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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게시물ID : readers_193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2
조회수 : 45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21 21:15:12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천둥을 무서워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릇뿐만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입니다. 한 여자의 비명과 한 남자의 폭력과 한 아이의 눈물 같은 것들을요.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리고 천둥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는 아주 강한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는 지금처럼 굽은 허리를 갖고 있지 않으셨겠죠. 아버지는 술을 사랑하십니다. 가격이 얼마가 됐든 농도가 얼마나 높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취하셨다는 사실을 잊게 해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저는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저를 사랑해 주셨으면 했습니다. 저희의 외모가 어떻든 저희가 마음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든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요. 어머니와 저는 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잊게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얼굴과 몸은 멍과 흉터로 가득하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여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제게 어머니를 닮아 아주 예쁜 아이라고 말합니다. “역겨운 그 얼굴 저리 치워 이 새끼야.” 그러나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는 당신을 닮지 않은 저를 때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항상 두 배로 맞으십니다. 어머니의 갈비뼈에 났던 금은 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의 왼쪽 눈썹 위의 상처도 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낮과 밤을 채우는 흐느낌도 모두 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상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학교에 가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아침밥의 맛있는 냄새와 저를 깨우는 도닥거리는 손이 좋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의 포옹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감히 손댈 수 없는 그런 미소를 지으시며 저를 안아주십니다.

           우리 아가 많이 컸네. 이제 곧 엄마보다 더 크겠다.”

           싫어요.”

           ? 엄마는 네가 아빠 키만큼만 자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자란다는 건 제게 항상 힘든 일이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깨달은 거라곤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부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술을 드시고 어머니는 당신의 상처가 어떻든 언제나 제 아침상을 차려주시고 저는 언제나 같은 소원을 빕니다.

           학교에 갈 준비가 다 됐습니다. 어머니께선 저를 대문까지 바래다 주시며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제 볼에 입을 맞추십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어 묻는 거야. 손 드는 걸 창피해 하면 안 돼. 용감한 사람들은 항상 질문을 하는 거야.” 저는 많은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용감한 사람은 분명 아닙니다.

           대문을 나서며 학교에 가는 척을 합니다. 저는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멀리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뒤를 돌아 어머니가 계실 곳을 향해 바라봅니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소원을 비는 순간이죠. 저는 절대로 아버지가 이번엔 어머니를 때리시지 않기를 빌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이번엔 아버지가 지난번보다 어머니를 덜 때리길 빕니다. 불가능한 소원은 빌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소원을 다 빌고 나면 천천히 학교를 향해 걸어갑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잠깐이라도 문을 그렇게 두지 않으시니까요. 그래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우산을 접어서 밖에 두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우산은 제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산처럼 우뚝 서 있는 어떤 이의 거대한 등과 마주쳤습니다. 검은 우비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사람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흙탕물에 젖은 그의 더러운 신발이 보였습니다. 집안 바닥에 찍힌 검은 발자국은 마치 괴물의 꼬리처럼 그에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움직이지 않고 어머니를 눈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본 어머니의 분홍색 치맛자락을 발견하고 안심하려는 찰나, 저와 눈을 마주친 어머니가 제게 소리쳤습니다. “! 빨리!”  

           커다란 등이 제 쪽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엔 깨진 술병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병에서 뭔가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술이었을지도 아니면 빗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손에 아직도 우산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지가 어느새 젖은 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제 우산 때문이었을지도 아니면 번뜩이는 깨진 술병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힘차게 달렸습니다. 어머니를 향해서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오늘의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한 번도 같은 날 두 개의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처럼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세요. 어머니를 지킬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순간 아주 오래전 읽은 동화가 떠올랐습니다. 용과의 싸움에서 지는 왕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아직 살아있고 어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제 제겐 저만의 가족이 있고 큰 집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힘껏 끌어안고 있는 한 여자의 앞에 서 있습니다. 아이는 여자를 많이 닮았지만 저와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여자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손을 듭니다. 저는 여자를 때리는 동안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제가 녀석의 어미에게 새길 모든 상처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게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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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빌었는데, 그게 이루어지면 어떨까'라는 걸 주제로 쓴 단편이었습니다. 날짜를 보니 4년 전에 썼네요. 외국어로 쓰고 나중에서야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매끄럽지 않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짧지는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게 작을 때가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좋으셨거나 이해하기 힘드셨던 문장이라든지, 감상, 그리고 조언 모두 고맙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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