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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들 잊혀진 북한군의 명장 유재흥
게시물ID : history_19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ㅇㅇΩ
추천 : 15
조회수 : 1640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1/07/05 14:27:36
1945년 : 일본군 육군 대위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관

1950년 : 7사단장

         2군단장

1951년 : 3군단장

1953년 : 육군참모차장

1957년 : 합동참모본부 의장

1959년 : 군사령관

1960년 : 예편 (중장)

1960년 : 주 타이 대사

1963년 : 주 스웨덴 대사

1967년 9월 16일 : 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

1970년 :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

1971년 : 국방부장관

1974년 : 대한석유공사 사장

1978년 :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1983년 :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

1991년 : 성우회 회장

일화 1

지금도 대한민국의 초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회자되는 제주도 4.3 사건에서 유재흥은 지휘관으로 대한민국의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전공을 세움

일화 2

남침초기  유재흥은 서울로의 주요 길목인 의정부에서 7사단을 해체시켜버리는 대 전공을 세움 7사단의 해체로 인하여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함 
그때 해체된 3개사단(연대규모)을 수습한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성공적인 지연전과 춘천지구의 국군의 승리가 없었다면 낙동강전선이 형성 될 시간도 없었을수도....

일화 3 

7사단을 해체 시킨 전공으로 유재흥은 새로 편성된 육군 제 2 군단장에 임명됨 물론 역전의 명장 유재흥은 2군단 역시 해체시켜버리는 대전공을 세움 이때 중공군의 대 38군과 42군에 포위당하여 국군의 몇안되는 군단급제대가 사라져버림 또한 중공군에게 막대한 노획물을 안겨줌

일화 4

지금도 국군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회자되는 현리전투에서 국군 제 3군단을 해체시켜버림 이정도면 전쟁의 신이라고 불릴만함 1개 사단과 2개군단을 해체 시키버림(패퇴도 아닌 해체 그야말로 지도에서 지워짐)
국군 제 3 군단의 해체는 미군에게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신용할수없게 만들어 기존의 육본을 통해 지휘에서 바꾸어 직접 한국군 을 지휘하기 시작함 만약 백선엽의 1군단마저 없어졌으면 군단급제대없이 전쟁을 치루뻔함 여기서 2개 군단을 해체시켜버린 유재흥의 대활약이 부각됨
즉 한국군을 고려하여 직접 지휘하지않었던 미군이 지휘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함 사실상 전작권을 넘겨버림

일화 5

현리전투에서 비록 포위당했다고는 하나 그당시 3군단의 전력은 해볼만했으며 포병화력과 제공권등에서 압도적이었음 하지만 유재흥은 지휘를 한다는 명목으로 연락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주해버림 때문에 3군단의 지휘체계 소멸로 인하여 각개격파 형식으로 대패당하고 엄청난 포로가 발생하게됨
이때 백선엽은 유재흥이 후방의 지휘소에도 나타나지않았다고 회고함 

벤플리트: 장군의 군단은 어딨는가?

유재흥: 잘모르겠습니다.....

벤플리트: 아니 그러면 장군의 예하사단은 어딨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그런것같습니다...

벤플리트: 장군은 딴 직업이나 알아보시오!

일화 6

유재흥은 한국말을 그리 잘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히려 일본어가 더 능통했다고 한다.

일화 7 

노무현 정권때 전작권 환수 움직임이 일자 유재흥은 앞장서서 전작권 회수반대 운동에 투신한다 게다가 그의 최고?전공이라는 현리전투의 현장 에 나타나 그때의 전투를 회고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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