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팬들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타이틀들이라 타이틀의 '획득'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하다. '로열로더'나 '트리플크라운'처럼 방송사에서 의도하고 만든 경우에는 확실한 기준이 있지만 '본좌'니 '천왕'이니 하는 것들은 팬들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 기준이 모호하다. 따라서 그 자격에 있어서 논란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새 만들어진 '본좌'의 이름. '천왕'의 이름에 만들어질 때엔 있지도 않았던 자격들을 억지로 만들어 끼워 맞추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기준은 이른바 '포스'. 승률, 스타일, 경기력, 그리고 드라마틱한 배경. 이것들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3대니, 4대니 하는 경우나 조진락변태준 등은 당대 제일의 강력함을 가진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불렀던 것들이다. 본좌. 이 이름도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 마재윤. 당대 최강의 강함을 가지고 각자의 시대를 제패했던 최강의 선수들.
분명히 그들은 강자였다. 그리고 몰락했다.
2
그렇다. 몰락.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성기의 임요환은 정말로 강했다. 현란한 컨트롤과 기가 차서 말도 안나오는 기략으로 상대를 유린했다.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온게임넷 결승 3연속 진출. 2연속 우승. 매지션이라고 불리던 기욤을 3:0으로 격추시키고, WCG를 전승으로 우승했다.
이윤열, 말할 것도 없다. 앞마당 먹은 이윤열을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사상 초유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천재라는 이름이 걸맞는 재기발랄함, 그리고 재능 앞에서는 전성기 임요환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최연성은 또 어땠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물량. 압도적인 힘. 전대의 본좌 이윤열을 완전히 격파했다. 그 어떤 선수도 최연성에게 대적할 수 없었고, 팀리그의 부제는 '최연성을 이겨라'. 그런 최연성이었기에 '안하무인'의 거만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마재윤. 저그의 마에스트로. 혹은 독재자. 프로토스, 그리고 테란이 가질 수 있었던 희망이며 내일을 파괴하는 자. 지금 생각하면 유치했던 그 문구도, BGM Fear와 함께 당당하게 전진하는 마재윤과는 참 잘 어울렸다. 테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단숨의 저그의 희망으로 뛰어올라 전대의 삼본좌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겼다.
그들이 각자 시대의 축을 차지하고 있을 때마다 팬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선수만은 몰락하지 않겠구나. 정말 세다. 밉살스럽기까지 하다.
3
그 중 어느 하나도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몰락의 시기가 왔을 때마다, 팬들의 격렬한 반응이 뒤따랐다.
이윤열이라는 새로운 재능 앞에서 임요환의 팬들은 신경이 곤두서서, 두 팬들 사이에는 항상 마찰이 뒤따랐다.
최연성의 등장, 이윤열은 조롱당했다.
최연성의 몰락. 전성기 때 심심하면 터지던 최연성의 '빅 마우스'에 격렬하게 반발하던 그의 '까'들도, 너무나 무력해진 최연성을 보며, 더이상 터지지 않는 '빅 마우스'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영원히 '최강'의 악역일 것 같았던 최연성도.
마재윤의 몰락. 마막장, 마민폐. 어이없는 패배가 연달았고 마재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건 그리 드물지도 않게 되었다. 춤추는 이성은의 뒤에서 마재윤의 눈은 이글거렸지만, 다만 그 뿐. 김택용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마재윤은 이를 악물었지만, 다만 그 뿐.
4
임요환을 보았다. 그는 공군이라고 한다. 짧게 깎은 머리와 검정색의 뿔테 안경. 자신만만하게 상대를 유린하던 젊고 패기만만한 황제도, 9년이 지난 지금은 늙어있었다. 늙었다고 할 나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를 반하게 만들었던 그 시절의 화려한 빛은 없었다.
그렇다. 2001년, 나는 그 화려한 빛에 이끌려 그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50만의 팬들은 지금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프로리그 현 시즌 전적 총 11승 10패. 50%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타작 승률이라며 비웃지 않았다. 어쩌면 못했을지도 모른다. 임요환이 군대로 가기 전에는 그토록 신랄하게 - 때로는 임요환의 팬을 자처하는 나한테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던 - 임요환을 '까던' 그 '까'들조차도. 심지어 나는 스갤의 한 임까가, 구성훈과의 경기 후에 '임까도 더는 못해먹겠다....임요환 시-박 새키...'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임요환이 화려한 빛을 잃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패배를 모르는 패국의 황제가 포기를 모르는 천전(千戰)의 노장이 되었던 것은....
11승 10패. 그를 위해 임요환이 동원했던 갖가지 심리전과 기략. 혹자는 그것을 임요환의 화려했던 그 시절, 그 실력의 재림이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굳어가는 손, 느려지는 반사신경을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려는 처절함으로 보였다. 그랬다. 처절했다. 그는 잊혀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9년 동안,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며, 자신과 시대를 겨루었던, 혹은 자신을 짓밟았던,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잊혀지는 것을 보아왔을까. 그는 잊혀지고 싶지 않았기에 단 1%의 승리를 위해서도 필사적이었다. 처절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화려했던 그 시절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이윤열은 혹사당했고 그의 팀은 원맨팀이라고 불렸으며, 그 재능도 빛을 잃은 듯 보였다. 거기에 안타까운 재난이 겹쳤다. 나는, 더이상 그가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때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불렸던 남자. 임요환을 웃돌았던 그 재능에 시샘을 했던 것도 사실. 그러나 이제 그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입 속에 묘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이윤열을 보았을 때 그는 손에 금빛의 마우스를 쥔 채 울먹이며 하늘에 계신 그의 부친께 승리를 바치고 있었다.
최연성이 인터뷰했다. 이제는 근성밖에 안 남았다고.
근성이라니. 나는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오늘 마재윤이 울었다.
5
몰락은 피할 수 없다. 해가 반드시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본좌'란 타이틀은 과거의 그가 최강이었음을 증명하는 것. '1대', '2대', '3대', '4대'는 현재의 그가 최강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 임요환도 이윤열도 최연성도 마재윤도 그리고 앞으로는 김택용도, 송병구도, 이제동도. 더 이상 '최강'이라고 불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온갖 굴욕적인 패배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쓴웃음을 삼키면서도 또 한 번의 비상을 의심하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나는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 때 전설적인 강함이었던, 저 사진 속에 박힌 과거 한 순간의 당신들이 아니라 격변의 한 가운데에서 한결같이 포기를 모르고 분투하는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본좌라는 타이틀 없이도 당신 자신으로 남아있는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