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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고 난 후, 나의 일기
게시물ID : readers_194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영혼
추천 : 3
조회수 : 71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30 22: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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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책을 읽고 난 뒤 내 머릿 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잡념들로 엮은 하나의 잡글이다. 

하지만 지금껏 책을 읽고난 뒤 이토록 뭔가를 써서 바깥으로 토해 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져본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마신 커피 탓인지 살짝 속이 거북하다. 하필 방금 전에 저녁으로 기름기 흐르는 치킨을 먹었다. 속이 안좋은 관계로 겨우 두 조각에 그쳤지만, 손가락에 들러붙은 기름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나는 고물 넷북을 켜고 이렇게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그 전에, 혹여나 이 쓸데없는 잡글을 읽고 계신 사람들 중, '데미안'을 읽어봤던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당신들은 데미안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지금의 나처럼 혼란스러워졌는가, 아니면 무언가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사실을 깨닫고 깊이 감동하였는가. 

나는 책을 덮은 뒤, 작중 가장 중요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123p. -

버스 정류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점부터 내 속은 이미 매쓰꺼웠다. 이건 단순히 아메리카노 두 잔을 먹은 탓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엄청난 양의 잡념들로 넘쳐 흐르는 내 머리가 책을 읽고 난 뒤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갑자기 어떤 생각들이 폭발하듯이 떠올랐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투쟁하여 깨고 나오려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런 세계가 나에게 존재했던가. 

존재했다면 어디쯤에 있으며 나는 그 세계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그 세계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의 서두에 쓰여진 말을 잠시 빌리자면,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가 있다. 아마 이 말은 자신의 세계(투쟁해서 깨고 나와야 하는 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 이들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렇게 죽는 이들은 자신이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짐승인가. 아니면 반반인가. 

내 생각에 나는 아직 짐승이다. 언어를 배운 짐승이다. 생각을 하는 짐승이다. 

여느 인간들처럼 나는 먹고 자고 싸고 숨쉬고 움직인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욕망한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욕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데미안을 읽고 나서도 아주 사소하고 쓸모없고 소비적인 욕망으로 살아간다. 가령, 담배를 피운다든지, 성적인 상상을 한다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욕망들은 나를 갉아먹는 것임을. 그러나 나는 담배를 끊지 못했고 또 성욕을 억누르지 못한다. 버릇이라도 된 듯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컴퓨터 앞에서 비현실적인 욕망을 채운다. 

나는 너무나도 연약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 한번도 나 자신을 앞에 세워놓고 사투를 벌인 일이 없었다. 번번히 지거나 아니면 링에 오르지도 못한 채 겁을 먹고 포기했다. 강해지고 싶었으나 이대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시험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나는 매번 나 자신과의 싸움에도 패배했다. 그것도 나 혼자서 스스로의 허약함을 깨달으면 되었을 일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빛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쟤는 너무나도 약해 빠졌어. 쟤는 자기가 뭔가 특별한 줄 아는 모양이지. 그냥 쟤는 병신이야. 그들이 나를 향해 쏘아올리는 눈빛은 나를 구석으로 몰고 갔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원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형성한 울타리 속에 들어오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어떤 찌질한 녀석이 어서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전히 내 시간은 그들의 시간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간 속에서 견뎌내야 했다. 언제라도 추방당할 수 있다는 위험감이 나에게 웃음과 위선이라는 가면을 덧씌워주곤 했다. 나의 비정상적인 친절함에 그들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얼마든지 '죽여버리겠다'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는 동시에 나는 도망쳤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맹수가 되어 내 사지를 찢고 오장육부를 헤집어 뜯어 먹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도망치고 보니 나는 분명 어딘가에 위치해있기는 했는데 그 곳에 나 말고 다른 것을 두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경계해야 했다. 불시에 무언가가 침입할 수 있으니까. 혹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어떤 사람 조차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할 수도 있었다. 

철저히 나를 고립시켜야만 했다. 내가 속해있는 어떤 공간, 어떤 현실이든 모든 것이 내게는 '탈출해야만 하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좁은 내 방에는 가족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집 밖에서는 내가 굳이 어떤 곳으로 이동해야 했고 그 곳의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귀찮게시리'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때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뼈저리게 외로웠다.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고 소통하는 순간에는 기쁘면서 헤어지고 나 혼자 남아있을 때는 우울함이 밀려들어왔다. 

이러한 감정들을 나는 가끔 일기 쓰듯이 sns에 올렸고 그러면 거의 십중팔구는 '중2병 환자냐'라는 반응이 나왔다. 중2병 환자냐고 비아냥거렸던 사람들은 모두 친구 해제를 시켰다. 그러니 친구로 등록되어있는 사람이 10분의 1로 줄었다. 

