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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무술(우슈, 쿵후) 한국 유입 과정
게시물ID : history_193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복학한야비군
추천 : 11
조회수 : 6565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5/01/10 13:24:06


1970년대 한국은 무술의 전성기였다. 한국사람들은 무슨 한이 맺힌 것처럼 무던히도 무술을 많이 연습하고 애호하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지낸 사람들은 무술에 대한 열정만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체육관에서 땀을 쏟았던 그 때를 회고한다. 
동네마다 많은 종류의 체육관들이 있었으며 세력다춤과 다른 체육관을 방문해 싸움을 거는 '도장청소'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태권도, 합기도, 유도 등 일본에서 유래한 무술뿐만이 아니라 중국무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소룡과 성룡 등의 무술애션스타들의 힘을 입고 중국무술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단군이래 최초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에 중국무술이 전파된 것은 [무예도보통지]를 참고해보면 수백 년 전으로 소급할 수 있겠으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본격적인 보급의 시발은 1949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몰락하고 무술을 배운 중국인들이 한국 등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가면서 그 곳에 쿵후라는 무술을 심은 것이 사실상 중국무술의 본격적 보급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외로 중국무술의 정착과정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중국무술의 전래시기는 20세기에는 크게 두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949년 중국의 국민당 정부의 몰락에 따른 중국인들의 대거유입시기이며 두 번째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고 자유왕래가 되면서 중국 본토의 무술을 배운 시기이다. 시대가 다른 만큼 중국무술의 전파형태도 많은 차이가 난다. 
먼저 퀴즈를 한번 풀어보자.

 

1. 한국내의 중국무술 문파는 몇 개 정도일까? 
2. 한국에서 중국무술의 최고 원로는 누구일까? 
3. 한국 최초의 중국무술체육관은 누가 어디에서 설립했을까? 
4. 한국인 최초로 중국무술체육관을 개설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중에서 2문제 이상을 맞추는 사람은 중국무술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중국무술의 종류가 상당히 많을 줄 알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는 2000여 개의 문파가 있으며 큰 것만 추려내도 2~300가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1990년도 이전에 배울 수 있는 중국무술은 소림권, 당랑권, 팔괘장 3가지 밖에 없었으며 지금도 태극권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 사정이 바뀌지 않았다. 
다시 의문은 이어진다. 소림권은 분파가 많기로 유명하다. 언뜻 들 수 있는 것으로도 소림육로단타, 소림오권, 대비권, 연권 등이 있으며 중국 북부지방에서 유행한 장권(長拳)류의 권법까지 포함한다면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럼 한국에서 전수한 소림권은 어떤 류의 소림권일까. 
당랑권도 매화당랑, 칠성당랑, 육합당랑 등이 있으며 더 세부적인 분류도 가능하다. 한국의 당랑권은 누구의 당랑권일까. 
팔괘장의 창시자 동해천은 모두 64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유명한 유파로는 8대문파가 있고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정정화류의 윤복류, 양진포류가 있다. 한국의 팔괘장은 누구의 진전을 물려받은 것일까. 
우선 화교에 대해 간단한 소개가 필요하다. 중국인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던 19세기 말경에는 외국의 중국인들을 청국인(淸國人), 청상(淸商), 화인(華人), 화상(華商)과 같이 표현하였는데 화교(華僑)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인들이 1898년에 학교를 세우면서 화교학교(華僑學校)라고 명명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 후 중국에서 화교라는 단어가 공식화되어 공문서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화교’는 더욱 애용되었다. 화교유입은 임오군란직후 체결한 [조청수륙무역장정(朝淸水陸貿易章程)]에 의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 1910년에는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빠른 증가를 보였고 1942년에는 82,000명으로 화교인구가 불어났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한국의 외국인 이민규제에 의해 1980년에는 29,400명으로 감소하였다. 화교의 출신지역은 94%이상이 산동성이다. 산동성과 인천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고 19세기 말부터 겹친 재앙으로 만주로 이동했던 산동출신 중국인들이 신의주를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어 한국의 화교는 산동출신이 많아졌다. 
임오군란 후에 한국에 온 화교들은 청나라의 지원으로 경제가 날로 번창하였으나 식민지시절인 1930년대부터 일본의 적극적인 규제에 의해 화교경제가 쇠퇴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후 화교는 다시 경제 붐을 일으켰고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중국과 무역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화교무역업은 몰락하였고 화교들은 자본이 적게 들고 기술연마가 필요하지 않은 요식업으로 전향하는 사람이 많았다.

