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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제 2전선
게시물ID : history_19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10
조회수 : 1189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1/07/04 17:30:46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몇이나 알겠는가, 전투에서 죽은 수많은 군경과 공비들에게 너희는 왜 죽었느냐고 물었을 때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대답할 자 몇이 될 것인가, 이 판에 무엇이 공이랄 게 있는가, 멀리 중국 땅에서 독립 운동할 때가 영광스러웠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게 드러날 것이다.” -남부군사령관 이 현상을 사살한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2연대장 차 일혁 총경- 1.해방 후 한국전쟁 발발직전까지의 빨치산 역사 1-1. 야산대의 조직과 활동 해방 후 무장투쟁의 초보적인 형태는 46년 10월 대구항쟁에서 비롯된다. 10월 항쟁에 참여했던 민중운동 세력은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할 수 없어 산악지대로 들어가 생활했는데, 이들은 당시 산사람으로 불려졌다. 이것이 빨치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해방 전 산사람들을 ‘구빨치’라고 칭한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전술은 48년 2.7구국투쟁과 5.10선거 반대투쟁을 계기로 발전하였다. 특히 47년 제2차 미소공위 결렬 후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은 남로당의 전술을 무장투쟁으로 바뀌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로당의 모든 정치활동 등이 불법으로 탄압받고 지하에서 비합법활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투쟁전술을 무장투쟁으로 전환해야 했다. 특히 유엔결의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분쇄하는 일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투쟁만으로는 어려웠다. 단독 정부 수립은 적극 저지해야 하는 남로당으로서는 무장투쟁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2차 미소공위 결렬 후 평화적 정권획득의 가능성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이러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리하여 48년 2.7투쟁을 계기로 야산대가 조직되면서 무장투쟁이 부분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한다. 남한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로당이 주도한 2.7투쟁은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2.7투쟁에서 서울에서는 행동대, 지방 당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당원가운데서 군사경험이 있거나 10월 항쟁 때 지하에 들어가 활동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대개 한 개 군의 50-100명 정도였다. 야산대는 38소총, 장도, 칼 또는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로서 당조직 체계에 따라 조직되었다. 당시 지방당의 조직은 비합법 체제로 전환되었으므로 도당 위원회의 규모를 줄이고 도내를 2,3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구블럭을 만들어 한 개 블록이 몇 개 군을 지도하도록 운영되었다. 때문에 도당에는 야산대를 조직운영하는 기구로서 도 사령부를 설치하고 도당부위원장이 겸했다. 각 지구 블록에는 야산지구 사령부, 각시구군당에는 00야산대를 두는 3단계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야산대는 2.7투쟁 이후 3.1절 기념투쟁, 5.10선거반대투쟁, 8.28 지하서명 투표투쟁, 인공기 게양투쟁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10 선거 반대투쟁 때에는 선거반대 선전운동을 위주로 하는 선전성행대와는 별도로 각 지방당에서는 백골대, 유격대, 인민청년군 등의 소규모 무장부대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이들의 공격대상은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 언론기관, 우익진영 인사, 선거위원등이었다. 야산대는 아직 당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부분적이나마 합법적인 활동공간이 남아 있었다. 야산대가 부분적으로 폭력투쟁 단계로 이행하지는 않았는데 좌익의 투쟁전술이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는 계기는 제주도에서는 4.3민중항쟁, 육지에서는 여순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2. 여순 봉기와 유격전구의 형성 육지에서는 48년 10월, 여순 봉기를 계기로 무장투쟁이 조직되었다. 