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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명군이 조선에 끼친 영향
게시물ID : history_192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6/4
조회수 : 290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1/07 17:34:24
임진왜란때 참전한 명나라 군대를 어느분이 2차대전때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랜드리스(무기대여)에 비교하시길래 기가막혀셔 올립니다.

명의 참전은 군사적 필요라는 측면보다, 몽진으로 인해 추락한 선조의 정치적 위상제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임란이 장기화되자, 선조는 17만명이 넘었던 조선군을 축소시켜 3만 5천명 수준으로 줄이고, 명에 그 역할을 맡겼습니다.

군대를 축소하여 그 자원들이 고향에 돌아가 재건에 나서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이반된 민심이 본인에게 창칼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서 대규모 자국육군을 유지하는것에 불안해했고, 명군을 구원자로 포지셔닝해서, 그런 명군을 불러온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죠. 실제 선조는 명군이 업적을 쌓을수 있게 계속해서 기회를 줬습니다. 심지어 지휘권까지 넘겨주면서요.

http://majestyperson.com.ne.kr/imjinpercent01.htm
임란기간 동안 명이 참여한 전투는 8차례 뿐이었고, 승리한 전투는 4차 평양성 전투 한번 뿐입니다.
명이 조선에 끼친피해 ( 약탈, 민간인 살상, 왜군공격 방해등 )를 감안하면, 명이 과연 임란에서 도움을 준게 맞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특히 수군같은 경우는, 전투선 자체가 판옥선보다 작고 내구성이 떨어져서, 실제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1420554553143.png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n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A4%91%EA%B5%AD+%EA%B5%B0%EC%9D%B8+%EC%9D%B4%EC%A2%85%EC%9D%98
선조 9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8월 7일(을축) 6번째기사
중국 군인 이종의의 강간 미수 및 살인 사건에 관해 한성부가 보고하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당일에 도착한 중부 주부(中部主簿)의 첩정(牒呈)에 의하면 ‘이달 6일 밤에 사노(私奴) 세형(世亨)이 공초에 「한 여인이 흰 옷을 입고 지나가는데 중국인이 붙잡고 강간하려 하였다. 그 여인이 끝내 항거하며 따르지 않자 중국인이 노하여 칼을 빼어 들고 여인의 볼과 목을 찔렀으며 또 세형의 14세 되는 동노(童奴) 맛산[末叱山]의 머리를 베어 손에 들고서 횡행했다. 」 하였다.’ 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na&pos=7&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9C%A0+%EC%A0%9C%EB%8F%85+%EC%A0%91%EB%B0%98%EC%82%AC+%EA%B9%80%EC%88%98
선조 103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8월 1일(갑인) 4번째기사
유 제독 접반사 김수가 중국군의 민폐에 대해 치계하다

유 제독(劉提督)의 접반사(接伴使) 김수(金睟)가 치계하였다.
“아문의 각 장수들이 전라도 지방에 도착하여 많은 군정(軍丁)을 조발하여 도처에서 수색하였는데, 머리카락이 없는 자는 모두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병으로 머리가 빠진 자나 승려들 역시 모두 잡혀가 하루에만 무려 수백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를 기회로 중국 군사들이 마을에 출입하면서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심지어는 소녀까지도 강간하였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제독이 그 중에 심한 자를 효수하였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ERIES/335/545623.html
“명군의 기예는 아군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군량을 공급하는 어려움은 배나 됩니다. 만약 또다시 명군을 청하고 그에 맞춰 군량을 댄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조리 아사하여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계사, 갑오년에 큰 흉년이 들지 않았음에도 백성들이 굶어죽어 열 명 가운데 서너 명도 남지 않은 것은 하늘이 이 숫자만 남기고 온 나라의 곡식을 전부 명군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명군에게 준 곡식을 아군에게 주었더라면 10만의 병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과 같이 쇠약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명백한 증험이 되었는데 어찌 다시 똑같은 잘못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1597년 고상안(高尙顔)이 류성룡에게 올린 편지의 내용이다.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 조선 조정이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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