 
1977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 면화교의 78%가 요식업, 즉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산동성출신이었기 때문에 빵굽는 것과 국수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1957년에는 1,703개이던 중국요식업체가 1960년대 말에는 3,000여개소로 증가를 하였다. 당시에는 중국집이 한국사회의 각계 각층에 다 인기가 좋았다. 부자들은 태화관, 대려도, 대관원 같은 큰 중국요리집의 손님이었고, 일반중국집은 서민층들이 잘 이요하였다.


요즈음 TV프로그램에서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는데 실제 산동성에는 춘장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 양장피는 중국본토에서 찾기 어렵고 대만과 복건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요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화교들의 문화는 산동성과 중국 본토의 개방이전에 왕래가 가능했던 대만의 것들이 묘하게 섞여있는 셈이다. 게다가 무술에 대한 태도와 인식도 대만의 것과 유사하였다. 
화교들은 대개 처음에 호떡집으로 시작해서 돈을 벌어 분식센터를 차렸으며 더 나아가 중국음식점을 하는 과정이 많았다. 중국음식점의 호황도 그리 길지 않았다. 1961년 외국인 토지법에 의해 외국인은 토지를 전혀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음식점도 한국사람의 명의로 바꾸어야 했다.


게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단행된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가 확장되자 대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음식점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또 한국정부의 중국집에 대한 정책은 한국전쟁 당시 곰탕 값과 짜장면 값은 같았으나 현재는 곰탕이 대략 5,000원, 짜장면은 2,500원으로 2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차별적이었다. 화교들은 일반적으로 요식업에 종사하였으나 무술을 할 줄 아는 화교들은 생계의 수단이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것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서 흔하게 하는 것이 한식당과 태권도 도장이다. 
초기의 화교들은 한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중국무술은 심신수련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지 상대를 공격하는 투기무술이 될 경우, 그 위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 같은 금기는 중국대사관을 본령으로, 전국에 산재한 중국무술가들에게 잠정적으로 취해진 엄한 약속이자 법규였다. 화교들은 좀처럼 한국인 전수를 꺼렸다. 1950년대의 한국에는 무전취식자가 전국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이 중국음식점으로 찾아가 음식을 공짜로 먹고 행패를 부리는 일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외국이라는 지역적인 한계와 화교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대우는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였다. 그 와중에서 무술을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무술을 자신들만이 가지는 부가가치로 생각하였다. 
이런 화교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중국무술의 전래과정은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수를 다 내놓고, 가르쳐 준다면 눈썰미 좋은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은 뻔하다. 화교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굳히기 위해 없어도 만들어 가르쳐주었고 고의적으로 잘못 가르쳐주었다.


