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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폭주를 막은 영국군
게시물ID : humordata_19424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9
조회수 : 341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2/03/03 2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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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한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51년 직후부터 끝을 맺었는데 그 이유는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인한 것이 컸기 때문임.

 

민간인 학살 자체는 이미 전쟁 중에 굉장히 만연해 있었음. 이게 어느정도까지였냐면, 개전 초기 5사단과 7사단을 재건하라고 호남으로 보낸 약 2,000여 명의 군대가 그 지역에서 징병은 안하고 사람 죽이고 다녀서 변변찮은 저항 하나 못하고 철수해버린 적도 있을 지경.

 

성황이 바뀌어서 한국군이 반격에 나선 시점에서는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음. 특히 부역자 색출은 물론,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버린 잔류파들에 대한 보복이 군과 경찰, 심지어 청년단이나 자경단 같은 민병대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 아래에 적잖은 이들을 죽였음.

 

또, 북진하면서 현지에서 학살도 자행이 되었는데 아예 미군에서도 학살만 전담하는 한국군 부대들이 있다며 이를 시정해야한다고 미8군에 상신을 올릴 정도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임.

 

UN군 사령부에도 10~11월 사이 북진하던 한국군의 점령지에서 한국민정경찰 혹은 우익계열 청년단에 대한 약탈과 학살, 테러 등의 행위가 적발되었을 지경임.

 

오죽하면 영국 정부가 분노했겠음. 영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대량학살을 계획하고 있다며 미 정부에 정식적인 항의를 했는데, 항의 내용이 '한국 전쟁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전쟁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음.

 

특히 50년 12월 홍제리 사건으로 영국정부는 물론, 현지의 영국군도 격분하게 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가 이어지자 아예 51년 1월 영국 노동당이 나서서 이승만 대통령을 전범 재판에 회부시키려는 안건까지 상정할 지경이었음.

 

미군도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나섰으나 점차 한국군이 점령한 지대에서 무정부 사태와 약탈, 살인 등이 이루어지자 KMAG에서 북한의 모든 점령지에 한국군의 출입을 엄금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날리기도 했고, 실제로 순천에 진출한 한국군 부대가 약탈 행위를 하자 미군 제1기병사단 병력이 교체할 정도로 엄중하게 다루기 시작함.

 

나중에는 한국 정부가 보낸 이북 출신 경찰 2,000명의 북상을 거부하고, 맥아더 사령부가 직접 기존에 있던 북한의 경찰조직, 즉 내무서원들을 활용하여 통치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할 정도로 이러한 문제는 연합국 측에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함.

 

그럼에도 학살 자체는 막아지질 않아서, 후퇴하면서 최소한 한국 경찰부대와 청년단이 평양에서 800명을 살해하고 갔다라는 보고가 버젓히 올라옴. 이러한 문제는 남한 정부 자체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문제였으며, 실제로 미 국무부는 북한 정권이 여전히 북한 거주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는 순전히 한국 정부의 잔혹한 행위 때문이라고 꼬집을 정도.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이러한 행동이 완전히 종식됨. 왜냐면 중공군이 춘계 대공세라는, 쌍방 120만이 전 전선에 걸쳐 격돌하게 되면서 위기 의식이 생겼음.

 

이대로가다가는 모두가 죽겠다, 라는 위기의식과 함께 리지웨이와 밴플리트가 한국전쟁에 들어오면서 그리스 내전과 같은 동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함.

 

부역자든, (자칭)애국청년단이든 평등하게 소총수로 징병하는 것이 시작되어야만 했으니까. 매일 연대당 300명의 지원병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한국군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소모율이 시작되었고, 기존처럼 부역자 마을이라고 학살하고 그러면 징병 자체가 안되니 학살이 자연스럽게 종료된 것임.

 

당장 51년 6월부터 52년 10월 15일까지 한국군 전사상자가 총 22만이었고, 미군이 12만이었으며 기타 연합군이 2만 가량이었으니, 16개월간 36만의 병력이 소모되어버린 셈임.

 

특히 한국 정부의 1년 징병이 30만 언저리인 것을 감안하면, 22만의 희생자는 1년 징병 병력의 거의 8할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손실이었으니까. 그러다보니 손쉽게 징병하기 위해서 학살을 정지시킨 것임.

 

당장 병력이 없어서 전방 부대들이 죽어가는데, 빨갱이 혹은 부역자라고, 또는 청년단이라고 징병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거기에 밴플리트의 전략도 주효했는데, 빨치산들이 심각하게 암약하기 시작했고 남부 지방에 군단 하나가 게릴라 토벌로 붙잡힐 정도로 교전도 치열했음.

 

그러다보니 게릴라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 지역 주민들도 죄다 징병해가기 시작한 것임. 학살하고 다니면 진짜로 게릴라에 붙어버리고, 냅두자니 게릴라들이 주민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위험성이 공존하니 그냥 징발해버린 것도 있었음.

 

이렇게 함으로서 게릴라들을 자연스럽게 약화시키는 동시에, 한국군의 징병 자원도 늘리는 방식이 채택된 것. 

 

'한국 전쟁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전쟁이 되어야 한다' 라는 영국 정부의 외침은 51년이 되어서야 중공군의 개입으로 비로소, 그나마도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임. 

 

한국군의 흑역사도 비로소 51년에서야 멈추게 된 셈이고, 52년 백마고지와 53년 금성지구에서 비장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영향에서 기인할 수 있었음. 정말 끔찍한 시기였고, 정말로 말로 이루 다할 수 없는 그런 시대였다는 것임.

 

어쩌면 그 당시 사람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러한 점이 공존하던 시기였던 것.

 

출처: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251768926

 

p.s 이와 관련되어 더 정보를 얻고 싶다면 영국의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2015년 집필한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을 참고 바람

출처 https://theqoo.net/square/185740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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