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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애절양 요즘 상황과 조선말기의 상황이 다르지 않네요
게시물ID : history_195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응답하라2012
추천 : 5
조회수 : 12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2/09 17:52:37
조선말기..
양물을 잘라버린 남편의 양물을 들고, 관아에 가서 통곡하는 아내가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다산 정약용 선비는 '애절양'이라는 시를 지어 시름을 달랠수 밖에 없었다..
요즘 나는 다산 선생님에게 푹 빠져 있다..
그 분을 생각하면 할수록 경외심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는데 ..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다산은 세계가 평가하는 인물이다.
유네스코는 2012년에 다산을 세계가 기념해야 할 인물로 선정했다.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독일 문학가 헤르만 헤세와 같이 등재됐다.
동양에서는 다산이 유일하다.
다산은 유학자다.
동시에 탁월한 행정가, 교육자, 역사학자, 수학자,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지리학자, 법학자, 의사, 시인, 화가였다.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학문의 통섭과 융합을 실천하며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했다.
그가 지은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됐다.
축성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정조대왕은 “10년 안에 성을 완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다산은 수원화성을 34개월 만에 완성했다.
다산의 치밀한 건축설계와 그가 직접 고안한 거중기 등 첨단 건축장비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다산은 천연두가 창궐하자 종두법도 고안했다. 임금이 위독할 때 의사로서 두 번이나 궁중으로 불려갔다.
다산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과학의 기본은 수학, 물리, 화학, 생물이다. 다산은 그걸 꿰뚫어 봤다. 그는 산학서(算學署)라는 수학연구기관을 정부기구로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공업기술의 정교함이 수학에서 연유함을 알았던 것이다.
다산의 시대에는 사람의 머리수대로 세금을 내어야 하는 인두세였다.
갓 낳아 머리에 탯물도 마르지 않은 영아에게도 세금을 물렸다.
한 농부가 있었는데 세금 낼 돈이 없자 관청에서 그만 소를 끌고 가 버렸다. 소는 농부의 전 재산이다. 결국 농부는 칼을 갈아 자신의 생식기를 무참히 잘라버렸다. 당시에는 피임법이 없었다. 우둔한 백성이 애를 안 낳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정치를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할 수가 있을까? 다산은 이런 사회현상을 시에 담았다. 그 시가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다. “양물을 자른 것을 슬퍼하노라” 라는 농부의 심경을 담은 시다. 다산은 25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대부분 역사성과 현실성이 뚜렷하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지은 ‘애절양’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노전리 젊은 새댁 곡소리 서러워라
관아 앞에서 하늘이 무너져라 통곡하네.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내는 있어도
일찍이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다는 소리 들어 본적 없네.
시아버지 이미 죽고 갓난아기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남정네 삼대가 모두 군적에 올라 있으니
억울함을 따지려 해도 관청의 경비는 호랑이 같고
아전들은 적반하장으로 집에 있는 소마저 끌고 가네.
남편이 칼을 갈아 방안으로 들어가니 자리에 선혈이 낭자하네.
‘이게 다 내가 새끼를 낳은 죄여’ 라며 자기 양물을 잘랐다네.
누에치던 방에서 궁형도 말이 안 되거늘
환관 만들겠다고 자식 거세하는 세상을 말해 무엇 하랴
자식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주는 것이거늘
하늘의 도는 남자가 되고 땅의 도는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
말과 돼지를 거세하는 것도 가엾다 할 일이거든
대를 이어야 할 양민들 생각해보면 말 해 무엇 하랴
권세가 들은 평생토록 풍악이나 즐기면서
쌀 한 톨 배 한 치도 바치지 않는구나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고
유배된 몸 시름에 겨워 거듭거듭 시구 편 만 읊노라.
(1803년 순조3년 강진에서 정약용)
왕조국가 시절에 다산은 백성이 중심이 되는 개혁을 주장했다. 다산을 지극히 아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등장하자 천주교박해의 신유 교옥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를 당했다. 다산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다산의 삶은 고통의 범벅이었다.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형장의 이슬이 됐다.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죽었다. 18년 유배생활 동안 다산은 530여 권의 저서를 썼다. 하도 책상 앞에 오래 않다 있다 보니 발목의 살이 벌어지고 세 번이나 복숭아뼈가 밖으로 삐어져 나온 일도 있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공직자들의 바이블로 불린다. 총 48권으로 구성됐다.
다산은 유학자이지만 정자, 주자의 관념 성리학 보다는 공자, 맹자의 윈시유학을 숭모했다.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가 마음속의 이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생활에서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 나타난 결과가 바로 인의예지라고 다산은 보았다. 다산은 생각만 하는 인의예지가 아니라 실천의 결과가 인의예지라고 정의한 것이다.
다산은 행동으로 실현가능성이 없으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쓴 편지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너희 어머니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해라. 너희가 효를 실천하면 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고, 유배가 풀리지 않아도 좋다.
실천되는 것만 보면 나는 행복하고 기쁘다.” 다산은 사서오경이 마음속의 이치라는 것을 버리고 모두 현실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걸로 바꿨다. 이것이 바로 다산의 실학이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있을 때였다. 고을에 산적 때가 출몰했다. 다산은 산적 때를 무작정 소탕하지 않았다. 먼저 민첩한 아전 몇을 산적 소굴로 보냈다. 이들이 왜 산적이 됐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 오도록 했다. 결국 산적과 관청의 아전이 연결됐기 때문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산적은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다. 조폭이 강력계 형사들과 공생하는 셈이었다. 다산은 산적을 치지 않았다. 산적과 연결된 아전들을 모두 내쳐버렸다. 그러자 산적문제는 저절로 없어졌다. 나중에 산적 몇을 잡았지만 가서 농사를 지으라며 돌려보냈다. 만약 다산이 산적 소굴만 공격했더라면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했을 거다. 다산은 늘 원리를 먼지 파악하고 그걸 현실에 접목했다.
다산이 평생 놓지 못한 책이 『논어』다.
첫 장 첫 구절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란 말이 나온다.
‘학’은 배움이고 ‘습’은 익히는 거다.
수많은 학자들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로 해설했다. 하지만 다산은 달리 해석했다. ‘학’은 배움이고 ‘습’은 실천이다. 라고 풀이했다. ‘시’는 시의적절하다로 해석한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는 ‘배우고 때 맞춰 실천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이다.
사람이 배웠으면 행동해야 한다. 사람이 알았으면 실천해야 한다. 배우고 알맞게 실천할 때 기쁘기 그지없다.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배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 하다. 배운 것을 실천할 때 그것은 기쁨이 된다.
다산은 자신의 배움을 끊임없이 현실에 대입했다.
다산은 배운 것을 실천할 때 그것은 기쁨이 되고 희열이 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다산의 실학이고 다산의 생활철학이다.
‘배우고 때맞춰 실천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이 한 구절을 얻고 나니 기쁘기 한량없다.
다산은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을 자주 썼다.
호연지기는 높은 산에 올라 함성을 지르는 게 아니다.
다산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자신이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호연지기’라고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모름지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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