한국에서 중국무술의 보급은 화교들에 의해 쿵푸나 십팔기란 명칭으로 불리워지면서 보급이 일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한국인에게 전수된 시기는 지역이나 사람에 따라 주장이 각각 다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확실한 근거는 지금의 코스모스백화점이 들어서기 전 중국대사관 부속건문에서 중국화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화교들에게만 지도나 수련이 가능했을 뿐, 한국인에게는 절대 지도할 수 없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수련은 물론 접근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한국화교무술총회라는 간판아래 철저하게 또 극히 제한된 화교들만의 전용도장이었다. 
여기서는 원래 고씨 성의 사범과 여품삼이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품삼은 여덕용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으며 여품삼은 고사범의 제자였다. 여품삼은 소림권을 배웠으며 소공동에 있는 유도도장에서 운동하기도 하였고 서울의 파레스호텔 뒤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는 태평관이라는 식당에서 운동을 하였다. 또 1961년 즈음에는 대구에서 올라와서 합기도 체육관을 낸 지한재의 도장을 빌려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사범이 갑자기 죽자 무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였고 당시 춘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던 임품장(林品璋)이 물망에 떠올랐다. 임품장은 이전에는 강릉에서 음식점을 열기도 하였으나 춘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품장은 산동성 모평현(牟平縣)에서 출생했으며 기춘정(紀春亭)의 제자이다. 기춘정은 중국의 대련에서 당랑권을 교습하였고 임품장은 이곳에서 당랑권을 배웠다. 
당랑원의 최고 정화는 적요권(嫡요拳)이다. 특히 투로가 많기로 유명한 당랑권이지만 그 많은 투로들도 적요권을 성취하기 위한 하위단계이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실제로 적요권을 수련한 사람에 따르면 ‘적요권은 모든 수법이 실전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져 있어 의혹이 없다’고 한다. 적요권은 모두 7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단과 2단은 쉽게 배울 수 있으나 3단부터는 배운 사마이 중국본토에도 많지 않으며 적요권을 배우고 다른 지역이나 문중을 떠날 사람들은 4단까지밖에 배우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품장은 기춘정에게서 적요권을 4단까지 수련하였다고 한다. 
임품장은 춘천에서도 무술을 가르쳤는데 정식체육관이 아닌 사적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당랑권을 배운 사람은 지금은 고인된 화교인 이자량(李子良)과 한국인 이봉철이 있다. 이자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임품장의 수제자이지만 특이한 인물은 이봉철이었다. 
임품장은 공식적으로 한국인 제자들이 없다. 또 옛날에는 화교와 같이 무술을 수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봉철은 운이 좋게도 화교 그룹 안에서 당랑권을 배웠다. 이봉철은 춘천의 음식점에서 심부름과 배달을 하였다. 그는 임품장이 이자량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했는데 자질이 대단했으며 임품장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이봉철은 적요권을 2단가지 수련했으며 중국무술을 배운 사람들에게 실력가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봉철은 말년에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잠을 잘 때면 누가 자신을 공격하러 온다며 여름에도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잤고 독이 있을지 모른다면 음료수도 캔에 든 것만 마셨다. 이유로는 술과 집안사정이 있었으나 주변사람들에 따르면 기공을 배운 적이 없는 상태로 혼자 수련하다가 피까지 토하는 부작용을 겪었다고 한다. 이봉철은 당랑권을 후대에 제대로 전하지 못한채 부랑자처럼 혼자 외롭게 죽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에서 극소수의 사범들이 자신의 수련을 위한 수단으로 한국 소년들을 대상으로 마당에서의 수련은 간혹 있었다고 하며 사설도장을 직접 개설하여 운영한 곳은 그대까지는 없었다. 중국무술이 한국인에게 개방되는 것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였고 서울과 인천 등지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파생되기 시작한다. 
여품삼과 두학제는 1958년 봄 춘천으로 가서 임품장을 초청하였고 중국대사관내에서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후 임품장은 중국대사관을 나와 여품삼과 소신당을 데리고 1960년 가을 화신백화점 맞은 편에 체육관을 설립하여 제자를 받아 들였으며 한국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덕강>

 