여순 봉기를 일으킨 세력들이 순천,광양 등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전개, 유격전구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순 봉기세력들은 봉기에 참여한 병사들이나 무장한 인민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유격전구의 형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봉기군 일부는 순천을 장악하고 계속 벌교, 고흥, 보성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다른 부대는 구례, 곡성, 남원 등으로 북상하면서 2천명 규모의 무장세력을 형성하여 백운산과 지리산 등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구축한 지리산 중심의 빨치산 부대는 점차 인근지역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지리산 유격전구 안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부활되어 부분적으로 토지개혁이 일시나마 실시되었다. 전남일대 유격대들은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이 점이 계속적인 무장투쟁을 가능하게 되었다. 경북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도 48년 12월 2일 대구 국군 제6연대의 병사들이 봉기하여 산으로 들어가면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강원도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은 5월 초 강릉군 사천면 지서 급격과 강릉 용연사 주둔 형사부대의 습격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대표적 유격전구는 다음과 같다. 1. 호남 유격지구는 나주, 영광, 함평, 장흥 등 주로 동남지역이였다. 대부분 평야지대고 산도 800미터 정도로 지리적으로 불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리산 유격대와 협동작전을 할 수 있었다. 2. 지리산 유격지구는 후에 남한 유격대의 총본산으로 남으로 백운산 북으로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지대에 걸쳐있는 지역이었다. 경남의 산청, 함양, 거창, 합천, 창녕, 하동, 진주, 함안, 사천, 남해, 전남북의 무주, 장수, 임실, 남원등 중소도시까지 영향이 미쳤다. 3. 태백산 유격지구는 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으로 안동, 청승에 이르는지역이다. 4. 영남 유격전구는 경북 경주, 영천, 영일, 청도 등 대구 주변과 경남의 양산, 울산, 동래, 부산 주위의 산악지역에 형성되었다. 5. 이밖에 제주도 유격전구가 있었다. 단정수립을 반대에 온 힘을 쏟았던 남로당은 5.10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를 적극 부정하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와 함께 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는 이를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특히 남로당에서는 49년에 들어와 남한에서 미군철수와 인공 수립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러한 투쟁은 남한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49년 6월에는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이 결성되고,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결성대회가 49년 6월 25일에서 28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704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에서 조국전선의 강령이 결정되었으며, 남북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서가 채택되었다. 이 선언서에서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은 마지막 부문이였다. "만일 반동이 고집하고 평화적 통일사업을 방해하는 때에는 그는 조선인민의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선인민은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와 독립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를 주는 모든 놈들을 자기의 길에서 능히 소탕할 것이다." 즉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한반도의 산골짜기 곳곳에서는 이미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1-3. 9월 공세와 아성공격 49년 6월 말 조국전선이 결성된 뒤 무장투쟁이 보다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49년 7월부터는 무장투쟁을 보다 조직적이며, 대규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민유격대가 편성된다. 49년 7월부터는 인민유격대를 각 지구별 3개 병단으로 편성했는데 오대산 지구를 제1병단, 지리산 지구를 제2병단, 태백산 지구를 제3병단으로 하였다. 제2병단의 조직 체계는 총사령부 (사령관 이현상) 밑에 4개 연대로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몇 개 군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지역을 갖고 있었다. 제3병단의 경우 49년 8월 초에 김달삼을 사령관, 남도부를 부사령관으로 3백여명이 경북 안동, 영덕 경계선에 상륙하여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했다. 제1병단(이호제부대 또는 제1군단)은 49년 9월 6일 이승엽의 지시에 따라 강동정치학원의 학생 약 360여명으로 편성되어 남파되었다. 