아마 지금도 여기까지 읽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데미안 읽고 중2병 도진 어떤 청년의 잡글'이라며 손발을 오징어처럼 구부리는 시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 얘기해야겠다. 남이사 오그라들어 죽든 말든 ㅋ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타인 앞에서는 그늘진 모습을 최대한 숨기려 노력하지만 오롯이 혼자 남겨졌을 때는 그림자처럼 외로운 감정이 따라온다. 외로움을 잘 견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잘 견디는 사람일까 아닐까. 

외로움은 '고독감'과 닮아있으면서도 병적인 심리상태라는 사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은 주로 감정으로서의 상태로 생각할 수 있으나, 고독감은 감정과 이성의 교집합적 공간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독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자위를 한 뒤 느끼는 현자타임은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라는 생각을 가끔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것을 외로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엄연히 짧고 옅은 고독이다.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은 내가 소외되고 있는 듯한 기분과 같다. 수없이 많은 군중들 사이에 파묻혀있음에도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친구들이 주변에 많은데도 느낄 수 있는 감정. 

우리가 흔히 '정신병'으로 알고 있는 많은 병리적 현상들의 심층 속에는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다. 나 또한 나 자신을 갉아먹는데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자살충동을 자주 느꼈었다. 망상이기는 했지만. 나는 자주 그런 망상에 빠져든 적이 있다. 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이게 더 소름끼치고 끔찍한 부분이다.) 내 두 어깨에 자신의 몸을 걸치고 나직이 속삭인다. 죽어, 자살해버려. 

처음에는 이 소름끼치는 망상에 힘들어했다. 너무 가슴아프고 괴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이런 망상이 계속되자 오히려 거기에 익숙해져버렸다. 나는 무언가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작고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망상을 불러냈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술을 마셨다. 위액이 역류할 때까지 담배를 피워댄 후, 거의 토할 때 쯤 되면 그걸 억지로 참아냈다. 참지 못하고 토할 때도 있었지만 그 속 뒤틀림을 어거지로 참아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문했다. 자기 혐오에 빠지고 자학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감히 커터칼을 꺼내 내 손목을 긋는 시늉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으니까. 

지금은 어떠냐고?

다행히 요새는 그런 일이 없다. 요즘은 꽤나 기대감에 부풀어오른 채 살고 있다. 인생 곡선 중에서 지금은 상승 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다. 힘들 때 불러내었던 망상 속의 나를 요즘은 꺼내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한없이 무기력하고 허무해했으나 지금은 무언가 의미를 찾아가는 중인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 속을 헤집어 놓던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이제 복구작업만 하면 된다. 

한때 이런 외로움 때문에 나는 종교의 힘을 빌릴까 하는 유혹을 겪은 적이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는 아니다. 나는 철저히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아니 믿어야만 한다. 그런데 종교가 없다는 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아이러니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보통 '종교'라는 명사 뒤에 나오는 동사로 '믿다'를 선택하여 쓴다. 넌 어떤 종교를 믿니? 그러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혹은 부처를 믿는다. 혹은 알라신을 믿는다. 

물론 그때의 '믿다'라는 동사는 말 그대로의 뜻보다는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믿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으려 한다. 누가 나에게 종교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믿다' 대신에 '의지하다'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혹은 신 따위는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며 종교를 부정하기도 한다. 나는 종교를 절대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할 수도 없다. 삶에 있어서 종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종교가 불확실하고 실체가 거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에 의심하지 않으면서 실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생각. 왜냐하면 내 앞에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실제로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에 기대고 싶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나를 한없이 소외시키면서도 기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 

허공에 대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의 어깨에 잠시 내 머리를 기대어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훈련병 시절에 갔던 교회에서 나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당신, 신이라 불리는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며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절망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기댈 수 없는 나 자신, 신이 존재함을 믿으면서 의지하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나 자신. 인간들로부터 소외되어 가면서 인간의 무리로 들어가고싶어 안간힘을 쓰는 나 자신. 주변에 하고 많은 사람들이 숨쉬고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철저히 자신을 고립시켰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내 앞에 항상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내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은 대부분 먼 거리에 있거나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한자로 사람 인 人 자가 두 획이 서로 기댄 듯한 형상을 띄고 있는가. 내가 속한 분대의 하사였던 사람이 나를 상담하면서 했던 말이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기댄 듯한 형상을 띄고 있다고. 나는 아주 잠시 그 하사였던 사람에게 기대어 살았다.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람도 이 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전역하고 나서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하사를 대체할 만한 또 다른 기둥을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가까웠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내가 의지하고 싶은 신은 내겐 없었다. 알을 깨고 날아가는 새가 향해야 할 아브락사스가 내겐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세계를 깨야 한다는 의식도 없이, 날아야 겠다는 목표도 없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데미안을 한 번 읽은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종잡을 수 없는 괴상망측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 혼란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알고 싶었다. 내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걸 알아야 내가 계란 후라이가 되든 새끼 병아리가 되든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문장들과 끊임없이 결합을 시도했으나 문장들은 나를 완강히 튕겨냈다. 피곤하고 후덥지근하고 커피에 속이 매쓰꺼워지고 있는데도 문장을 훑는 내 눈은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데미안'이라는, 글을 쓴 작가 헤르만 헤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어떤 세계에 나 자신을 온전히 담그고 싶었으나 한없이 부족한 독서 경력과 좁은 그릇 때문이었는지 데미안의 세계는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마치 성배 안에 든 포도주를 잔뜩 기대하고 마셨는데 알고보니 독을 풀어놓은 것처럼, 내 정신과 몸이 힘들어졌다. 