그 후 1963년 봄 종로3가 장사동에 중국무술관을 설립하여 두학제(杜學悌), 여품삼, 이덕강(李德江), 소신당이 장권(長拳)을 가르쳤다. 임품장은 당랑권을 배운 사람이지만 한국인들에게 당랑권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당시 가르친 장권은 중국북부에서 행해지는 사권(査拳), 화권(花拳), 홍권(紅拳), 소림권 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현재 우슈경기중목 중의 장권은 위에 열거한 권법들의 장점만을 따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가르친 장권은 족보가 없는 권법이었다. 당랑권 등의 전통무술을 한국인에게 전하기 싫은 화교들은 일부러 장권을 만들어 가르쳤다. 지금 떠돌아 다니는 많은 수의 무술투로들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당랑권 서적을 출간한 덕분에 이름이 한국에서 잘 알려진 소신당(蘇新堂)은 본명은 소가진(蘇家振)이며 곡가진(曲家振)이라는 예명도 사용하고 잇다. 그는산동성 영성현(榮城縣)이며 8살 때 한국으로 가족이 모두 피난을 하였다. 당시는 항공편이 없어 배로 한국에 왔는데 15일정도가 걸리는 힘든 길이었다. 원래 연태에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간발의 차이로 타지를 못하고 그 옆에 있는 청도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먼저 연태에서 출발한 배는 침몰하였고 그 잔해가 떠다니는 거을 보고 와야만 했다. 
소신당은 당랑권을 배우기 전에 권투를 했으며 임품장이 서울에서 무술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인천에서 올라와서 1958년 제자로 입문을 했다. 임품장은 성격이 온화하였고 제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나 교습도중에는 항상 자신도 같이 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1963년 종로3가 장사동에 체육관을 내자 이덕강과 소신당은 체육관에서 종일 무술을 지도하였으며 그 이외의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파트타임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다른 직업은 대부분 음식점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장사동 시절에는 대부분 이덕강이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덕강은 1931년 산동성 연태시 출신이며 18세에 부친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덕강은 이후 아현동과 퇴계로에서 체육관을 열였다가 지금은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 앞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중국무술을 수련한 한국인 원로들은 거의 배부분 이덕강의 제자이다. 이덕강은 실질적으로 중국무술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이덕강 개인의 문제인지,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일반적인 정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무술이 왜곡되어 전수된 것도 이덕강 때문이다. 한국의 중국무술 발전의 공과 실도 모두 그가 지고 있는 셈이다. 젊었을 때의 얼굴은 약간 갸름했지만 지금은 놀랍게도 극진카라테의 최영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덕강의 체육관은 특이하다. 대부분의 도장들이 고무우레탄 바닥을 사용하지만 이덕강은 지금도 흙을 4층까지 퍼 오려 두툼하게 깔아놓았다. 중국무술은 흙위에서 배워야 진보가 빠르다는 것이 이덕강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덕강의 스승은 누구일까. 자신의 말로는 중국에서 이미 무술을 배웠다고 하지만 스승이 누구인지는 함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며 주위의 화교들조차 알지 못한다. 그럴만큼 비밀단체에서 무술을 배운 탓일까. 아니면 무협지에서 보듯이 스승의 이름을 밝히면 죽음을 당하는 것일까. 
이덕강이 무술의 문파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문파의 무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화교무술가는 이덕강은 한국에서 무술을 처음 배웠으며 여러 사람에게 교습을 받았기 때문에 잡탕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혼자서 많이 연습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의 분위기는, 화교무술가들이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서로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며 기술교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화교무술가들이 한가지 문파의 기술만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소림권을 했다는 사람이 당랑권도 배웠고, 당랑권을 한 사람이 소림권도 배우고 도 후배들에게 가르쳐 왔다. 또 스승이 여럿인 경우가 많았다. 원래의 스승에게 전수받다가 누구의 소개나 사정으로 다른 스승을 찾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덕강은 임품장에게는 직접교습비를 주며 배웠다고 본인 스스로 인정을 한다. 