인민유격대의 편성과 함께 남한의 각 지방 당조직에서는 무장투쟁은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지리산과 태백산 지구의 인민유격대가 3개 병단으로 편성되고 각 도당 지방당 조직이 군사체제로 개편된 뒤 무장투쟁은 보다 강화되었다. 모든 당조직은 지도부의 일부를 자기 지역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무장투쟁을 지휘케 했다. 현지에서 직접 지휘하여 '00현지당부'라 불리기도 했다. 지방당에서는 서울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멀지않아 해방된다. 북으로부터 인민군이 넘어온다."는 등의 선전으로 당원들을 입산시켜 야산대와 인민유격대를 확대했다. 무장유격대는 처음에는 낫과 칼과 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활동했는데 점차 카빈, M1,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하게 되었다. 지리산 지구에서는 무기를 수리하고 폭탄을 만드는 철공장도 운영했고 무전대와 촬영기대가 제2병단 사령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 밖에 유격대 옷을 만들고 수선하는 재봉틀과 오락용 악기들도 마련되었다. 또 해방지구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하여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부락 인민에게 배포하는 선전, 선동활동도 벌였다. 남로당 서울 지도부에서는 지리산 지구에 문화공작대로 남로당 문화부장 김태준과 시부 유진오, 음악부 유호진, 영화부 홍순학 등 작가, 예술인으로 구성된 문화 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빨치산이 이처럼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유격지구 인근에 사는 민중들의 지원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빨치산들이 민중들의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적인 무장투쟁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무장유격대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실시한 토지개혁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당시 노동당 기관지는 이러한 사정을 공개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유격대를 비롯한 빨치산들은 9월 공세를 계기로 보다 직접적이 공격을 전개하였다. 빨치산들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들과 합류하여 이른바 '아성공격'을 전개하였다. '아성공격'은 관공서, 공공기관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또는 경찰서, 군사령부 등에 대한 정면공격을 의미한다. 49년 7월 이후 전개된 '아성공격'은 주로 경남북, 전남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겨울철에 들어서면서 추위가 닥치고 유격대의 기점인 산악지대와 민간부락과의 연계가 원활히 되지 않자 빨치산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 유격대에게 불리한 계절을 이용하여 군과 경찰은 강력한 동계 토벌작전을 실시했다. 동계토벌작전은 무장유격대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다. 호남 유격전구에서는 군경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산에서 마을로 침투하고 큰 부대를 소부대로 분산시켜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썼다. 1-4.유격대 남파 무장투쟁이 9월 공세를 계기로 확대 '강화되는 것은 북에서 내려온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들이 활동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48년 10월 여순봉기가 일어나자 군경병력들이 호남지구에 집중되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이 11월 17일 오대산 지구로 침투했다. 그 뒤 '조국전선'선언문이 발표된 뒤 9월 공세를 전후하여 50년 초까지 10차례에 걸쳐 모두 2,400여명이 남파되었다. 그러나 남파된 무장 유격대들은 대부분 군경의 강력한 대응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남한 각지에서 활동하던 무장 세력들도 50년 초를 기점으로 크게 약화되었으나, 이현상의 지리산 빨치산 부대(제2병단)과 태백산 일대의 빨치산 세력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국군 8사단과 5사단이 각각 강릉과 지리산 근처에서 토벌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2. 한국전쟁과 무장투쟁/신빨치의 등장 2-1. 인민군 진격과 당 재건 1950 6월 25일 남조선 해방을 목표로 하여 한국전쟁을 개시한 노동당은 다음 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전시체제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사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은 이날 밤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북한 인민들이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빨치산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유격운동을 한층 맹렬히 더욱 용감히 전개하며, 해방구를 확대하며 또는 창설하며 적은 후방에서 적들의 공격, 소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파탄시키며......