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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은 필연이었을까?
게시물ID : history_195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4
조회수 : 137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2/11 15:59:45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필연인지 아닌지. 역사에 IF는 무의미하므로.
다만 말할수 있는건, 일본내부의 정치적 흐름이 서양문물을 본격수입하기 시작한 무로마치 막부-전국시대부터 미국에 대한 개항전까지 결코 근대적이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에도막부는 이전 무로마치 막부와 전국시대에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대폭 차단하고, 통제강화에 나섰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2359
무로마치 막부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막부 재정을 확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보다 대외 무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쇄국이란, <서양에 대한 쇄국> 및 <농업상품에 대한 쇄국>입니다.

에도 막부는 중국,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무역은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서양과의 무역은 단절하고, 단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심지어 네덜란드와 교류도 데지마라는 인공섬에서 막부독점으로 수행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D%B0%EC%A7%80%EB%A7%88

네덜란드 난학이 이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배경형성이 도움이 된것은 사실이나,
(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흐름 )
에도막부 시절의 정책을 보면, 서구의 근대적 영향이라는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교호개혁, 간세이개혁, 텐보개혁의 내용을 보면
- 수확량과 무관하게 일정한 량의 미곡 수취 : 농민들로부터 수취강화
- 시장통제강화 ( 오사카시장통제 )
- 출판단속령 : 사상통제강화
- 구리귀 명령 : 일정규모 이하의 상인들은 강제로 농민으로 전환

전혀 근대화나 상공업강화 이런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목표는 오직 하나 막부의 재정안정

그래서 외국선박에 대한 조치도 조선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2676
무휼령이란 것인데, 외국선박이 오면 식량과 연료 제공하고, 안녕히가세요하는 정책이죠.
조선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외세는 힘으로 진압한다는 타불령(1825년)까지 내렸습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그랬듯이.

그러다 갑자기 개항을 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정책방향과는 완전 무관한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40314307&nidx=14308

막부는 가능하면 쇄국을 계속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쇄국을 고수할 만한 힘이 없었다. 푸차친의 來日에 자극을 받은 페리 제독은 예상보다 빠른 1854년 1월16일,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에도灣 깊숙이 들어왔다.

幕府는 페리의 강경한 개항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요코하마가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2월10일부터 담판이 시작되어 3월31일 마침내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가나가와(新奈川)조약이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은 영국·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와도 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서양의 군함을 보고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에 반사로(反射爐)를 설치하여 대포를 제작하고, 에도灣을 방어하기 위해 포대를 쌓는가 하면 나가사키에 해군견습소를 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幕府에 눌려 실권(實權)이 없었던 천황을 받들어 西洋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尊王攘夷(존왕양이)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도 언급됩니다. 무력으로 열린거라고.
막부나 민간이나 개항에 별 관심이 없었던 건, 이후 강력하게 분출된 존왕양이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탄압하던 막부도 존왕때문에 그런거지, 양이에는 별 이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의 주체였던 사쓰마/조슈번은 초기에 강력한 쇄국정책(양이)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 후에 권력획득을 위해 파격적으로 개국쪽으로 돌아서죠.
( 개국과 근대화를 이해하고 돌아선것도 아니었습니다 )

사쓰마 조슈가 처음에 어땠는지, 사쓰마번의 사쓰에이전쟁, 조슈번의 시모노세키전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쓰에이 전쟁, https://mirror.enha.kr/wiki/%EC%82%AC%EC%93%B0%EC%97%90%EC%9D%B4%20%EC%A0%84%EC%9F%81
시모노세키 전쟁, https://mirror.enha.kr/wiki/%EC%8B%9C%EB%AA%A8%EB%85%B8%EC%84%B8%ED%82%A4%20%EC%A0%84%EC%9F%81

대체 이 역사흐름 어디에, 전국시대부터 급속하게 전파된 서양문물을 기반으로 근대화의 기풍이 퍼져나가,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졌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볼땐 그냥 참 운이 좋았네, 그 말 뿐이 할게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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