1970년대 초반에 이덕강은 퇴계로 도장에서 배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이덕강은 항상 수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으며 외부로 혹은 다른 무술가를 초청하여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계통이나 족보가 없어질 만큼 혼합되버린 것이 한국 중국무술계의 실상이기 때문에 잡탕이라는 것이 이덕강을 비난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중국무술의 대표적인 기본자세는 기마식이다. 이 기마식은 거의 모든 중국무술 문파에서 기초적인 훈련법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중국 남방계통 무술의 영향을 받은 카라테에서도 채택을 하고 있다. 기마식을 서는 이유는 최초에는 하체단력과 자세잡기였겠지만 후대로 올수록 기공적인 요소가 많이 첨가가 되어 회음혈의 긴장을 풀고 임독맥을 유통시키려는 목적이 주종을이루게 되었다. 기마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허리를 앞이나 뒤로 구부리지 않은 입신중정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도 일부 한국무술을 표방하는단체에서 허리단련을 한다면서 엉덩이를 과도하게 뒤로 빼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허리훈련은 다른 좋은 방법이 많다. 이 잘못된 자세의 유래는 이덕강에게서 출발한다. 
1970년대 후반에 나온 중국무술책들을 보면 희한하게도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다. 이것은 2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기마식을 오랜 선다는 것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가 흐트러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허리가 앞으로 굽어지고 엉덩이가 뒤쪽으로 빠지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수정되지 않은 채 잘못된 자세가 굳어졌거나 두 번재 이유로는 처음 배울 때부터 잘못 배웠을지도 모른다. 
화교무술가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화교드로가 한국인들은 다른 무술을 배웠다고 말한다. 심한 경우 천막을 치고 한국인과 화교를 분리해서 가르쳤으며 한국인들이 무술을 배워 대성할 수 없도록 기마식부터 잘못 가르쳤다는 것이다. 잘못된 기마식을 장시간 수련한 결과 허리부상을 당하는 사람들도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덕강 계통에서 무술을 배운 사람을 빼놓고 잘못된 기마식을 수련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화교무술가는 아덕강은 원래 자세가 그랬다고 말한다. 
이덕강은 자신이 잘못 배운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잘못 가르친 것일까. 이덕강이 잘못 배운 것이라면 다른 화교무술가들의 자세가 바르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 수련과정 중에 이 자세가 더 좋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바꾼 것이라면 이덕강은 무술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일부러 기마식을 잘못 가르쳤다면 이덕강은 한국인들에게 크나큰 죄를 지은 셈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이덕강은 한국인 제자들이 체육관을 내자 저 사람은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신비화와 교묘한 부정을 통해 일부 화교무술가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다 가르치거나 공개하면 내가 더 이상 여기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당랑권의 명인으로는 강경방(姜庚芳)이 있다. 강경방은 산동성 연태 출신이다. 강경방은 산동성 연태에 근거지를 누고 있는 학가문의 2대 종사 학향록의 제자이다. 학가문은 당랑권의 5대 양학향 대에서 갈라져 나온다. 양학향의 유명제자로는 강화룡, 학련여 등이 있는데 학가문은 이 학련여로부터 출발한다. 강화룡의 제자로는 임품장의 스승인 기춘정이 있다. 강경방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계통이 뚜렷한 무술가였다. 강경방은 부산 쪽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도장을 만드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가르치기도 했다.

