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건 없는데 하며 나가보니 아들이었다. 대한민국의 여느 가정이 그렇듯이 나와 아들의 관계는 절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허심탄회하지도 않은 그런것이었기에 갑작스런 아들의 방문에 적잖이 놀랐다. 이놈이 급하게 차를 빌리러 왔나 싶었는데 약속이 있어서 이쪽을 지나가게 됐다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둘만의 식사가 언제였더라...무슨이야기를 해야하나 아들과의 식사를 걱정하는 내가 한심하면서도 아들의 이 오랜만인 제안이 반갑기도 했다. 자주가는 순대국집으로 녀석을 데려갔더니 아빠나 대학생인 자기나 똑같은 걸 먹는다며 놀래는 모습이 새삼 귀여웠다.
그렇게 밥을 먹고 아들이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중, 갑자기 엄마 생일이 언제인지 아냐고 묻는다. 괘씸한놈, 그런것도 모를까 싶어서 묻지도 않은 결혼기념일 까지 이야기해주었더니 처음보는 날짜를 적은 종이를 내밀며 이건 뭔지 아냐고 묻는다. 전혀 모르겠는데....했더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생신이라며 자기도 오늘에야 알았단다. 나도 참 무심했구나 싶어서 그러냐며 종이를 받아들고 버스를 타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니 직원들마다 아드님이냐며 사진볼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멋있다며 나와는 딴판이라고, 아드님좀 소개시켜 주면 안되냐고 농을 치는 직원들이 밉지않아 오늘은 회식이다 하며 오랜만에 이기지도 못할 술을 잔뜩먹고 늦게 집에 들어왔다. 항상 먼저 잠드는 아내가 왠일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놀래 혹시 화났나 싶어 조심스래 아직도 안잤냐고 물어보니 오늘 아들은 잘 만났냐고 되묻는다. 잘 만났지, 당신 생일물어보고 장인어른 장모님 생신적힌 종이도 주더라고 했더니 아내가 더 말을 잊지 못하고 병원이름이 적힌 서류봉투를 내민다. 알수없는 영어가 잔뜩 적힌 진단서가 들어있었다.
아들은 어릴때부터 집을 많이 떠나있었다. 기숙학교, 군대, 유학, 그때마다 펑펑울던 지 엄마에 비해 난 언제나 늘 그런 얼굴로 잘 다녀오라고 말할뿐이었고 그때마다 아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씩 웃으며 지 엄마 등을 토닥여주며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아들이 어른스럽다는 생각에 군대를 가는데도 웃으면서 가더라니깐 하며 은근히 자랑을 했고 아들도 내가 소위 쿨한 아빠라며 친구들에게 농담반 진담반 자랑했단다.
그렇게 아들은 끝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씩 웃으며 안녕히 계시라는데 끝내 쿨한 아빠로 남지 못해서, 드라마처럼 친구같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해서, 해달라는 것 다 해주지 못해서, 그리고 지 엄마 생일을 물었을때 니 생일도 안다며 대답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