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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는것인가 읽는것인가 - 장미의 이름,1989
게시물ID : movie_196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니미니미
추천 : 9
조회수 : 92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1/22 03:40:03


  <장미의 이름>1980년 출판된 소설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철학자·역사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이다. 이후 1989년에 숀 코넬리 주연으로 영화화가 되었다. 사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원작의 줄거리에 충실하게 제작된 탓에 딱히 소설 장미의 이름과 견주어 부각시킬만한 큰 차이는 없다. 주요 줄거리는 중세의 수도원의 살인사건을 뛰어난 재치의 수도사가 해결해 나가는 것인데, 가장 중요하게는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 희극에 관한 서책을 두고 그것을 숨기려는 자와 읽으려는 자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며, 이와 연관되어 인간과 웃음에 관한 논쟁,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논쟁 등이 소설의 탄탄한 줄거리를 이룬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즉, ‘플롯중심의, 줄거리 중심의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화의 과정에서 매체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몇 가지 피할 수 없는 변화를 겪는데 이를 질문으로 압축하자면 영화, 보는 것인가 읽는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결론에 다다르기 전에 의미 있는 변화를 살펴보면, 소설에 비해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이 소실되고 압축된다. 실제로 소설에서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이나 사물, 배경에 대한 묘사라던가, 인물들의 주고받는 대사로 구성된 철학적인 토론, 그리고 소설 줄거리의 여러 파트들이 아예 생략되었다. 이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지만 당연히 영화매체의 시간제약성에 기인한다. 영화는 상영되는 것으로, 상업성이 매개된 영화의 특성상 이러한 시간의 제약으로 줄거리들이 시간적으로 압축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줄거리의 전개 작업 중 일부를 이미지에 할당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보는 것으로써 이미지들이 묘사(deion)에 해당하는 작업을 대신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설을 읽을 때 가지고 있던 무정형의 이미지들이 영화화된 이미지들과 조우하면서 가상의 이미지들이 영화의 가상 이미지에 고착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소설가가 수도원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일련의 추상적 작용을 통해 그 이미지가 문법적 코드를 갖춘 언어로 기록되는 동시에 수도원의 이미지가 사상(捨象)되고, 소설을 읽는 독자는 수도원에 대한 언어적 묘사를 읽고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하며(이 단계에 있어서 독자들의 수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수도원의 이미지가 각자의 머릿속에서 탄생한다.), 다시 영화는 이 수많은 수도원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한다. 이는 소설의 등장인물과 그 배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통합은 앞서 다뤘듯이 서사의 보조로써 문자적 텍스트(줄거리)의 가독성을 강화한다. , 영화의 줄거리 전개를 보조하기위한 수단으로써 인물의 행동이나 외양을 박제하고, 그 배경을 전시함으로써 리얼리티를 강화하고 대사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대신한다. 이를 통해 관람자가 상상에 몰두하는 대신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과 그 줄거리에 몰두하게 만든다.


  둘째로는, 읽는 것으로써 줄거리의 일부 중 기호(Sign)에 해당하는 것이 이미지로 대체됨에 따라 영화의 관객은 소설을 읽을 때와 달리 이미지를 기호로써 읽어내야만 한다. 이유인즉슨, 소설에서는 기호이미지가 언어로 기록되어 독자의 수고는 상상’, 즉 이미지적 사고에 그친다. 반면 영화의 관객은 이미지를 전체의 줄거리에 합리적으로 편입되는 언어적 기호로 번역하여 읽어내는 수고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은 이미지화된 기호나 이미지의 묘사적 작용 모두 서사(Narrative)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영화로 그 매체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읽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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