<노수전>

 


다음으로는 인천에서 세력을 확장한 노수전이 있다. 노수전은 무술을 일제시대부터 원주를 비롯한 여러군데서 가르쳤다. 이후 인천에 정착을 하게 되지만 직접 도장을 연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도장에서 교습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가르쳤다. 노수전이 가르친 무술은 팔괘장이다. 팔괘장은 태극권, 형의권과 더불어 내가권에 포함되며 성립된 시기도 얼마되지 않지만 다른 중국무술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팔괘장은 별다른 기본자세가 없고 주권(走拳)이라는 독특한 단련방법이 있다. 일정한 크기의 원주를 정해진 보법과 팔 자세를 고정시키고 빙빙 도는 것이다. 팔괘장은 [세이버캣]이라는 일본만화에서 궁극의 무술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찬양을 받기도 하였지만 품격이 독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수전이 배운 팔괘장이 어떤 유파인가 또는 스승이 누구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노수전에게 배운 제자들은 노수전은 격투에 능했으며 정정화류의 용조장을 자주 사용했다고 회고한다. 용조장은 손가락을 가퀴처럼 동그랗게 휘는 것이다. 
노수전은 투로에는 그다지 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가 중국에서 많이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노수전은 자신의 스승으로 이경호라는 사람을 거명했는데 이경호는 북파권법을 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북경에 간 한국인들이 중국무술협회 등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팔괘권사 중에 왕동이라는 사람이 있고 왕동의 제자가 이경호라는 것이다. 이경호는 북파무술과 팔괘장을 배웠으며 노수전은 이경호와 왕동에게서 팔괘장을 배운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산동성 연태에 왕동과 비슷한 이름의 묘가 있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노수전의 초기제자로는 화교인 노수덕, 유순화, 강영재, 강학문과 한국인인 박복남, 전대성이 있다. 전대성은 노수전의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제자이며 노수덕은 노수전의 아들이다. 
노수전은 투로는 많이 몰랐으나 일신의 공력이 대단하였다. 복경을 자주 드나드는 한 무술가는 중국에서도 노수전과 같은 공력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노수전은 실제 30살이 넘어서 팔괘장을 시작하였고 제자들에게 한번 주권을 도는 것이 백번 주먹 치는 것보다 낫다고 주권을 강조하였다. 팔괘장은 나이가 들어서 시작해도 대성할만큼 시스템이 훌륭한 무술이다. 제자들인 노수전의 막강한 공력을 보며 팔괘장은 오래 수련하면 저런 힘이 생기는구나라고 짐작을 했다. 노수전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엄격했고 한 수를 이해 못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지를 않았으며 벌로 2배로 운동을 시켰다. 
한국인 제자가 없는 사람으로는 산동성 영성현 동산촌(東山村)이 고향인 필서익(畢庶益)이 있다. 필서익은 할 줄 아는 무술이 당랑권, 소림권, 태극권 등 무려 10가지가 넘었다. 필서익은 소신당과 같은 영성현 출신인데 이 지방에서는 무술이 성행해서 개들도 3수를 안다는 우스개가 있다. 필서익도 인천, 대구, 군산, 부산 등을 돌아다니며 무술을 가르쳤으나 화교들에게만 전수하였다. 
이외에도 이름이 나타나있지 않은 화교들이 체육관 없이 식당이나 마당 또는 산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산발적인 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화교들에게 무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직접 도장을 여는 시대로 접어든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국무술도자을 연 사람은 강용일이다. 올해 57세인 강용일은 1960년부터 이덕강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강용일은 1967년 4월 영등포에 중국무술도장을 열었고 잇달아 이일형, 정소우 등이 도장을 개관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인 사범들에 의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중반에는 국내 최초로 한국인들에 의해 대한십팔기협회라는 무술단체가 창립되었다. 처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황주환, 강용일, 김갑현, 김영호 등이 있으며 회장은 황주환이 맡았다. 이들은 단증을 발급하기도 했으며, 각종대회에 출전하면서 많은 수의 체육관을 보급해 나갔다. 
인천에서는 전대성이 신흥동에 중국무술십팔기총본관이라는 도장을 만들었고 박복남은 도화동에 체육관을 설립하였다. 이 중 박복남은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0년 사단법인 대한쿵후협회가 창립된 후, 대한십팔기협회는 빛을 잃어가면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후 또 다른 사회단체로 인천에 근거를 둔 한중쿵후협회가 생겨났다. 임의단체로 중무회, 신무회, 한국쿵후연맹 등이 생겨나면서 국내 중국무술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제 한국에 전래한 중국무술의 문제점을 짚어보아야 겠다. 우선 한국에서 중국무술을 가르친 화교들을 무술가로서 평가해 보면 이들은 수준차이는 있었으나 중국에서 인정받는 톱클래스 무술가들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한국인들의 수준 차가 각양각색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빨간 띠에게 배운는 것과 사범자격증을 가진 4단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제대로 전파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창조적인 개변과 발전이 일어나지만 중국무술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일본에서도 중국무술이 뿌리는 내리는 것도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을 한 이후부터이다. 그나마 한국은 지리적인 여건과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화교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면서 중국무술의 존재를 알려나간 것이다. 