각종 수단을 다하여 적은 전선과 후방연락을 차단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인민군대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이에 따라 산악지대에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내려가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민군과 협동작전을 벌이거나 무장투쟁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지리산의 이현상부대, 경북도당 책임자인 배철이 지휘하는 유격대, 강정수가 지휘하는 동해안 유격대를 비롯하여 경남 산청지구의 지리산 유격대, 함양지구 유격대, 전남 영광군 서해안 유격대, 전남 화순일대의 유격대, 경남지구의 백운산 유격대, 산청, 하동, 김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남해안 지리산 유격대, 제주도 인민유격대 등이 활동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계속 남진하여 낙동강까지 전선을 확장시켰지만,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인민군에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점령지역에서 병력을 후퇴시켜야 했다. 노동당은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9월 중순 지방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시킬 것. 4.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5.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경험자 및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일시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 이에 따라 각 도당위원회에서는 각 군당에 같은 지시를 내리고 9.28을 전후하여 모든 조직들을 자기 도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입산한 사람들을 규합, 여러 개 유격대를 조직했다. 유격대 편성은 지방민청원과 자위대원, 북에서 파견된 내무서원, 보위부와 후퇴 못한 인민군으로 이루어졌다. 인민군의 경우 이미 전술했던 바와 같이 철원으로 후퇴하되, 퇴각이 불가능할 경우 지방 유격대에 합류하여 제2전선을 형성토록 했다. 그 결과 낙동강전선의 남쪽에 위치했던 4,6,7,9,10사단의 잔존병력들 약 1만여명이 지방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을 신 빨치라고 통상 호칭하였다. 이들 상당수가 비정규군이 아닌 정규군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2. 6개도당 회의와 남부군 조직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후퇴에 따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가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광범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현상부대는 유엔군의 9.15 총반격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하였다. 당시 후평리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함께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철에는 6개도당의 지도권이 위임되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승엽은 후평리에 모인 유격대와 인민군 후퇴,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에 독립4개,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현상의 지휘아래 남하한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그 직속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충북 단양지구로 내려와 문경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제천지구로 이동했다가 51년 2월 초 속리산까지 내려와 활동하다가 덕유산을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51년 5월 중순 송치골에서 6개 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6개도당회의 이후 남한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당의 경우 6개도당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남부지도부를 구성, 여운철이 책임을 맡았다. 6개도당회의가 있기 전까지 각 도당은 독자적으로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벌여왔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은 대둔산을 중심으로 사령부 밑에 백두산부대(320), 대덕부대(130), 대전부대(100), 함둔산부대(100), 가야산 부대(130), 압록강부대(100), 청천강부대와 사령부 직속의 공병부대, 통신정찰중대를 편성하였다. 충남 빨치산은 12월 7일 대둔산에서 전북 완주군의 운주면 피동리로 거점을 이동하였다. 남충렬은 중공군이 계속 남진할 것이라고 판단, 가야산 부대 80명을 천안방면을 침투시켜 중공과 합동작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전북도당: 도위원장 방준표는 도당지휘부를 화문산으로 이동시켜 전북 유격대를 조직했다.