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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의 취미생활
게시물ID : military_195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eio
추천 : 111
조회수 : 1080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4/14 04:59:43


우리부대는 시설이 매우 낙후된 편이었다. 당연히 사병들이 여가시간을 보낼만한 장소나 도구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싸지방이라는걸 제대한 후 몇년이 지나서야 처음 들어봤을 정도였다. 왠지 음란해보이는 단어에 설레여했지만

싸이버지식방이라는걸 알고 적잖은 실망을 하기도 했다. 그날도 내무실을 굴러다니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을때 

휴게실에 당구대 하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시절 당구에 푹 빠져 입대 전까지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한 

나는 벌떡 일어나 휴게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직접 본 당구대는 나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언제 생산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당구대였다. 여기저기 헤진데다 곳곳에 뚤린 구멍까지.. 

겉으로 봤을때는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가 동굴 안에서 생마늘을 씹으며 죽빵을 쳤을것 같은 그런 당구대였다.

거기에 광채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광에 금까지 간 당구공과 활처럼 휜 큐대까지... 실망이 컸지만 그래도 쳐보면 

할만 하겠지 라는 생각에 큐대를 잡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첫 샷을 날리고 나서 나는 인디아나존스 1탄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쿵쿵쿵하는 바윗돌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곳곳에 있는 파인자국 때문에 공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 멋대로 굴러갔다. 거기다 다리가 짝이 안맞는지 서있는 상태에서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이 지 혼자 슬금슬금 굴러가는 자체시간제한 시스템까지.. 도저히 제대로 된 당구를 칠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몇 번 치다보니 어느새 이 말도 안되는 당구대에 적응할 수 있엇다. 계속 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린을 읽듯 당구대의 결을 읽을수가 있었고 수많은 삑사리 끝에 어느정도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가며 진짜 당구같은 모습을 갖춰갔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임과 담배내기 당구를 치고 있을 때였다. 게임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고 마지막 한점이면 내가 승리를 쟁취할 참이었다. 

신중하게 자세를 취하고 그동안 수없이 해왔던 pri훈련을 떠올리며 숨을 멈추고 큐대를 내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나에게 나인볼황제 용소야의 기운이 강림했는지 당구공은 당구대를 떠나 허공으로 날아갔고 그대로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졸지에 모두의 즐거움을 앗아가버린 나는 비난여론에 휩싸였고 대안을 찾기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큐대를 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자치기였다. 지금생각해보면 병신같기 그지없는 아이디어

였지만 절박했던 나에게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느껴졌다. 더 이해할 수 없는건 나의 이 말도안되는 제안에 환호하며 찬사를

보낸 동료들이었다. 아마도 그때에는 모두들 지루함에 미쳐 제정신이 아니었던게 분명했다. 큐대를 잘라서 적당한 크기의

막대기를 만들고 우리는 내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한가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건 바로 아무도 자치기위 룰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우리는 서로 아는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룰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대부분 아는게 없어 결국은 야구와 자치기가

반반씩 섞인 괴이한 룰을 가진 게임이 탄생했다. 그리곤 이 게임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구? 야치기?

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일단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첫번째 선수로 나선 나는 바닥에 

놓인 막대기를 향해 방망이를 내려쳤다. 하지만 나의 습자지같은 과학지식은 큰 화를 불러왔다. 바닥에 놓인 

막대기는 수직으로 솟구치는게 아니라 내 몸쪽을 향해 솟구쳤고 그대로 나의 소중한 드래곤볼을 직격했다. 그것도 세로로. 

숨을 쉴수 없는 고통에 그대로 무릎 꿇었지만 동료들이 엉덩이를 쳐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의 희생으로 

바닥에 막대기를 놓고 치는게 아니라 손에 들고 치는걸로 룰이 규정됐고 나는 수비위치로 들어섰다. 그렇게 한참을 게임을 

하다가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되었다. 그건 이 획기적인 게임이 생각보다 드럽게 재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막대기를 치고

줍고 치고 줍고의 단순한 반복이니 어찌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개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섣불리

재미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루한 게임을 이어가던 중 후임이 날린 막대기가 나의 소중한 이성구를 다시한번 직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이 지루한 게임의 막을 내릴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이 게임의 정식명칭은 '잦치기' 였다.

물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이 게임을 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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