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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고백하는 원나라 시대의 비참한 역사
게시물ID : humordata_19282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5
조회수 : 281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1/11/13 23: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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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력건(信力建)


많은 사람들은 원(元)나라를 중화민족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왕조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청구(淸癯)라는 사람이 쓴 <우리나라가 러시아를 정벌한 전쟁역사의 한 페이지>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원나라 징기스칸의 역사를 읽었다. 몽골에서 일어나서 중원의 주인이 된다. 개국이후, 킵차크, 아수르여러 부가 있었으며, 수부타이에게 명하여 메르키트를 정벌하고 다시 병력을 관전길사해(寬田吉思海, 카스피해)를 우회하여 태화령(太和嶺, 코카서스)까지 갔다. 원태종 7년, 다시 수부타이를 선봉으로 하고, 바투를 따라, 황자 구육, 황질 몽케등이 서역을 정벌한다. 태종 10년에는 대거 정벌전쟁을 벌여서 야열찬성(耶烈贊城, Ryazan 랴잔, 모스크바 남쪽의 도시)까지 밀고들어가고, 모스크바성을 함락시킨다. 태조의 장남인 주치가 그 자리에서 칸의 지위에 오른다. 이는 천고에 없던 일이다. 일대의 영주로 개창때 전쟁을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취하니, 그 병사들의 위력은 세계를 통일하는데도 어렵지 않았다. 역사책을 보면 우역(禹域)이내에 머물고 지금까지 서로 유사(流沙)에 이르고 북으로 끝까지 간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유럽의 내지에까지 밀고 들어가고, 유라시아를 통일할 기세를 보인 것은 우리나라의 전쟁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영예로운 한페이지가 아닐 수 없다. 원나라때의 병력의 창끝은 유라시아의 목구멍을 겨누는데 충분했고, 모든 것을 석권하고 끌어안을 기세였다. 중국의 후세인들의 용기를 일깨워주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원나라는 근본적으로 이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어 식민통치를 한 것이다. 그들의 실제통치행위를 말하자면, 원나라는 한족이 주체가 된 중화민족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왕조라고 할 만하다.


사회를 보면, 원나라는 봉건사회가 아니라 노예사회이다. 원나라가 처한 역사단계는 기껏해야 반봉건반노예사회로 수백년전의 당나라 봉건문명단계보다 훨씬 낙후되었다. 송나라의 인민자유의 경제상업사회에 비하면 더더욱 낙후되었다. 최소한 수백년의 문명발전을 낙후시켰다.


원나라통치자들이 실행한 것은 분봉제(分封制), 공노제(工奴制)같은 전형적인 노예사회의 특징이다. 원나라에는 대량의 "구구(驅口)"(노예)가 아주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이는 원나라가 노예사회라는 것을 입증한다. 개설된 '인시(人市)"에서는 구구를 임의로 매매할 수 있었다. 원나라의 중급관리는 백명이상의 구구를 보유했고, 대사장(大使長, 노예주)의 구구는 왕왕 수천수만이었다. 쿠빌라이의 총신인 아하마는 7천여명의 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구구는 노예로 인신의 자유가 없고, 주인의 사유재산이다. 구구는 사장에게 조(租)를 바치고 국가에 부(賦)를 내야 했다. 원나라의 법률에는 "구구는 돈이나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한다. 주인은 임의로 매매하고 증여할 수 있다. 주인이 죄없는 구구를 죽이면 장87대이고, 양인이 다른 사람의 구구를 죽이면 장107대이다. '구구' 한 명을 죽이면 소나 말을 죽였을 때의 형벌과 거의 비슷하다. 원나라때 전호(佃戶)의 지위는 극히 낮았다. 원나라의 법률에는 이렇게 규정했다: "주인이 전호를 때려죽이면 장107대이다" 원나라는 자유신분의 농민도 농노의 운명으로 전락시킨다.