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하였고, 직속부대로는 이택부대(60), 보위부대(150), 익산군당 유격대(100), 금산군당 유격대(300), 진안군당 유격대(260), 무주군당 유격대(130), 장수군당 유격대(470), 남원군당 유격대(150)를 지휘했다. 제2정치사령은 정읍군당 유격대(60), 고창군당 유격대(590), 부안군당 유격대(160)를 맡고 있었다. 경남도당: 지리산에 들어가서 인민군 후퇴병들로 '303부대', '102'부대를 만들었는데 후에 불꽃사단을 편성했다. 사단장은 6.25때 북에서 경남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파견된 김의장이고 참모장은 노영호였다. 전남도당: 백아산에서 전남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도당 부위원장 김선우가 사령관이 되었다. 그밖에 경북에서는 한국전쟁 개전시 내려온 남도부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따로 유격대를 조직했었다. 2-3. 제2 전선과 유격지대로 개편 51년 5월 중순 덕유산에서 6개도당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도당유격대는 이현상의 남부군 지휘 아래 들어가고 빨치산 부대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남부군은 사령관 이현상, 부사령관 이영회를 중심으로 제1전구(전북북부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 남부)로 나뉘어졌다. 제1전구는 충남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사단장 고판수), 전북 북부지방의 빨치산 700명을 45사단으로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제1전구 사령관은 김명곤이며, 정치주임은 이희영이었다. 남부군 직속부대는 81사단(정치위원 김삼홍), 92사단, 602사단이었다. 그리고 경남지구에서 조직된 불꽃사단과 각 지방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57사단을 편성, 남부군에 소속시켰다. 남부군은 국군과 유엔공세에 대항하여 각 도당 빨치산을 통일된 지도체제에 묶어 무장 투쟁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남 도당의 경우는 남부군 통제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 남부군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무장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들이 남부군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을 때 북한은 중국군의 동계공세와 발을 맞춰, 남한의 유격대가 제2전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령을 내렸다. 즉, 각 도당 조직들을 군사 활동을 위주로 한 지대로 개편하도록 했다. 도당위원장이 지대장 또는 정치부지대장이 되어 인민군의 진격에 호응하는 유격투쟁을 벌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50년 12월, 51년 1월과 3월 등 몇 차례에 걸쳐 유격지대로의 개편에 관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총참모장 나일, 작전국장 유성철 등의 지령문이 각 유격대에 보내졌다. 이때의 지령에서는 유격지대를 다음과 같이 편성하도록 했다. 제1지대 : 소백산 지구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편성한다. 제2지대 : 충남 유격대와 충북 유격대, 그리고 원주지방의 홍사민 연대로 편성하고 제1거점을 속리산, 제2거점을 영동, 제3거점을 운장산에 둔다. 제4지대: 전남유격대와 전북유결대로 편성하고 활동범위는 곡성, 구례, 하동, 산청, 진주, 마산지구로 한다. 제5지대 : 지대장에는 길원팔, 정치부지대장은 남경우를 임명하며 경남유격대와 청도동부지구 유격대로 편성한다. 거점은 운둔산, 지리산, 관용산에 두고 청도, 울산, 동래, 밀양, 마산, 김해, 부산, 산청 등 지구를 활동구역으로 한다. 제6지대 : 무주, 옥천, 영동, 금산, 보은 등을 활동구역으로 한다. 그러나 당시 형편상 지령과는 달리 충남도당이 6지대, 경남도당이 8지대, 전북도당 이 7지대, 경북도당이 3지대, 지리산의 이현상이 4지대로 편성되고, 2지대는 조직되지 못하였다. 제1지대는 50년 11월초 이승엽이 직접 조직한 유격 제1, 제2, 제3 여단을 주축으로 김응빈을 지대장, 박승원을 정치부 지대장으로 하여 51년 1월 하순 강원도 오대산지구로 들어와 활동했다. 그 뒤 국군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일부는 북으로 올라갔다. 제1지대는 약 1천 명으로 서울, 경기도 출신들이었다. 제6지대는 50년 9월 29일 춘천에서 약 3백명으로 조직된 제929부대가 11월 중순 제6지대로 개편되었다. 51년 1월 중순 남하, 3월말에 월북했다가 다시 5월 인민군 남진을 이용, 충북 일대로 침투했다. 7월에 속리산에 입산했으나 지대장 이하 간부급이 전사함으로써 부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가 충남도당 유격대와 합류하여 대둔산 지구에서 제6지대를 다시 편성하였다. (지대장은 충남 도당위원장 남충렬)그러나 이러한 지대개편의 지시는 당시 열악한 통신수단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 51년 4월 23일 지대개편 지령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423부대를 조직하여 내려 보냈으나, 충북 속리산에서 충북도당 부위원장인 송 명현에게 전달하고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10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이 현상이 남부군을 해체하고 4지대로 개편한 것은 이때였다. 2-4.