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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연수 듣고 와서 배운 것 : 의열투쟁 뒷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94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주공항
추천 : 6
조회수 : 153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1/23 01:17:38
안녕하세요~ 역사를 사랑하시는 오유 여러분!
저는 현직 중학교 역사교사입니다~
이번에 방학을 맞아 3일 정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여는 단기 연수에 다녀왔어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 교사로서 더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반성하게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강의가 있었지만 특별히 마음에 와닿았던 우리 독립운동사 뒷이야기 몇가지
오유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부족하나마 글로 정리합니다~^^::
(강의를 해주신 분은 건국대학교 한상도 교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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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프랑스에서 IS를 비판한 언론사에 대한 무차별 테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명백한 테러집단이지만, 자기들 입장에서는 영웅이 될테죠
 
그렇다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테러일까요?
1921년 9월 12일 김익상 의사의 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은 테러일까요?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열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및 경성 시내 총격전은 테러일까요?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열사가 일왕에게 던진 폭탄은 테러일까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에서 폭탄투척 및 시라카와 사살은 테러일까요?
 
#1 안중근 의사
러시아 사람들로 가득한 하얼빈 역에서 꼬박 하루를 넘게 기다리며
품 속의 총을 어루만지고 긴장되는 한 순간을 기다립니다.
목표물은 단 하나, 오로지 이토 히로부미.
그를 처단하기 위해 두 발의 총알로 확인 사살까지 끝냅니다.
하지만, 러시아인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죠.
만약 조선인 안중근이 애꿎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고운 눈길로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2 김익상 의사와 나석주 열사
조선인들을 가장 괴롭히던 상징적인 두 기관은 바로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였습니다
이들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조선인을 핍박하는데 앞장서는 식민지 기관이었죠
김익상 의사와 나석주 열사는 모두 1층에 폭탄을 던지고 도망치는 대신
목숨걸고 2층까지 침투하여 폭탄을 투척합니다
대담한 행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살기를 포기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들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2층에 갔던 이유는 단 하나.
일본 고위 관원들은 1층이 아닌 2층에 주로 집거했기 때문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기관의 1층은 주로 민원인들이 오고가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단 일본인 관리를 처단하는 것보다 고위층을 직접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1층에 있다가 애꿎게 희생될 조선인이 없어야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3 이봉창 열사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하고 일본옷을 입고 온 31살의 젊은이
임시정부에 이봉창 열사가 처음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지만
영웅은 호걸을 알아본다고, 김구 선생은 그의 결의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렸습니다
품 속에 소중히 안고 온 폭탄은 습기, 제작 문제 등으로 비록 불발되었지만
일왕을 처단하겠다는 이봉창 열사의 굳은 의지는 초인적이었습니다
 
#4 윤봉길 의사
일본군은 억지로 상하이 참변을 일으켜 수많은 중국인을 죽였습니다
임시정부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하이마저 일본군의 손아귀에 넘어갈 지경.
독립군의 씨는 이미 말라버렸고, 임시정부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
용기있게 나선 젊은이는 25살의 윤봉길 의사였습니다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도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꾸며 농담을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사람은 상하이 참변의 총대장 시라카와를 비롯한 일본군 고위 장교들.
하지만 단 한명의 외교관도, 단 한명의 중국인도, 단 한명의 신문 기자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앞에 나아가 적절한 의식이 끝나고 다른 나라 외교관을 비롯한 귀빈들이
모두 식장을 빠져나간 뒤 일본군 장교들만 남았을 때까지 기다린 결과였습니다.
 
이후 중국 언론은 대대적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보도하며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것을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흘린 피 덕분에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임시정부는 여론을 얻었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충칭까지 함께 이동하며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독립을 위한 군대를 조직할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가 시라카와 영혼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시라카와가 마지막으로 사령했던 부대의 주둔지에
시라카와가 죽었던 그 시간에 맞춰 사형당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열투쟁은 한 두 인물이 폭탄을 던지고 사형을 당한 사건이 아니라
1920년대 이후 숨통이 끊어진 독립운동의 명맥을 잇는
초인적인 민족혼이 폭발한 뜻깊은 사건이었습니다.
무기를 빼앗기고 만주와 간도를 빼앗기고 독립군의 거의 궤멸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수뇌부만 골라 처단하였다는 점
현재 민간인이든 여성이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테러와 명백히 구분되는 점입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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