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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바둑史 (브금)
게시물ID : sports_508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lfl
추천 : 42
조회수 : 255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9/07 11:57:40
천재의 명가 이미 오청원이라는 바둑사의 길이남을 제자를 키워낸 세고에 9단 이었다. 단 두명의 제자를 키우고 더이상 제자는 없을거라고 했던 세고에9단. 그러나 조훈현과의 첫 만남에서 냉큼 내제자로 삼아 버렸다. "세계 최연소 프로 기사가 오청원의 사제가 되다" 그의 존재는 너무나 빠르게 일본 바둑계의 화제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선 이미 프로2단의 자격을 갖고 있었지만 역시 세계 최강이던 일본의 바둑계에선 조훈현은 배울게 많이 남았다. 일본 기원에서 치룬 그의 급수평가는 4급. 조훈현의 자존심에 불이 붙었다. "처음부터 다시하자" 집안의 허드렛 일을 하고, 말도 잘 안통하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조훈현의 열정은 달아 올랐다. 그런 그에게 세고에 9단의 수업방식은 실전 위주의 교육이 아닌 프로 기사의 자세, 마음가짐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특히 대국후의 복기와 기보에 대해서 강조를 했는데 지금도 조훈현은 기보를 잊지않고 꼭 챙기고 있다. 지도기에 인색한 세고에 9단. 조훈현은 9년동안의 문하 생활동안 스승에게 직접 지도받은 대국은 10판이 채 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실전 대국을 할 수 있는 장소는 후지사와 연구실 이었다. 포석 감각이 당대 최고라고 평가 받던 후지사와는 번뜩이는 재치며 탁월한 감각이 조훈현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할까? 후지사와는 먼 이국에서 외로이 공부하는 조훈현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후지사와의 연구회엔 오오다케, 임해봉, 구토 등 당시 일본의 쟁쟁한 기사들이 있어서 어린 조훈현에겐 더할 나위 없는 배움의 장소가 되었다. "덤벼라! 쿤켄 (훈현의 일본식 발음)" 속기를 중요시 하던 후지사와는 조훈현을 볼 때면 어김없이 붙잡고 속기 바둑을 두었다. 감각과 정밀함이 필요로 한 속기바둑에선 후지사와는 당연 일본 최고로 불리었는데 그런 후지사와보다 시간을 적게쓰던 조훈현이었다. 그 후 누구보다 조훈현의 기재를 높이사던 후지사와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훈현의 기재는 세계최고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초일류기사로 우뚝 서고 말 것이다.” “ 이 아이가 바로 장래의 명인입니다.” 후지사와의 직계 제자 아베 요시테루 6단. 그도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조훈현을 이렇게 소개하곤 했다. 조훈현 보다는 한참 선배지만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였다. 조훈현의 천재성에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성격이 좋은 사람 인지라 조훈현을 아끼고 자랑하며 다녔다. 타지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 "쿤켄, 우리 내기바둑 한번 둬볼까? 그냥 두는건 재미가 없자나" 조훈현이 15살 때 일이었다. 얼마전 명인전 2차예선에서 조훈현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한 아베 요시테루는 조훈현에게 도발적인 선전 포고를 했다. "스승님이 내기바둑은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조훈현에게 후지사와 9단이 슬며시 말했다. "쿤켄 걱정말고 붙어봐라. 한판에 100엔 정도는 괜찮다. 아베 말대로 승부욕을 위해선 적당한 양념도 필요한 거야" 어쩔 수 없이 바둑판 앞에 앉은 조훈현. 이왕 하는 대국에 질 생각은 없었다. 한판, 두판 점점 이겨나가던 조훈현은 내리 6연승을 거두고 600엔을 땃다. "쿤켄. 이리오너라" 스승의 부름에 조훈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고에 9단 앞에 앉았다. "아베 요시테루와 내기바둑을 두었다면서?" 어느새 내기바둑의 소식이 세고에 9단의 귀에도 들어갔다. "...네" 스승의 얼굴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나가라. 너는 더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뭐라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조훈현은 짐을 싸고 스승의 집을 나선다. 어디로 가야하나..앞길은 막막한데 갈 곳이 없다. 조훈현은 하루종일 헤매다 한국 식당의 간판을 발견하곤 무작정 들어갔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 입니다. 사정이 어려워서 찾아왔는데...무슨 일이라도 시키는 데로 할테니 숙식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일. 세고에의 분노가 가라 앉는데 걸린 시간이다. 후지사와를 비롯해 많은 동료들이 세고에를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용서를 청했다. 자신의 신념을 꺽지 않기로 유명한 세고에는 처음으로 원칙을 깨트리고 조훈현을 다시 받아 들였다. 1970년. 17세의 조훈현은 33승 5패 1빅(무승부)라는 기록으로 신인상을 받는다. 두면 이기는 시절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80프로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며 이제 봉우리를 맺으려 하던 조훈현은 거리낄게 없는 듯 하였다. 그런 그에게 날라 온 한장의 편지. -입영 통지서- "모든 국민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평등 이전에 인적 자원의 효율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한 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를 3년동안 병역에 묶어 두다니!" 조훈현의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세고에 9단은 탄식했다. 그러나 방도는 없었다. 조훈현은 바둑돌을 놓았고, 세고에는 그런 조훈현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하나 든 채 귀국한다. 10년이 지난 세월. 타의에 의한 귀국이었다. 떠나는 뒷모습을 세고에 9단은 망연 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다. 조훈현이 떠난지 4개월 동안 세고에 9단은 자택에 칩거하다 자결을 한다. 세상과의 연을 끊으며 그는 유언장을 남겼을 뿐이다. 그가 남긴 2장의 유언장 1. 가족들에게 - "노구(老軀)로서 더 이상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저 한다." 2. 친구, 후배들에게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 2편 끝. 참고- www.chohunhyun.com (조훈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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