인천에서 체육관을 운영중인 한 중국무술계 인사는 “실질적으로 무술을 많이 배운 것은 근래에 들어서이다. 한중수교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시작은 오래 전이지만 이전 것은 데대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전 화교들이 가르친 투로의 수는 많았으나 급조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인들은 무술을 한 수, 한 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너무 컸다. 화교들은 한국인들이 권법을 좋아하는 것을 제때 부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만에서 배워온 다음 가르쳐도 되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이 무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곳은 대만이 유일하였다. 대만이 더 잘 살던 시절이니 대접은 융슝하였으나 지금 중국 본토와 같이 기술전수는 전혀 없었다. 대만인들은 자신이 무술이 대단한 부가가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만인들과 한국의 화교들은 같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술의 고향인 중국대륙은 갈 수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이다. 팔극권으로 유명한 유운초가 살아 있었을 때 대만을 방문한 한국인은 ‘유운초에게 배우려면 집 한 채 값을 줘야 한다’는 풍문을 들으면서 ‘무술은 원래 부자만 배우는 거고 가난뱅이는 못하는 거구나’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무술강습회를 열지는 않았고 그저 대회에 참가하여 치고 받고 올 뿐이었다. 화교들은 한국인과 화교를 엄연히 구분하여 가르쳤으며 화교의 유언이 한국인에게는 무술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화교들의 폐쇄성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같이 고생을 하는 동포를 내심으로 아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화교들은 한국에서 차별도 많이 받았고 우리가 모르는 서러움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고의적으로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별 것 아닌 것에 주의를 기울였고 한 수를 배우려고 집 한 채를 날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희소성을 지닌 화교무술가들의 가치는 점점 올라갔을 것이 뻔하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습성은 성질 급한 한국인들을 더욱 애타게 했을 것이다. 이런 화교무술가들이 가진 우월성도 중국과 직접 수교한 1990년대 들어서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제 한국인 무술가들은 중국 본토에 제집 드나들 듯하며 책 속에서나 이름을 보았던 유명한 무술가들을 찾아 다니며 배운다. 그것도 대접받으면서 배운다. 더 이상 한국인들은 화교들에게 돈을 싸들고 가서 무술을 배우지 않는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 많고 배울 사람이 많아서 탈이다. 중국인 무술가들도 한국에 직접 들어오며 안 가르치면 안 가르치지 일부러 잘못 가르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무술계를 돌아보고 하는 말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무술을 한국에서도 오래했지만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하는 코스들이 아니었다. 한국의 중국무술은 조악하며 실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수가 많다. 분명하게 다 화교들이 모두 그리고 제대로 전수를 안 했다는 것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이다. 
물론 이것도 100% 다 신용할 수 없다. 중국본토에서 전통식으로 사부-제자관계를 맺고 배사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이미 한 두면이 아니다. 이들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현재 답십리에 도장을 낸 소신당 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1982년에 대만으로 이사했다. 왜 다시 한국으로 왔냐하면 옛날에 한국인에게 무술을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로잡고 싶다. 임품장 선생은 한국에서 큰 실수를 했다. 당시 한국인 제자를 2~3명만 길렀어도 한국의 무술계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 
1990년을 기점으로 중국무술은 힘을 잃는다. 동네마다 번성하던 중국무술, 십팔기, 소림권의 간판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사람들은 중국무술로는 태극권이나 배울 뿐이고 나머지는 검도와 한국무술류로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 그 시절처럼 일반인들은 허름한 시멘트 건물에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운동을 해도 에어콘이 있는 곳에서, 운동 후에는 샤워를 하고 싶어한다. 
한국의 중국무술계는 경제성장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는 라면을 먹고 아시아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헝그리정신이 추앙받는 시대가 아니다. 
한국에서 중국무술은 꽃을 다시 피울 것인가. 아니면 화교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한 채 사라져버릴 것인가. 전통적인 한국의 중국무술계는 경기종목인 우슈에 배턴을 넘긴 채 침묵하고 있다.


출처: http://blog.cyworld.com/john987/228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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