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진료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현 정권이 그래도 이전보다는 합리적일 것으로 믿고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비급여의 급여화> 발표 이후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의사로서는...... 제가 환자를 치료하는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치료법이나 약물의 선택권을 차단 당한다는 거부감이 있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제가 고민했던 부분이 해결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면서, 다른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는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는데에 대한 보람도 느꼈지만, 제가 입원을 권유하는데도 치료비가 부담스럽다고 입원을 거부하시거나 중간에 나가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환자가 돈이 부담스러워서 퇴원하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어요... 저야 한 환자에게 내가 생각하는 검사, 치료 다 해서 그 환자가 좋아지면 뿌듯하지만...... 퇴원할 때 원무과에서 돈을 내고 나가는 환자나 보호자의 얼굴이 어떤지 본 적이 없으니까.
매일매일 밀려오는 환자를 보다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일에 매여있다보면 내 진료실에 있는 환자들만 내 환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밖에는 환자가 더 많죠. 돈이 무서워서 병원에 오지도 못하는 환자... 이미 충분히 널리 쓰여지는 치료법이 있는데도 그 치료비마저 무거워서 그냥 죽기로 결정한 사람들. 우리 나라 건강보험 좋아서 안 그럴 것 같지만 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
의사들은 다양한 치료법을 선택하지 못하고 첨단 의료기술을 도입할 수 없어서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갈 것을 걱정하지만...... 사실은 꽤 쉬운 처치를 받아서 살 수 있는데도 죽거나 병을 키워오는 환자의 수가 더 많을 거에요.
의사로서는 내 진료실에 들어온 내 환자를 살리는 것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맞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것이 맞을 거에요... 하지만 결국은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긴 할 겁니다.
국민의 건강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나눠야만 하니까요. 누구에게 더 주느냐... 더 가난한 사람에게? 더 중병인 사람에게? 더 회복 가능성이 큰 사람에게?
그 방향은... 모르겠어요.
24주에 태어난 미숙아를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시는지 혹시 아시는지... 예전에는 다 포기했던 선천성 장애, 미숙아들도 요즘은 다 '살기는 산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각종 치료, 정기적인 검진, 이 아이가 뇌성마비나 지적장애가 될 경우 평생을 받게 될 각종 재활 치료나 특수 교육들... 나가야 하는 의료적 비용과 사회적 비용이 엄청 나요... 사실 이런 아이들 중 치료해도 장애가 남을 것이 뚜렷한 아이들도 있어요. 미숙아 한 명에게 드는 비용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태어났는데 가난해서 특정 질병을 치료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면 훨씬 많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영아사망률은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어요.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더 다양한 질병을 커버해주는 것이 집단으로서는 이익이에요.
대통령이 비급여의 급여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희귀 질환을 가진 아동의 어머니와 만남을 가지고 위로를 해주셨죠. 저는 이 정책을 지휘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이 대통령이 예상하는 방향과 같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희귀난치성 질환은 평생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를 받아도 독립적으로 살 수 없이 평생 도움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많은 질환이에요. 1인당 의료비가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들어간다는 이야기죠. 이 정책의 기획자는 제한된 재화를 더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더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 중 누구인가요?
1. 가난해서 지원을 받지 않으면 전혀 치료를 할 수 없는 사람
2. 지금 바로 치료를 받으면 정상으로 회복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
3. 치료를 받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을 사람.
4. 아주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므로 치료비를 지원 받지 못하면 빈곤층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
5. 평생 장애, 질병을 가진 채로 살아야 하는 사람
6. 나와 내 가족이 질병에 걸린 사람.
슬프지만...내가 감기에 걸리고 상대방은 폐암인 경우 정도가 아니라면 대체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긴 하더라고요... 내 앞에 환자가 만성 환자라 병원을 떠나면 상태가 악화될 확률이 높고, 나는 지금 치료 받으면 회복 가능성이 높으면 당연히 내가 치료 받고 싶고...뭐 그렇더라고요.
참... 그리고 이것도 경제적 관점이라 죄송하지만, 일단 회복 가능성이 낮거나 만성 질환이 있는 환자 겨우 살려놓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사람은 끊임없이 비용을 발생시켜요. 미숙아 살려놓으면 평생 치료 비용 나가고 심각한 외상 환자 살려놓으면 계속 물리치료, 재활치료.. 만약 머리라도 다쳤으면 각종 약물이나 검사, 간병인...
저는 모든 것이 급여화 되고,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다면...... 사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제 경험 상 아주 새로운 치료법이 있는데도 국가에서 허가를 안해줘서 못 한 사람들보다, 기존의 치료법도 돈이 비싸서 포기하고 뒤돌아 간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다만 그 제한된 재화로 인해 혜택을 받는 사람 중에서 내가 포함이 안될 수도 있어요. 그 이유도 꽤나 타당할 수 있어요. 당신은 회복 가능성이 적으니까, 그 치료는 성공 확률이 적으니까. 또는... 살려 놓으면 계속 비용이 나갈 사람이니까.
환자를 보면서 때로는 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이 사람에게 또는 보호자에게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앞으로 이 환자에게 들 비용, 간병하는 가족들의 지쳐가는 모습... 이렇게까지 살려두는 것이 맞나? 이런 상태의 환자까지 살릴 수 있게 현대 의학이 발전하는 것이 맞나? 여기 이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과연 살아서 행복한 걸까?...
차라리 환자에게 당신은 급여 기준이 안되서 제가 약물 투여/치료/검사를 할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갈등이 없어서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거시적으로 보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을테니까요. 빈정대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한 것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