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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어느 시인의 유언
게시물ID : readers_192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12
조회수 : 78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4/14 16:11:30

어느 시인의 유언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손에 땀이 찬다. 깔끔하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신혼 집을 하얀색으로 칠했다. 하얀 벽과 하얀 마룻바닥 그리고 연한 나무 색의 가구들. 앞으로 살게 될 우리의 보금자리를 꾸미면서 나는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지금 들어와 있는 병원도 온통 하얀색 천지다. 웃을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내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었다. 그녀의 친정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도로와 익숙한 터널을 지났다. 나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운전을 하고 있었고 조수석의 아내는 장모님께서 바리바리 싸주신 당신의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한 통을 품에 안고 있었다. 불편해 보여서 뒷자리에 대충 두라고 했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괜찮아.” 빨간 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췄다. 아내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있으면 아이가 태어난다. 나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딸은 아빠를 닮으면 잘 산다고들 한다. 차의 전자시계를 내려다보니 벌써 밤 열 시 오십구 분이었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고 차를 다시 움직였다. 옆에 아내의 배가 살짝 움직인 것 같아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뱃속의 아이가 발을 찼을까. 그리고 아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차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피범벅이 된 아내의 얼굴이었다. 우습게도 고등학교 시절 풋볼을 하다가 공에 잘못 맞아 눈가가 찢어졌었던 친구가 생각났다. 원래 그 부위가 조금만 다쳐도 피가 많이 나는 곳인데 녀석은 피로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사내가 되어서 부끄러운지도 않은지 엉엉 울어댔다. 옆에 계신 체육 선생님께저 죽으면 어떡하죠?”라고 몇 번이고 물으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친구를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친구가 양호실로 실려 간 뒤 나와 다른 녀석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나는 꿈틀거리며 내 배를 만졌다. 아내의 배 위로 손을 뻗기가 무서워서였다. 저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렸을 적에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사 학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여행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고 오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승용차를 들이받은 건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한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돈이 많은 남자였다. 그 아저씨는 언제나 답답해 보이는 정장을 갖춰 입고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나의 부모님과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꼭 라지 사이즈 피자 한 판을 손에 들고서 말이다. 나는 질리지도 않고 그 피자를 항상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병원에서 나오는 급식을 나는 지독히도 싫어했다. 부모님은 피자에 손을 대지 않으셨다. 다만 열심히 먹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사고를 낸 대학생들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어머니의 수술날에 말이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버지의 차를 망가트린 것도 우리 세 식구를 아프게 한 것도 그 사람들이었다. 내가 하루에 세 번씩 맞는 주사를 참을 수 있었던 건, 어딘가에서 그들도 똑같이, 아니 이보다 더 아픈 주사를 맞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쪽, 벌을 받아야 하는 쪽은 우리 가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수술이 끝나고 어머니가 다시 병실로 옮겨지셨다. 아버지는 물리치료 중이셨고 병실엔 나와 어머니 둘 뿐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그녀는 시든 안개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나는 냉장고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 남겨 두었던 피자를 전부 꺼냈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피자를 먹는 나를 보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피자를 먹는 나를 보던 그 아저씨도 떠올랐다. , 하고 쓰레기통에 거하게 침을 뱉었다. . . . 욕을 뱉듯이 그렇게 계속 침을 뱉었다. 기름진 냄새가 역겨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병실에서 링거를 맞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새하얀 시트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집에 돌아가면 페인트칠을 다시 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하늘색은 어떨까. 똑같이 생긴 침대가 여섯 개나 놓인 이 방에는 나밖에 없었다. 벽에 걸린 은색 테두리의 동그란 시계가 보였다. 초침도 없고 숫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대충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니 몸이 욱신거렸다. 맞다. 나는 환자였다. 링거액이 가득한 봉지를 올려다봤다. 한 방울 한 방울 느리게 떨어진다. 링거액이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보고 싶다. 왜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있지 않는 것인가. 한정된 가능성들과 무한한 상상력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병원에 속한 모든 것들은 말이 없다. 나는 그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간 그렇게 침대 위에 가만히 있었던 나는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를 찾아보기로 했다. 지금껏 의사도 간호사도 병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걸려 있던 링거 봉지를 내려 한 손에 들고 걷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기 전에 다시 시계를 봤다. 아직도 열한 시 즈음이었다. 나는 어쩌면 지금은 내가 알고 있는 열한 시 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창문 밖에는 달도, 해도 보이지 않는다. 사고가 난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안내 데스크를 발견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다른 층으로 가보자. 출입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곳은 분명 일 층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들 위로는 이 병원의 구조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었다. 이곳은 삼 층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수술실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응급 수술실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위치는 일 층이다. 아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애써 참아왔던 큰 한숨을 쉬었다. 아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의 버릇이다. 담배가 고팠다.

일 층에 도착해 응급 수술실을 찾았다. 다행히도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찾아왔다. 수술실 입구 위를 보니수술 중에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다. 나는 무작정 그 수술실 안에 있을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마음먹었다. 가까이에 벤치가 있기에 그곳에 앉았다. 앞 쪽 벽에는 시계가 걸려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술실 앞에 시계를 걸어 놓은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병실에서 본 것과 달리 숫자가 쓰여 있다. 하지만 초침은 없다. 열한 시였다. 아니, 아직 열한 시가 되려면 일 분 정도가 남았다. 나는 일 분이라는 구멍을 참기가 힘에 겨웠다. 우리가 일 분만 더 일찍 출발했더라면. 그 대학생들이 일 분만 더 늦게 술집에서 나왔더라면. ‘만약이라는 단어가 나를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는 이 냄새를 알고 있다. 피자 냄새다. 어느 불행했던 시인은 죽기 직전에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그 말에 멜론을 사왔고 코앞에 놓인 멜론의 향에 시인은 인생의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피자를 먹지 않았다.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시인은 정녕 멜론을 좋아했을까.


째깍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계는 정각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복도 쪽을 보니 그렇게 찾았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수술실 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린다. 그 움직임이 정확히 일 분이 걸리도록 신중하게 말이다. 때마침수술 중의 불이 꺼진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의사가 한 명 나온다. “축하 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품에 예쁜 아기를 안고 있다. “귀여운 공주님이에요.”

 

피자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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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글은 4년 전에 쓴 단편입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수정을 한 것은 2년 전이네요. 난생처음 쓴 픽션 중 하나라 (아마 세 번째일 겁니다)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지금 보니 고치고 싶은 부분도 많은데, 그렇게 하다 보면 끝이 없겠죠. 한국어로 썼고 번역은 그 다음에 했는데 번역본보다는 원문이 더 마음에 듭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아쉽습니다. 제목을 잘 못 짓기도 하지만요... 혹시 여러분은 좋은 제목을 짓는 노하우가 있으신지.

비평이나 조언 모두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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