원나라는 법률의 형식으로 적나라하게 각민족의 불평등을 선언했을 뿐아니라, 적나라하게 동종인들도 극도의 불평등함을 선언한다. 중국의 북방은 3등공민이다. 역사서에서 말하는 그 "한인(漢人)"이다. 이것은 역사서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 배후의 이야기는 역사가 말하지 않는다. 몽골인들이 어떻게 한인을 통치했는가? 필요한 군사역량과 진압도구(감옥)을 둔 이외에 최하층의 모든 마을에는 하나의 몽골가정을 파견하여 전체 마을의 한인을 다스리게 했다. 한족 여인이 결혼하려면, 반드시 몽골인의 남자와 3일을 자야 했다. 문언문으로 말하자면 한족 여인의 초야권은 몽골인에게 있었다. 한족노인은 60세가 되면, 반드시 들판으로 보내어지고 묘혈 속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이 모혈은 바로 노인들이 말하는 "전타묘(塼打墓)"이다. 이를 보면 몽골원나라시대의 중국인들은 가장 굴욕적이고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어느 후안무치한 '애국'역사전문가가 자랑하는 것처럼 '강대무비하고 유라시아에 위력을 떨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통치조치에서도 원나라는 더할 수 없이 암흑이었다: 한족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5가(家)의 한족들은 요리칼 1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요리칼도 몽골인의 집에 두었다. 몽골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족인은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족인들은 습관적으로 이들 몽골인 남자를 "노조야(老竈爺, 조는 부엌이라는 뜻임)"라고 불렀고, 몽골인 여자는 "노조내(老竈奶)"라고 불렀다. 이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부엌에 걸어놓고 새해가 되면, 이들 몽골인들은 현성으로 가서 전체 마을의 상황을 보고한다. '노조야'가 '위에 좋게 말해주도록' 하기 위하여 음력 십이월 이십삼일,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몽골인의 집으로 보냈다. 이를 "제조(祭竈)"라고 불렀다. 만일 농촌에 가서 '노조야'와 '노조내'의 화상을 볼 기회가 있다면 그림 속의 인물들이 몽골인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나라의 한민족에 대한 잔혹한 통치는 심지어 침상으로까지 확대된다. 몽골인들이 정복한 기간동안 한인과 다른 각 소수민족백성의 신부의 첫날밤은 반드시 몽골인과 지내야 했다. 굴욕적인 초야권으로, 당시의 한인들은 결혼후 첫째 아이는 낙태시켰다. 첫째 아이를 낙태시키는 습관이 생긴 내력이다. 한족의 조상들은 어쩔 수 없지만, 굳건한 방식으로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원나라통치자들의 한인에 대한 살육은 더욱 심했다. 몽골인들은 한때 중국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한 바 있었다. 논밭은 모조리 목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만일 야율초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납세'의 공능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당금 천하에 중국인의 흔적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비록 그러했지만, 몽골인들은 여전히 몇몇 대성(大姓)을 도살하는 정책을 실행한다. 쓰촨에서 일찌기 수백만명을 죽여버린 바 있다. 몽골인들의 통치는 중국사회를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한인, 남인은 천민이었고, 재산은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었고, 처자식은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었으며, 생명은 마음대로 죽여버릴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심지어 성명조차 없었다. 그저 출생일시를 이름으로 삼았고, 무기를 가질 수도 없었다. 몇 집이 요리칼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인의 살륙과 통치하에 중국인구는 급감한다. 1223년(남송 가정16년), 남송의 인구는 7,681만이었다. 여기에 금나라의 인구를 합하면 총인구는 1억이 넘었다. 그런데, 1278년 남송이 멸망한 후 12년이 지난 1290년에 이르러서는 면적이 훨씬 넓었던 원나라의 인구가 겨우 5,883만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면 살륙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알 수 있다. 중국의 문화는 몽골인의 침입과 통치로 쇠락한다. 몽골인들은 한때 산동 연해일대에서 매년 여름가을교체기에 바다에 마을의 한인들을 던져넣어서 한인의 인구증가를 통제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원나라는 중국역사상 무력이 가장 강한 왕조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원나라가 중국역사상 무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오해이다. 커다란 인식의 착오이다. 원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킨 후 신속히 타락하고 부패한다. 부패,타락정도와 속도는 청나라의 팔기자제보다 지나치면 지나치지 못미치지는 않다. 쿠빌라이는 멍청했다. 일본, 자바에 대한 토벌은 모두 마음만 있었지 힘이 미치지 못했다. 죽을 때도 아주 멍청했다. 쿠빌라이이후는 가면갈수록 더 못해졌다. 그래서 몽골을 자랑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테무진을 얘기할 분이다. 테무진이 죽은 후에는 통일중국이 없다. 남송은 말할 것도 없고 금왕조도 완전히 공격하여 점령하지 못한다. 원나라의 대외전적은 형편이 없다.


원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대외전쟁에서 거의 매번 실패한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쿠빌라이는 1274년(지원11년), 1281년(지원18년) 두번에 걸쳐 일본원정을 감행한다. 그러나 참패로 끝난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중국을 존경하다가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1282년(지원19), 1288년(지원25년) 원나라군대는 두 번에 걸쳐 안남(월남 북부)을 공격하나 최종결과는 역시 참패로 끝난다. 1284년(지원21년) 원나라군대는 점성(월남 중남부)를 공격하고, 1293년(지원30년)에는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섬)를 원정하나 모두 실패로 끝난다. 쿠빌라이는 여한을 품고 우울하게 죽는다. 쿠빌라이이후 원나라에서는 대외적으로 무슨 전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역사는 다시 증명한다. 빈궁한 나라를 약탈하는데 뛰어는 깡패강도이면서, 일하지 않고 얻는 것을 좋아하는 원시유목민족이 아무리 부귀한 학자와 문명인들의 부를 빼앗고 행복을 얻더라도 그들은 왕왕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뿐이다.


원나라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자랑이 아니라, 중국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린 수치스러운 왕조이다. 

출처 https://m.blog.daum.net/shanghaicrab/1615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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