휴전논의와 유격대 체제 개편 전선은 51년 중반에 접어들어 38선에서 방어에 주력하는 장기전 태세로 넘어갔으며 7월 7일부터는 휴전회담도 시작되었다. 이에 노동당은 남한 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수행하던 빨치산 유격대 체제를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노동당은 51년 8월 31일, 중앙정치위원회를 열고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94호 결정서에서는 지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평가하고 지구당으로서의 개편을 지시했다. "조국해방전쟁 과정에 있어 당 단체는 영용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자기 임무를 당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수행하지 못했다. 전쟁 시작후 1년이 지났으나, 빨치산의 투쟁은 결정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으며, 대중을 조직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고, 인민군의 공격이 있었음에도 국방군 내부에 의거운동과 와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것은 당 정치노선과 정책은 옳았는데 남한 안의 단체들이 잘못해서 그러한 것이다. 특히 당 역량을 보존해서 닥쳐오는 정세에 적합하도록 강력한 투쟁을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당 사업 강화를 위해 종래의 행정지역에 따른 조직체를 일단 보류하고 잠정적으로 5 개지역을 설정하여 각각 지구조직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체 당 사업을 지도한다. 제1지구는 서울, 경기도 전지역, 제2지구는 남강원도, 제3지구는 충청남북도, 제4지구는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 밀양, 창년, 양산, 울산, 동래, 부산지역, 제5지구는 낙동강 이서의 경남도, 전남북도 전지역 및 제주도와 충남의 논산군 지구 등을 설정한다." 이러한 중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서는 당시 별다른 연락 수단이나 북과의 효과적 통신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재산 현지당들에 즉시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52년 중반에 가서야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94호 결정이 가장 늦게 전달된 곳은 전북(지리산)이어서 제5지구당은 1년 뒤인 52년 10월에 조직됐다. 제5지구당은 52년 10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김삼홍 등이 모여 제5지구당 구성을 위한 회의를 열게 된 것이다. 회의에서 이현상, 김삼홍과 박영발, 방준표 사이에 심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이현상과 김삼홍은 중앙당의 결정대로 제5지구당을 만들어 각 도당을 해체하고 소 지구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박영발과 방준표는 중앙당의 지시가 정식 문건이 아니며, 도당을 해체하라는 것은 중앙당이 남한실정을 모르고 결정한 것이라 반대했다. 결국 의견통일을 보지 못하고 중앙당의 지시와는 달리 도당해체 없이 제5지구당을 구성하게 되었다. 위원장은 이현상, 부위원장에는 박영발이 뽑히고 그 아래에 조직부(부장 조병하), 선전부, 유격지도부(부장 박찬봉), 통신과, 경리과 그리고 김지회부대등 직속부대를 두었다. 조직위원회는 이현상, 박영발, 김삼홍, 김선우, 조병하, 방준표, 박찬봉으로 구성했다. 이처럼 노동당은 남한지역의 지하당과 유격대를 제2전선 역할을 하도록 당사업보다는 군사활동 위주의 지대로 바꾸었다가 다시 휴전을 대비하여 당 위주의 지구당으로 개편하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중앙당의 기대와는 달리 점차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특히 51년 11월 백선엽 야전사령부가 남원에 설치되고 12월부터 52년 3월까지 본격적인 동계 '토벌'작전을 벌이자 호남 일대 유격대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당 중앙연락부(부장 배철)는 52년부터 남한의 빨치산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정치학원 출신과 무장부대들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기대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노동당 정치위원회에서는 당 조직과 무장투쟁 문제를 토의하고 111호 결정을 채택하였다. 여기에서는 남한 정세와 휴전회담을 전망한 장기대책으로 지금까지 지구당 사업과 무장투쟁을 평가하고 새로운 결정을 제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지구당이 중앙과의 연락사업을 진행시키지 못해 중앙당의 결정이 제 때 전달되지 못했다. 또한 무장투쟁에만 편중하고 당 조직 사업에 소홀했다. 각 유격부대가 대부대로 집결하여 참호를 파고 수일간에 걸친 정규적 진지전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경찰과 헌병 조직이 널리 분포된 불리한 조건에서 당과 유격대에 불리한 결과를 준다. 