그러면서 나는 마주하기 싫은 나의 과거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고, 그러면서 지금의 이 쓸데없는 잡글을 작성하고 있다. 한없이 수치스러운, 발가벗고 춤추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과거. 이 글을 읽는 순간 누군가는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 나조차 위에 줄줄이 늘어놓은 하찮은 기억들을 떠올리기 싫어 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주 가끔씩 꿈이나 망상같은 데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곤 한다. 그 기억들은 가끔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는지 혹은 내가 임의로 왜곡시켰는지 애매할 때가 있다. 어쨌든 지금 내 머릿 속에는 저런 종류의 날선 기억들이 시도때도없이 나를 찌르고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는 비겁한 도망자였다. 나를 똑바로 직시해야 함은 얼마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반성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겁쟁이가 되어서 달아났다. 그렇게 해서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 최근에 꽤나 많았다. 

한없이 나약한 나는 무엇을 통해 강해질 수 있을까. 나약함은 곧 게으름과 함께 따라다녔고 나는 무기력과 늘어나는 뱃살을 방관하며 꽤나 오랜 시간을 허비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건 내가 온전히 미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살짝 돌긴 했다. 그건 내 주변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하도 이상한 말과 행동을 많이 해서 사람들이 나를 귀여워하면서도 피한다. 나 스스로도 나를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설명하기도 하니까 말 다했다. 

나는 왜 미치지 않았을까.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위에 써놓은 잡기들만 가지고 본다면 나는 굳이 미치지 않아도 될지도. 하지만 그건 그저 타인과 나를 비교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남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보니 나는 내 스스로를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간 속에서 괴로워하고 수없이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견뎌냈던 게 아닐까. 나를 혐오하는 생각이 드는 날엔 어김없이 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처럼. 

글을 마치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더 풀어놓고 끝내야겠다. 

이건 내가 학교 내 집단상담에 참여하면서 겪은 실화이다. 물론 이것 또한 데미안하고 상당부분 상관이 없는 썰이다.

집단상담의 목표는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 '자아 찾기'였다. 

나는 여기서 내 자아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알고 살짝 충격을 먹었다.

상담 선생님께서 내담자들에게 잡지들을 주면서, 잡지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오려붙여 자기 자신을 표현해보라 하였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여러 이미지들을 오려붙였던 반면에, 나는 그림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글귀로만 되어있는 것들만 오려붙여놨다.

다른 사람들과 대조해보니, 확실히 차이점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지들로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하고 설명하는 반면에, 설명하려는 나도 당황했고 또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멘붕상태에 이르렀다. 

상담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머리와 가슴의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이 말의 뜻을 몰랐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논다는 뜻일까? 솔직히 지금 이 순간에도 정확히 와닿지는 않는 말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올렸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에, 치킨을 뜯으면서 잠시 생각한 바로는 이렇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내 글은 지금까지 가슴보다는 머리로 쓴 적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지금 이 잡글조차도. 머리로 쓰는 글은 어떤 현상에만 국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심층적인, 혹은 핵심적인 부분에 닿아야 한다. 그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내 눈과 생각은 현상 앞에서 멈췄다. 나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이 현상만을 글로 옮겼을 지도 모른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는 게 도대체 뭘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 치고 솔직히 데미안하고 관련되어 있는 얘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이 데미안에 대한 독후감이 되기는 어렵고 단순한 감상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안타까울 정도다. 글 쓰는게 취미이자 꿈인 사람이 겨우 이딴 글이나 쓰고 다닌다니. 예상컨대 이 글은 반대로 도배되어 보류 게시판으로 가거나 혹은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게시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끝내 이 글을 올리기로 한다. 책을 읽고 난 뒤 느꼈던 내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들을 그토록 정리하고 싶었다. 정리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책 내용과 상관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 강렬한 욕구를 느꼈던 건 거의 데미안이 처음이었다. 실제로 지금 이 글을 다 쓰고 난 뒤 나는 뭔가 진짜로 게워낸 뒤 처럼 약간 속이 편해졌다. 치킨을 뜯을 때 까지도 좌불안석이었는데 글을 한바탕 쓰고 나니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이 길고 지루하고 쓸모없는,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가서 문맥조차 쉽게 잡히지 않을 잡글을 혹여나 읽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인내를 가지고 읽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는 얘기를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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