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재밌는 시간이었다. 룰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수로 밴들 시티를 벗어나버리고 말았지만 괜찮다. 이 요상한 숲에서 그녀는 새카만 날개에서 알록달록한 가루를 흩날리는 귀여운 요정을 만날 수 있었고, 자신을 픽스라고 소개한 그 귀여운 요정과 몇시간씩이나 놀았다. 조금 장난끼가 많은 데다가, 너무 재빨라서 술래잡기를 하면 언제나 룰루가 지게되었지만 룰루는 그런 것보다는 새로운 친구를 사귄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주절거리는 픽스의 말을 룰루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친구를 사귀는데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숲에서 지칠때까지 놀았고, 이렇게 재밌는 친구도 사귀지 않았는가.
"픽스!"
술래잡기를 하다 말고 룰루는 픽스를 불렀다.
"이번에도 나를 속이려는 거지? 아까처럼 불러서 나오면 잡아버릴려구?"
픽스도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하지만 룰루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깊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냐, 슬슬 너무 어두워진 것 같아. 집에 가야 하지 않을까?"
룰루가 집에 간다는 소리를 하자, 픽스는 일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일그러짐은 음영에 가려져 룰루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걱정마 픽스, 너도 가야지. 내가 여기왔다는거 엄마 아빠는 믿지 않겠지?"
룰루는 주변에 있는 알록달록 색치장이 된 꽃 하나를 땄다. 꽃의 향기또한 달지 않고 새콤했다. 룰루는 그 꽃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널 본다면 믿게 될꺼야. 히히, 다들 깜짝 놀랄거라구!"
룰루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픽스는 일그러진 얼굴을 펴내었다. 어느새 땅거미마저도 사라지고 짙은 남색의 하늘이 펼쳐졌다. 몇자 대화를 나누는 그 사이에 황혼이라도 져버린 것일까. 하지만 룰루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저녁하늘로만 비추어졌다. 그 모습또한 이 괴상한 숲과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픽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룰루의 뒤를 따르기로 시작했다. 그 검은 요정은 무어라고 잠깐 내뱉었지만 룰루는 그 빠르고 알아듣기 힘든 음성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룰루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룰루는 너무 오래 놀았던 것은 아닐까.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어째서인지 먼지가 수북히 쌓인 문을 열었다. 의외로 솔솔 올라와야하는 저녁밥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엄마가 저녁밥도 차려주시지 않을 만큼 화가 난 것일까? 룰루는 눈치를 살피고는 조용히, 나지막히 외쳤다.
"엄마…. 저 왔어요. 룰루 왔어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쾌쾌한 먼지 내음과 함께 기분나쁜 장판의 소리만이 들렸다. 룰루는 수많은 먼지에 쌓인 벽장과 장식장들을 보며 알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고 신발도 벗지않은채 픽스와 고개를 수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와 아빠는 없었다.
"엄마? 아빠? 어디에요?"
엄마와 아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몇시간이나 울었던 것일까. 어쩌면 반나절은 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훌쩍훌쩍 나던 눈물이 어느새 흐와앙─하는 소리의 크나큰 울음으로 변해버렸다. 동네 사람들도, 함께놀던 요들 친구들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밴들시티 외곽의 그 마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떤 집에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이 룰루를 보며 왜 그런 옛날 복장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니느냐고 어이 없는 물음만 늘어 놓았다.
"픽스…. 엄마랑 아빠가 없어졌어. 테일도… 티미도… 전부전부 없어져 버렸어…."
끝내 내고 싶지 않았던 결론인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라는 결론을 인정해 버린 룰루는 털썩 주저앉았다. 픽스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룰루의 작은 어께에 주저앉아 룰루의 슬픔을 위로하는 듯 했다.
"조금만 놀았어야 하는건데…. 정말…. 아주 조금만 재밌게 놀아야 하는거였는데…. 너무 재밌게 놀아버렸어…."
그 말은 이미 픽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공허한 울음만이 동이 터오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갈라지듯 울려 퍼졌다. 울음소리도 채 그치지 않은 꼬마요들의 명랑하지 못한 목소리만이 그 공허함을…. 가득 매웠다. 너무나도 처량하게.
"픽스, 이제 난 어떻게 해야하는거야? 모두들 없어져 버렸어. 이제…. 무얼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픽스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혹여 픽스조차 사라진 것일까 두려워진 룰루는 어께를 바라보았지만 픽스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친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된 룰루는 픽스에게 다시 말했다.
"픽스는 알고 있어? 왜 룰루가 아는 사람들이 다 없어져 버린거야?"
픽스는 조금도 자세가 바꾸지 않은 채 나지막히 말했다.
"내가 살던 요정의 숲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갔던 것 같아. …그, …미안해."
어느 정도 멎었던 룰루의 눈물이 다시 흘러 나올 듯 했다. 머리가 너무나 아팠지만 룰루는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픽스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룰루의 친구인 픽스마저 자신을 떠난다면 룰루는 영영 홀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숲 뒤편에서 푸른 로브를 쓴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터벅 터벅 룰루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손을 무릎에 짚은 채로 룰루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며 물었다.
"네가…. 요정 마법사 룰루니?"
룰루는 훌쩍이던 고개를 위로 들고 되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잠깐 보았었던. 키가 크고 픽스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긴 인간이었다.
"누구세요?"
로브를 쓴 사내는 나지막히 대답했다.
"나는 리그에서 온 전령이야. 리그에 참가하지 않겠니?"
나긋 나긋한 목소리에 룰루는 내심 안심했다. 대화 할 수 있다는 상대가 하나 늘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룰루는 가뜩이나 귀엽고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었다.
"리그요? 그게 뭔데요?"
사내는 그대로 룰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룰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손길을 느꼈다.
"음─… 리그에 온다면 재밌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 수 있어. 뭣하면 요들 친구들도 만들 수 있고…. 조금 별난 녀석들도 있지만 모두 좋은 녀석들 이니까."
룰루는 양손을 맞잡고 눈을, 더 크게 뜨며 물었다. 그 물음에 한점의 거짓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나의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동심. 그 자체의 질문이었다.
"정말, 정말이에요? 친구를 만들 수 있어요?"
"그래, 물론이지."
사내는 즉답했다. 룰루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참가 하겠노라 선언했고, 로브를 쓴 사내의 손을 잡고 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다시는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어께에는 요정친구 픽스를 데리고, 한손에는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머리에는 귀여운 고깔 모자를 뒤집어 쓰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