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감자탕이라는 이름은 중국음식인 '양갈자(羊蝎子)'에서 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즉,
양갈자가 우리나라에 넘어오면서 양대신 돼지를 썼고, '돼지 갈자=>돼지 갈자탕=>돼지 감자탕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는 주장입니다.
이 추측(주장)은
1. 요리의 이름(양갈자-갈자-감자-감자탕)이 비슷하고('갈자'는 등뼈를 의미합니다)
2. 요리의 생김새가 비슷하고(갈색국물의 뼈가 보이는 탕)
3. 요리에 사용되는 부위가 같다(등뼈)는....근거로 제기한 설이었죠
하.지.만
단순한 추측이었고, 근거가 부족했기에 제가 제기한 설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보충설명과 함께 2년만에 돌아왔습니다ㅋㅋ
오컴의 면도날 이론 아시나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84580&cid=58393&categoryId=58393
여러가지 이론이 있다면, 가장 단순하게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게 진실에 가깝다는....걸껍니다 아마도
제 주장이 맞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여러가지 현상이 쉽게 설명되고,
몇가지 우연들이 제 주장을 통해 아름답게 겹쳐지는 걸 보여드리죠 후후후+_+(그냥 우연도 겹치면 뭐다?)
이걸 통해 저는 역사에 '감자탕' 이름의 어원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혹은 그 실마리를 제시한 사람) 으로 남도록 하겠습니다. 후후후 (아 왠지 참 하찮다;;)
일단 효과적인 증명(?)을 위해
"'양갈자羊蝎子'라는 중국음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양보다 흔한 돼지로 바뀌고, 돼지 갈자탕이라고 불리다가 돼지 감자탕으로 바뀌었다"는
제 가설이 맞다고 가정하고 시작해보겠습니다.
'양갈자羊蝎子'에서 '갈자蝎子'는 등뼈의 생김새를 보고 그렇게 부르는겁니다.
羊蝎子需要追溯到康熙年间,蒙古王爷奈曼王有次打猎回来路过后院闻见香气扑鼻。 跟下人打听才知道是新来的厨子给下人们炖羊脊骨吃。奈曼王爷一尝味道鲜美。 然后看脊骨那形状酷似一只蝎子,就起名为“羊蝎子”并且作为府上的食谱。结果后来就传到民间了 대충 해석 : 강희년 기간에 몽골왕인 나만왕이 사냥에서 돌아왔는데 |
양의 등뼈 생김새가 '전갈' 같았던거죠, 그래서 양의 등뼈요리를 '양갈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돼지 등뼈로 한 요리는 뭐라고 부를수 있을까요? '돼지 갈자' 라고 부를 수 있겠죠?
1. 감자탕에 감자(식물)는 안들어가기도 하지만, 돼지 등뼈는 꼭 들어가는 이유가 쉽게 설명됩니다.
- 감자탕은 갈자탕에서 왔고, 갈자는 등뼈를 뜻하는 말이니까요(원래는 양이었지만 돼지로 대체)
2. 흔히 말하는 감자탕의 어원설 중에 하나인 '감자뼈' 설을 쉽게 설명할수 있습니다.
-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일반적인 감자탕의 어원은 2가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감자탕이 자리잡기 시작하던 때와 장소는, 한국에 중국음식이 들어오고 자리잡던 때와 장소와 일치 한다는 우연이 있습니다.
둘다 1800년 후반~1900년 초반 인천에서 발생?하고 중흥했던 음식이라는거죠!
왜 하필 중국인이 많은 인천에서, 중국음식들과 함께 같은 시기에 감자탕이 생겨났을까요? 그냥 우연일까요?
이 기막힌 우연 또한, 감자탕이 '양갈자'라는 중국음식에서 온거라면, 설명이 됩니다.