노동당은 이러한 평가에 따라 유격투쟁, 지하당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유격투쟁: 유격대는 인민과 연결되고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불필요한 모험적 전투는 피하되 그렇다고 너무 소극화되고 위축되어 자진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지하당 사업: 각급당 지도부는 산으로 올라가지 말고 중요산업부분과 노동자, 농민, 군부 속에 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지구당 지도부를 도시로 진출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결정은 지금가지의 지구당 사업과 무장투쟁 전술에서 새로운 전환을 의미했다. 즉 산에서 도시와 농촌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전선이 38선에서 완전히 교착상태에 들어가고 전방에 배치된 국군병력이 후방으로 배치되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정이 제대로 추진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는 이러한 결정에 따라 도시로 침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무장투쟁 세력은 111호 결정을 전달받고도 주로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있을 수밖엔 없었다. 2-5. 휴전 후의 빨치산 52년 중반기 이후에도 비록 약화되기는 했지만 빨치산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대표적으로 지리산 지구(5지구당 산하 김지회 부대, 이영회 부대), 회문산 지구(전북도당 산하 무장부대), 속리산 지구(3지구당 빨치산), 운장산 지구(전북도당 빨치산), 백운산 지구(전북도당 유격대), 덕유산 지구(경남도당 유격대), 신불산 지구(제4지구당 남도부 지대)등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53년 휴전 후 빨치산 부대들은 장기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사상무장을 강화하고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53년 9월에 들어 지구당은 소규모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빨치산은 주로 지리산 지구, 덕유산 지구, 회문산 지구, 형제봉 지구, 모후산 지구, 전남동부 지구, 영광, 장흥지구, 운장산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군의 작전도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의 근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54년 2월에는 지리산지구에는 조국출판사, 지리산주재당, 경남도당, 중부소지구당, 남원 임실군당, 995부대, 727부대, 야지공작대, 이영회부대가, 덕유산 지구에는 전북도당남부지도부, 순천군당, 김제군당, 정읍군당, 고창, 부안군당이 백아산 지구에는 전남서부도당, 백아산 지구당, 광주시당, 곡성군당, 곽용철부대가, 화학산 지구에는 전남남부주재당, 두봉산소지구당, 중부지구기동대가, 운장산지구에는 복수연대가 있었다. 54년 2월부터 3월말까지 백 야전사령부의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빨치산의 부대장, 위원장 등의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빨치산은 다시 조직적 편재를 시도하게 되었고 54년 4월경에 이르면 지리산에는 925, 727부대, 남원군당 등 8개 부대가 백운산에는 전남도당, 향미연대가 덕유산에는 전북도당등 5개 부대가 있었고, 그 외에는 운양산, 자작산, 회문산, 모후산, 화학산 등에 두 개 내지 3~4개의 부대가 존재하였다. 54년 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군의 작전으로 이하여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부대들이 사라졌다. 54년 5월 군의 작전이 끝났을 때 빨치산의 남아있던 부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리산 지구에는 조국출판사, 삼승부대, 남원군당이, 덕유산에는 향미연대 노영호부대, 임실 진안군당이, 회문산에는 남부지도부, 변산주재당, 부안, 정읍, 순창, 고령군당이, 백운산에는 남태준부대, 삼승부대가, 화학산에는 남부주재당, 서부도당이 있었다. 55년 초 남한지역의 빨치산은 남한 전체를 5개 지구당으로 운영하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경기지역의 제1지구당과 충청지역의 제3지구당은 세력이 거의 약화되었다. 강원지역의 제2지구당, 영남지역의 제4지구당, 호남지역 제5지구당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남지역의 제5지구당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남지역의 제5지구당의 빨치산들이 가장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해 있던 빨치산들은 다시 집결하여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였다. 경찰의 작전이 55년 후반기부터 시작되어 56년까지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부대가 없어졌다. 군경의 자료에 따르면 56년 12월 31일에도 약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총상을 입고 체포된 것은 1963년 11월 12일. 참으로 길고 긴 17년 빨치산 투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3. 남과 북 그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빨치산. 한반도의 지형은 월남의 밀림도 시베리아의 광활한 벌판도 아닌 좁은 산악지대다. 