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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의 분단책임론과 그 반론
게시물ID : history_19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2
조회수 : 116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2/03 11:29:31
1. 북한의 분단 책임론



(1) 1945년 9월, 스탈린이 소련군에게 내린 지령 2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이라고 지시되어 있는데, 이는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이었다.

반론: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실제 스탈린의 지령에서 중요한 것은 1항이지 2항이 아니다. 스탈린은 1항에서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이 명령서는 북한을 소비에트 연합 내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 목적이지 북한내에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 2항 역시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를 설립할 충분한 기반이 없으므로 그 전단계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자본주의)을 도입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2)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는데, 북한 단독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된 지 반년만에 북한의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반론: 소련과 미국의 통치방식 차이일 뿐이다. 미국은 직접적인 통치방식을 선호했고, 소련은 간접적인 통치방식을 선호해서 남한에는 미군정이, 북한엔 소군정 대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점령한 이상 통치행위는 필요했으며, 통치방식의 차이일뿐 남한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남한 역시 미군정이라는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3) 1945년 10월, 김일성에 의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설립되었다. 공산주의 내에서 공산당 조직은 일국 일당이 원칙이었는데,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확보하기 위해 분국이라는 꼼수로 사실상 북조선 공산당을 설립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공산당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여기서 민주기지론을 주장했는데, 북한을 먼저 혁명의 근거지로 만들고 이를 남한으로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이 단독노선을 걷게 된 계기였다.

반론: 민주기지론은 확실히 단독노선을 걸으려 한 움직임이 맞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많은 공산당 세력중 하나에 불과했고, 당시까지 북한의 정계를 주도하고 있던 건 우파의 조만식이었다.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이 본격화되는 건, 그가 정권을 주도하게 되고 또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1948년 부터였다.



2. 남한의 분단 책임론



(1) 1945년 8월에 38선이 확정되었다. 이것이 휴전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미국이 그은 것이었다.

반론: 1945년 당시 38선은 군사적인 의미만 가진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선이었다. 이것이 분단의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론적인 설명이다.


(2) 1945년 11월, 정치고문 랭던에 의해서 한국인의 정부를 구성하는 정무 위원회 초안이 제출되었고, 이후 실제로 정무 위원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서 랭던은 주석에 '그러나 만일 소련 측의 참여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대해서만이라도 동 방안이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달았는데, 이때부터 이미 미국은 단독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반론: 정치고문이라는 자리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지 못하는 자리로, 랭던은 대외교류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개인적인 생각을 마치 미국 전체의 생각인 것처럼 확대해석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랭던의 정무 위원회 구상은 거의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랭던은 여기서 신탁통치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이를 대체할 기구로 정무 위원회를 제안한 것이지만, 실제 미국은 신탁통치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랭던은 김구를 한국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훗날 만들어진 정무 위원회는, 랭던의 계획안과 이름만 같지 아무것도 반영되지 못했다.


(3)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연설을 했는데, 거기서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라며 단독정부 설립을 주장했다.

반론: 당시 연설의 맥락적인 의미를 보면, 통일이 어려워 보이니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으로, 보도가 과장된 부분이 있다. 또 이승만이 단독정부 구상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는 1947년 말 이후다. 당시 이승만은 정읍발언 보도가 나가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해명했고 점차 발언의 수위를 낮췄으며, 미군정도 정읍발언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승만은 미군정의 눈밖에 나서 사실상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승만쯤 되는 인물이 왜 서울에서 활동하지 않고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한가하게 연설이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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