다른 한국식 중국요리가 인천을 통해 청나라 사람들이나 화교들을 상대하면서 전해지고 발달한것과 마찬가지로
감자탕 또한 그시기에 인천으로 들어와 양갈자가 감자탕으로 변형된거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감자탕의 유래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1899년 경인선 철도공사 때 많은 인부들이 철도공사에 동원되어 인천으로 몰리면서 생겨난 음식이라는 이야기이다.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86484&cid=40942&categoryId=32136 이러한 감자탕은 인천항이 개항됨과 동시에 전국의 사람들이 몰려와 다양한 음식문화를 갖추게 된 인천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899년 경인선 개통 공사에 많은 인력이 동원되면서 뼈해장국과 감자탕이 인천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01681&cid=40942&categoryId=31931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
'양갈자羊蝎子' 도 중국요리 입니다. 심지어 중국요리는 19세기 말 '청요리'라 불리며 들어왔는데, 양갈자도 청대에 나온 요리죠.
2. 요리의 생김새가 비슷하고(갈색의 탕)
3. 요리에 사용되는 부위가 같다(등뼈)
.....는 이전에 제시한 '우연' 말고도
4. "감자탕이 발생한 시기, 장소가 중국음식이 들어온 시기 장소와 거의 일치한다." 는 우연도 제 주장으로 설명됩니다.
또
PS
2년 전 글의 댓글 중에..
"羊蝎子라는 말은 중국말로 '양시에즈'다 한자어로 발음이 되었다면, 문헌상으로 남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덧붙여 봅니다.
1. 문헌에 없다는 부분에 있어서..
물론 1899년~1900년대 초기 노동자들이 먹던 음식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가 밝혀진다면 더 좋은 근거가 될겁니다.
그런게 있었다면 제가 여기서 이렇게 이런 글을 적을이유가 없겠죠^ㅡ^;; 이미 어원이 확실히 밝혀졌을테니까요;
하지만, 감자탕은 다른 근사한 대접용 '청요리'들과 달리 서민들의 음식으로 발전해왔고,
그렇기에 더더욱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자료가 문헌적으로 남아있기 어려운게 아닐까요?
설렁탕의 경우도. 선농단이라는 제단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선농탕이라는 '음식이름'은 옛문헌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여러 설들이 있는거구요 (음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4138&cid=48179&categoryId=48239 )
아무래도 설렁탕도 한자로 책에 적을만하기에는 너무나도 서민적인 음식이었기 때문 이겠죠?
2. 羊蝎子를 양갈자가 아니라 양시에즈라고 읽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그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인천을 통해 넘어왔던 '청요리'들을 보면, 중국발음으로 된 요리(류산슬, 깐풍기 등등)도 있지만,
羊蝎子를 양시에즈라 부르지 않고 '양갈자' 라고 부르듯
한자어로 부르는 요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팔보채, 불도장, 동파육 등등..)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같이 한자어로 부르는 요리들은 그 요리 이름에 재미있는 일화가 얽혀있거나(불도장, 동파육, 궁보계정)
재료자체를 강조할때(팔보채, 삼선짜장의 '삼선', 해삼주스의 '해삼' 등등)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당연한것이, 중국어로 이름을 지어놓으면 그게 무슨 한자인지 알아듣기 힘들테니까요..
한자어로 발음을 해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겠죠
불도장처럼 스님이 담을 넘었다든지.
동파육처럼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든지
궁보계정처럼 궁보직을 맡은 정보정이라는 사람을 위해 만든 요리라든지..처럼 말이죠
그리고 위에서보듯 "蝎子"또한 그 요리의 이름에 재미있는(?) 일화가 얽혀 있습니다.(몽고왕에 관한)
그러니 시에즈보다는 '갈자'라 불러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었을거고,
그래서 '羊蝎子'가 전해진다면 양시에즈 보다는 양갈자라고 전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가 책을 싫어해서
글을 재밌고 야물딱지게 못써요...ㅠ
길고 못쓴글 꾹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출처 | 내머릿속을 기반으로 해서 네이버, 구글 검색을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