한마디로 유격투쟁을 할 수 있는 자연적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남한에 유격전을 지시했던 김일성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한 내 제 2 전선 투쟁이 잘해야 3년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지리산의 남부군이 용감하고 신출귀몰한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의 제한된 지역 특히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조직적인 빨치산 투쟁은 한계가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군을 위시한 남한 내 빨치산들은 소규모 분산투쟁이 아닌 대규모 유격전을 감행하는 전술적 실수와 함께 국군과 경찰의 대규모 토벌을 자초했다. 더구나 이미 최전선에서 사단급 이상의 작전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지구전 상황에서 백 선엽 야전사령부가 결성되고 최전선의 8사단과 수도사단이 동원되면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돌입하자 제한된 전력의 빨치산은 그 세력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휴전 무렵에는 사실상 그 명맥만을 남게 된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분명 신빨치로 명명된 이들 빨치산들이 (한국전쟁 당시 정규군으로 참전했던 인민군출신들이 포함된) 사실상의 제2전선을 형성했던 공로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상에서는 단 한번도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너바 협정에 따르면 한번 정규군이었던 군인은 일시적으로 비정규전에 참여하여 낙오되었다 하더라도 군인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또한 종전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규군 마저 포함되었던 제2 전선을 휴전협상에서 일체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북한정권의 외면은 국군포로송환문제에 사실상 무관심했던 남한정권의 과오에 비견된다. 물론 노동당과 김일성은 빨치산 세력의 약화를 예견하고 조직적인 대규모 무장투쟁에서 소규모 소극적 투쟁으로의 전환과 종래에는 산으로 하산하여 도시로 침투하라는 사실상의 제2전선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남부군을 포함한 남조선내 빨치산의 실정을 너무도 간과하는 형식상의 조치였고 매번 그 전달 시기와 상황이 일치하지 못했다. 지리산 남부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들은 대한민국의 군경에 체포되면 정규군 포로가 아닌 폭도로 규정되어 대한민국 법에 따라 중형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실상 남로당계가 몰락한 북으로도 갈수가 없었다. 박헌영과 이승엽등이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버린 북에서 이현상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휴전선에 제대로 된 철책이 전무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산악지대를 통해서 저들 빨치산들이 월북하는 일은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상과 남도부 방준표 하준수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군 지휘관들과 그 부하들은 끝내 지리산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는다. 죽을 때 인민공화국 만세보다는 어머니를 외쳤던 그들은 북한도 남한도 아닌 분명 색다른 영역의 존재들이었다. 과연 해방과 한국전쟁과정에서 저들 잊혀지고 버려진 빨치산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토벌했던 차 일혁 총경의 말처럼 언젠가 그들의 진실이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날까? 에필로그 지리산 최후의 전사였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되던 즈음 북에서는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정순덕의 이야기를 극화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는 정순덕이 북의 김일성 장군을 가슴속으로 모시며 최후까지 투쟁한다는 사뭇 감동적(?)인 내용이었으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며칠 상영되지도 못한 채 내려졌다고 한다. 63년 이 영화가 북에서 개봉되던 즈음 바로 그 최후의 여전사가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대북방송에 나왔기 때문에. 유격대 투쟁은 커녕 기껏해야 보투(보급투쟁)로 연명하며 남북 그 어디로던 갈 데가 없어서 거기 머물렀을,먼저 입산했던 남편찾아 입산했던 불쌍한 여인네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미화하면서 김일성 찬양에 열을 올린 북한정권도 이미 한쪽 다리가 거의 썩어버리고 사실상 어디 갈 곳도 없던 불쌍한 여인네를 중죄인으로 이십년도 넘게 감옥에 처넣었던 남한정권도 그저 빨치산은 자기들 편할 대로 처리해버리는 만만한 희생양은 아니었는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은 80년대 말 출소하여 십여년을 요양원을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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