도 똑같이 자유의지가 있는것처럼 느껴진다면 논쟁의 끝이 아닐까 싶네요.
당연히 그렇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확인된다면 엄청난 충격이겠죠.
근데 이렇게 되면 영생(?)이 가능해지는건가..
출처 http://pgr21.com/pb/pb.php?id=recommend&no=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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